소설리스트

템빨-43화 (39/1,794)

제6장.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빚에 허덕이며 최하층민의 삶을 살던 내가 최근 일주일 사이에 부자가 돼버렸다.

말락서스 레이드 당일 획득한 수익이 현금 4천만 원 이상.

폰의 질풍창을 제작해준 대가로 받은 금액이 9억 6천만 원.

그 외 틈틈이 길드원들의 아이템을 감정, 수리해주면서 벌어들인 돈이 1천만 원가량.

이렇게 해서 번 돈이 총 10억 원을 가뿐히 넘기건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수입이 또 발생했다.

[30만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엉?"

일전에 지슈카에게 받았던 돈 주머니로부터였다.

인벤토리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 주머니를 별 생각 없이 열어보았더니 현금으로 환산하면 무려 3억 6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 쏟아져 나왔다.

"헐… 이게 뭐다냐?"

지슈카로부터 돈 주머니를 받던 당시의 나는 아영이에게 상처를 받은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돈 주머니의 액수를 확인해볼 의욕도 없었고 대충 인벤토리에 넣어두었었다. 그때만 해도 이 작은 주머니에 설마 이만한 거금이 들어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딴 오브의 시세가 60만 골드나 된다고?"

말락서스가 드랍한 오브의 등급은 유니크에 불과했으며 내가 제작한 유니크템들과 비교하면 성능이 썩 좋지 못했다.

내가 제작한 레전드리 제작템 무아지경의 검이 22만 골드에 팔렸던 점을 감안해봤을 때 유니크 등급인 질풍창이 80만 골드에 팔리고 말락서스의 오브가 60만 골드로 시세가 책정된 것은 참 웃긴 일이다. 아무래도 Satisfy 유저 중에는 돈을 허투루 쓰길 즐기는 사람이 많은듯하다.

"이거야 원! 폰만 호구가 아니었구만! 아주 그냥 호구 천지였어!! 난 레전드리 템을 22만 골드에 팔았었는데 고작 유니크 템을 60만, 80만 골드씩에 구매하는 호구들이 있다니!! 하하핫핫!! …은 개뿔! 크흑!"

쇼크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고 눈앞은 핑핑 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급기야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콧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으허허헝!!"

아무리 두렵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이제 슬슬 인정해야할 때다.

내가 행정관 블라디에게 무아지경의 검을 22만 골드에 팔아넘긴 건 미친 병신 짓이었다는 사실을!

"호구는 나였어…! 레전드리 템을 NPC한테 똥값에 팔아넘기다니! 젠장!! 염병!! 썩을!! 으아아아아악!!"

유니크 아이템들의 시세를 감안해봤을 때 레전드리 아이템의 시세는 최소 150만 골드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 굳이 150만이니 뭐니 선을 그어놓고 추측할 필요도 없다. 그냥 경매장에 올리면 알아서 비싸게 팔릴 것이다. 200만, 300만에 팔려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뭣도 모르고 NPC의 꾐에 넘어가 22만 골드라는 헐값에 팔아 버렸으니 세상에 나보다 더 호구가 있을까?

나는 그야말로 호구 중의 호구.

킹 오브 호구다.

"…자살할까. "

이번에 벌어들인 14억이 하찮게 느껴진다. 애초에 빚쟁이였던 놈이 빚을 청산하고 14억을 벌었다는 건 그야말로 인간승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닌 업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 본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우. "

나는 심호흡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노력했다.

행정관에게 무아지경의 검을 판매한 대가로 윈스톤의 귀인이 되어 모든 세금을 면제 받게 되었고, 신성의 방패의 제작법을 얻어 레전드리 신성의 방패를 제작할 수 있었다. 또 그걸 강도당해서 어찌저찌 하다가 말락서스를 잡고 아이린 영주를 구출해서 호감도를 최대치로 만드는가하면 체다카 길드와 인연이 닿는 등 결과적으로 좋은 흐름을 타고 있으니 행정관에게 무아지경의 검을 판매한 일은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그래!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다! 좋아지고 있어! 지난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정 화를 못 참겠으면 빌어먹을 행정관놈한테 기회 봐서 엿 먹여주면 된다! 좋아! 다 잘 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몇 번이고 소리쳐 되뇌다보니 황폐화되었던 마음이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애초에 나는 이미 지난 일에 연연할 여유가 없다. '

이벨린의 제작 의뢰를 완료해야하기 때문에 바쁜 몸이다.

이틀 전.

이벨린은 가시를 단 1개 제작할 수 있는 만큼의 재료만 구해왔었다.

가시를 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 중에는 나브의 횡경막이라는 아이템도 포함되어있었는데 그 아이템이 워낙에 진귀해서 이벨린의 능력으로는 1개밖에 구할 수 없었다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시의 제작 난이도는 내가 여태까지 제작한 아이템을 통틀어서 가장 높았기 때문에, 나는 제작 기회가 단 1번뿐이라는 점에 긴장하며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집중해서 최선의 자세로 제작에 임했었다.

그리고 도중에 난입한 자이언트 길드 놈들에게 방해받고 말았다.

공을 들여 제련한 순수한 금속 위에 나브의 횡경막을 얹어놓고 정말로 힘들게 단조하며 단련하고 있었건만 갑자기 피 묻은 철 덩어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힌 것이, 내가 금속을 망치로 딱! 하고 때리는 순간 슉! 하고 날아와서 금속에 그 철 덩어리가 일부 혼합되고 말았다.

그에 이성을 잃은 나는 자이언트 길드 놈들을 사냥했고, 그 사이 방치 된 금속은 더 이상 재료로서 사용할 가치가 못 된다고 판단. 대장간 구석에다가 버려버렸다.

'이물질이 섞여버린 재료 따위로 아이템을 완성해봤자 쓰레기 노말 등급이 뜰 게 뻔하니까 굳이 시간낭비 할 필요 없지. '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대장간으로 이벨린이 찾아왔다.

"드디어 구해왔습니다!"

활짝 편 표정으로 예쁘장한 얼굴을 한층 더 빛나게 만든 이벨린이 새로운 가시의 제작 재료들을 건네 왔다. 그중에는 물론 나브의 횡경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벨린은 지난 이틀 동안 이 횡경막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준 했던 것이고.

"좋아… 반드시 에픽 이상으로 만들어 보이고 말겠어. 내일 오전까지 완성시켜 놓을 테니까 연락 하면 곧장 뛰어와라. "

"옙!"

이틀 전부터 이벨린은 내게 동경의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자이언트 길드 놈들을 해치우는 모습이 너무 멋졌다고 한다.

'이 자식이 생긴 거랑 달리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미소년치고 착한 놈 없는 줄 알았는데 이놈은 예외야. '

하지만 공교롭게도 세간의 반응은 이벨린과 정 반대다.

나 또한 TV와 인터넷을 통해서 나와 자이언트 길드 놈들의 전투 영상을 수차례나 봤다. 파그마의 검무로 시원하게 적들을 썰어버리는 내 모습은 어떻게 봐도 멋졌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호쾌하고 화려한 전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너무 잔인하다느니 무섭다느니 마치 공포 영화 속 악당처럼 나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TV에서는 나를 사이코패스로 매도하는 토론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길드간의 알력은 흔한 일이기 때문인건지, 아니면 애초에 관심 없는 것인지.

그들은 싸움의 원인과 이유에는 관심 없었고 오로지 자극적인 소재. 즉 나에게만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결국 난 '도살자'라거나 '가면의 살인귀'라거나 '잔악무도 사이코패스'라는 식의 되도 않고 유치한 별명들을 갖게 됐다.

'무기를 대검으로 쓰다보니까 적을 두 동강 내거나 뭉개버리게 돼서 잔인하게 보였나? 아니, 무기가 문제라기보다는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가 문제인 것 같다. 투구 주제에 생긴 게 흉측해가지고 원…'

나도 드디어 유명세를 타게 됐건만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진 것이 영 찝찝하다. 되도록 긍정적인 이미지로 유명해져야지 TV프로그램에도 섭외되고 짭짤한 출연료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제 여유 있을 때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대체할만한 성능 좋은 투구를 제작해야겠다. 그래, 마치 영웅들이나 쓸 법한 화려하고 멋진 투구를 만들어서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멋지다며 찬양하겠지. 후훗… 내가 비록 생긴 게 잘생기진 못했어도 남자니만큼 남자답게는 생겼으니 액션 영화의 주인공처럼 마초적인 모습을 어필하다 보면 톱스타가 될 수 있을 거다. 후후훗!'

"저… 그리드 님? 어디 아프신 겁니까?"

언젠가 유명해져서 TV에 출현. 다른 랭커들처럼 연예인보다 더 유명해져서 떼돈을 벌고 여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짓노라니 이벨린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온다.

'또 이런 반응이냐. '

어찌된 게 내가 웃을 때마다 불쾌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이참에 진지하게 물어봤다.

"이벨린, 넌 나를 존경한다고 했지? 그러면 솔직하게 물어보자. 방금 내 미소가 아픈 사람의 미소처럼 보였냐? 멋있지 않았어?"

이벨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예…? 설마 방금 그게 웃고 계셨던 겁니까? 저는 복통에 시달리고 계신 줄로만 알았…"

"닥쳐! 당장 꺼져라!"

"그, 그리드 님?"

"꺼지라고!"

"…"

이벨린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쫓는 게 아니다. 나는 일말의 사심 없이, 그저 제작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힝… 수고하세요…"

울상 지은 채 대장간을 떠나는 이벨린을 확인한 후.

나는 드디어 제작용 망치를 거머쥐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빌어먹게도 무능한 이벨린은 이번에도 가시를 1개밖에 제작할 수 없는 소량의 재료만 구해왔다.

나는 이 재료로 최소 에픽 등급의 가시를 완성해서 10만 골드 이상의 대금을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아버지께 남은 빚 갚으시라고 7억을 드리고 8억짜리 차를 살 수 있다.

올 하반기에 B사에서 새롭게 출시한 13시리즈 중형 세단!

디자인이 고풍스럽지 않고 세련되면서도 천박하지 않아 젊은 부유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주얼 세단이다.

어린 시절부터 B사의 차량들을 동경했던 나는 성공하면 꼭 B사의 차를 타고 다니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일보직전인 것이다.

'그 차를 사서 끌고 가면 다들 뒤집어 지겠지…'

나를 무시했던 놈들은 더 이상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된 채 질투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처참하게 농락한 아영이는 후회하며 나를 붙잡고 싶어 할 것이다.

인생도 Satisfy와 다를 바 없다. 중요한 건 템빨이다. 나는 외제차라는 템빨의 위력을 보여줄 각오다.

"오오오오오!"

따앙! 따앙~!

나는 정말로 열심히 제작에 매진했다. 내 집중력은 극의에 이르렀고 망치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밤새 작업한 결과는!

<가시>

등급:레어

내구력:151/151 공격력:213

방어구 관통력:+30%

*공격 성공시 무조건 출혈 유발.

*공격한 대상의 치유능력을 30퍼센트 감소.

검신에 날카로운 소형 칼날들이 가시처럼 솟아있는 형상의 프람베르그입니다. 그 모습이 장미의 줄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대상은 이 무기에 스치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210 이상. 근력 700 이상. 민첩성 3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2레벨.

무게:300

[레어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 영구적으로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30 상승합니다.]

"아, 놔. 이런 썩을… 또 시작이네. "

최근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등급의 아이템들이 제작된 것일 뿐이지 이게 정상이다. 전설의 대장장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내가 아이템을 100번 만든다 치면 대부분 노말, 혹은 레어로 완성된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 중요한 타이밍에 레어 등급으로 완성되다니. 진심 최악이다. "하아…"

나는 10만 골드. 정확하게는 최소 8만 골드가 필요하다. 8만 골드가 더 있어야지만 원하는 차를 살 돈이 딱 맞아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레어 등급 아이템을 8만 골드에 팔아먹는 건 무리가 있었다.

'프로모션으로 할인 받는 거 감안해서 8억짜리 찬데… 할부로 살까? 안 돼. 이자에 시달리는 경험은 두 번 다신 하고 싶지 않아. '

열 받는다.

"아, 진짜!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레어 등급으로 뜨냐고! 아오!! 안 그래도 행정관 새끼한테 속은 거 알게 돼서 멘붕인데 멘탈을 아주 가루로 만들 작정인가!! 정말 개빡치네!!"

당장 어떡해 해야지 8만 골드를 구할 수 있을까?

길드원들에게 빌려볼까?

아니다. 신세를 졌다간 나중에 아이템 깎아달라고 진상 부릴 가능성이 있다.

'레가스한테 뜯어낼까? 아니… 요즘에 내 방패 찾아 주겠답시고 고생하고 있는데 돈까지 뜯으면 그건 아무리 나라도 못할 짓이지… 레가스한테 돈 뜯어내는 건 되도록 나중으로 미뤄야 부담이 없을 거야. '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 희망은 저것뿐이다.

-야, 이벨린. 제작이 좀 늦어질 것 같다. 지금 말고 20시간 후에 찾으러 와라.

그렇게, 이벨린에게 일방적인 귓속말을 날린 나는 대장간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는 금속 덩어리를 주워왔다.

이물질 섞인 가시의 미완성품이다.

"처음부터 다시 제련하면 피 조금 섞인 것쯤이야 아무 영향 없을 수도 있어. 좋아. 다시 해보자. "

따앙! 따앙! 따앙!

나는 이번에야말로 제발 에픽템으로 떠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새로운 제작에 임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통한의 가시>

등급:레전드리

내구력:269/269 공격력:409

방어구 관통력:+60%

*공격 성공시 무조건 출혈 유발.

*공격한 대상의 치유능력을 50퍼센트 감소.

*스킬 '찢어발기기' 생성.

*스킬 '저주받은 혈통' 생성.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비교적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아이템 중에서 최초로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작품입니다.

제작 도중 분노와 수치심이 담긴 피를 머금게 되고 제작자에게 버림받은 채 미완성품으로 쓸쓸히 방치되었던 이 프람베르그는 헤아릴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특히 제작자에게 적대적이며 피의 주인과는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사용 조건:레벨 210 이상. 근력 700 이상. 민첩성 300 이상. 피의 주인. 고급 소드 마스터리 2레벨.

*피의 주인이 아닌 자가 이 아이템을 장착할 경우 100퍼센트 확률로 저주 받습니다.

무게:300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5 영구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생뚱맞네. "

8만 골드만 벌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건만 웬걸? 8만 골드는 개뿔, 수백만 골드를 벌게 생겼다.

"허, 참. "

이물질 섞인 재료로 제작한 아이템이 설마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될 줄이야!

'쓰레기 노말 등급만 안 떠도 감지덕지해야할 판국에 이런 행운이 따르다니… 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역시 꿈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인지라 현실 감각이 없다.

나는 못미더워서 뺨을 꼬집어보았다.

그리고 확실하게 인지했다.

"꿈이 아니군. "

이게 현실이라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헛웃음만 나온다.

나 신영우가 어떤 인물이던가?

27년 인생 동안 쭉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수학여행 갔다가 유괴범에게 납치당해서 즐거운 추억 하나 못 만들었고, 중학생 때는 졸업여행 갔다가 우연히 뺑소니차량을 목격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갇혀 진술서만 썼다. 하필이면 운동회나 소풍 때마다 배탈이 나기 일쑤였으며, 길에서 100원짜리 동전 하나 주워본 경험이 없는 반면 동네 양아치+학교 일진에게 삥 뜯긴 경험은 정확히 89번이나 된다.

대학시절에는 원치 않게 봉사활동에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뺑소니를 당해서 병원비로 300만 원을 날렸고,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 밥 먹다가 식중독에 걸려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근데 다른 환자들은 식중독에 걸리지 않은 탓에 내가 몰래 외부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것으로 판명, 결국 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때 나는 진짜로 병원 밥만 먹었었는데 왜 다른 환자들은 멀쩡하고 나만 식중독에 걸렸던 건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다.

'병원 밥이 더럽게 맛없어서 다른 환자들은 병원 밥을 안 먹었던 게 분명해…'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환자들이 병원 밥을 안 먹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어쩌면 무시무시한 귀신의 소행일 수도 있다.

어쨌든 엿 같은 경험은 그뿐만이 아니다. 군 생활 때는 내가 탄약고 경계근무 설 때마다 대대장이 마실 나와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대장인거 뻔히 아는데 암구호 외치고 지랄하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소대에 후임이 들어오질 않아서 상병 꺾일 때까지 내가 막내였다. 말년휴가를 3일 앞둔 시점에는 훈련 도중 사고가 일어나 후임들이 단체로 다치고 입원. 덕분에 나는 휴가까지 반납하고 근무를 서야만 했다.

최악의 경험들은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아서 아무리 말해도 끝나질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 경험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그 행복한 경험 중 하나는 배터지도록 꽃등심 먹은 일이었다.

'내가 13살 때였나… 할아버지가 손주놈 예쁘다면서 가진 돈 다 쓰셨지… 그때 나 혼자 먹은 꽃등심이 4인분이었는데…'

스스로가 불쌍하다.

고작 고기 먹은 일이 내 생 최고의 행복한 경험 중 하나라니!

27년 나의 인생은 딱히 즐거울 것도 없이 그저 최악이었던 것이다.

한데 최근의 나는 어떤가?

불운의 아이콘은커녕 완벽한 행운의 상징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이 변화가 너무나도 기쁠 따름이다.

"아무래도 요즘 엄마가 교회나 절을 다니시나보다. "

우리 집안은 쭉 무교였고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재수 없는 이유가 종교가 없어서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있다.

요즘 따라 엄마가 주말에 집을 비우시던데, 아무래도 아들을 위해서 하느님, 부처님께 기도하고 다니시는 듯하다.

"엄마 고마워…"

감격이 복받쳐 올라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면서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따스해져간다.

그리고 때마침 이벨린이 찾아왔다.

"말씀하신 시간이 다 되어서 찾아와봤습니다. 가시는 완성 되었나요?"

"옛다. "

나는 이벨린에게 통한의 가시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컥!"

이벨린의 숨이 넘어갔다.

녀석은 통한의 가시를 확인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모양이었다.

"켁켁! 이, 이럴 수가? 그리드 님! 설마 그리드 님은 버그 유저이신가요?!"

하다하다 별 얘기를 다 듣는다.

"버그 유저? 웬 개소리냐?"

"하, 하지만…!"

이벨린은 발을 구르는가하면 두 손을 휙힉 젓는 등,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소란을 피웠다.

"역사상 몇 없는 대장장이 장인들조차 유니크 아이템을 제작하는 게 한계였다고 들었어요! 레전드리 아이템은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며 오로지 레이드에서만 드랍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리드 님은 어떻게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신 거죠? 이건 운영자라던가 버그 유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정신 사납다.

혼란스러워하는 이벨린을 앞에 두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대장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여인이 등장했다.

"닥쳐, 이벨린. 그렇게 방정 떨어서야 좋은 남자가 못되잖니. "

지슈카였다.

뚜벅뚜벅.

정신 못 차리고 있던 이벨린을 단 몇 마디로 입 다물게 만든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이상하다?'

꿀꺽.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어째선지 지슈카의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더 요염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드. "

"으, 응?"

나를 올려보는 지슈카의 양 뺨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오며 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섹시한 거야?'

저 눈을 1초라도 마주했다간 그대로 홀려버릴 것만 같다.

나는 세계 제일의 섹시미녀에게 완전히 위축되어 시선을 피하고 뒷걸음쳤다. 그리고 지슈카는 그런 내게 바짝 다가와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Satisfy의 설정 상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는 레전드리 직업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그리드. "

"…"

"너,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지?"

언제까지고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함으로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참에 순순히 털어놓았다.

"바로 봤다. "

지슈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역시…! 그리드! 넌 정말로 최고야!!"

"허억!"

또다.

이 지조 없는 여자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성을 사로잡기에 특화되어 있는 몸매와 향기를 앞세워 내 혼을 쏙 빼놓는다.

하지만 이 행동에 흑심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순수한 기쁨의 표현인거겠지. '

하지만 타고난 섹시함 탓에 그 순수함이 가려지고 만다.

어쩌면 그녀는 스스로의 그러한 부분 때문에 꽤나 고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동료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서 심취해있는 지슈카에게 안긴 채로 이벨린을 향해 손 내밀었다.

"얼마 줄래?"

어느새 진정 된 이벨린이 손가락 1개를 들어보였다.

"100만 골드요. "

"응?"

내 귀가 잘못 됐나?

레전드리 아이템이니만큼 최소 200만 골드 이상은 받아야 정상일 텐데?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이벨린이 설명해주었다.

"이 아이템의 설명에 명시되어 있는 '피의 주인'은 그리드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에요. 즉 이 아이템은 제 전용템이라는 뜻이죠. 극단적으로 말해서 저 외에는 이 아이템을 필요로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레전드리 제작템일지라도 시세를 낮게 잡을 수밖에 없죠. "

"…"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소년답게 말하고 행동하던 녀석이 상황에 따라서 어른이 되어버렸다.

'이미지가 확 바뀌네. 랭커가 될 만한 그릇답게 보통 내기가 아니란 뜻인가. '

감탄하고 있는 내게 이벨린이 쐐기를 박았다.

"이 아이템의 성능은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금전적인 가치는 낮아요. 솔직히 말해서 100만 골드라는 가격도 높게 책정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제가 레벨이 오르고 더 높은 레벨 제한의 아이템을 장착할 수 있게 되면 이 아이템은 그야말로 아무런 가치도 없게 돼버려요. 저 외엔 아무도 사용할 수 없는 아이템을 되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죄송하지만 좀 심하게 말하자면 기간 한정 아이템이나 다름이 없죠. 하지만 역시 대단한 아이템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지금의 제게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기도 해요. 또한 저는 그리드 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도 않으니까 100만 골드까지는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 "

반론할 여지가 없다.

이벨린의 말은 합당했다.

지금 이벨린은 딱히 장사꾼처럼 이익을 취하기 위해 흥정하려는 게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나름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괘씸한 건 사실이다.

나는 녀석에게 손가락 3개를 펼쳐보였다.

"300만. 그 이하로는 안 판다. "

"네? 그, 그리드 님?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는 지슈카를 떨쳐내고 성큼 이벨린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으로부터 통한의 가시를 빼앗아 착용했다.

[직업 특성의 효과로 <통한의 가시>를 장착하였습니다.]

[아이템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패널티가 적용됩니다.]

"에?"

이벨린이 벙 쪘다.

사용 조건을 보면 오로지 자신만이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 분명하건만, 예상치 못하게 내가 착용하자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슈슉! 슉!

나는 통한의 가시를 가볍게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절묘한 무게감과 위협적인 검로가 매우 만족스럽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몇 번 끄덕여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이벨린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300. 살 거야 말 거야? 그 가격에 안 살 거면 그냥 안 팔고 내가 쓸 거다. "

"에에에에에엑~~~~~~~~~~~~!!"

사기잖아! 라는 뜻이 담겨있는 이벨린의 절규가 칸의 대장간에 메아리쳤다.

[통한의 가시가 당신을 증오하며 저주를 겁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통한의 가시가 당신을 증오하며 저주를 겁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통한의 가시가 당신을 증오하며 저주를 겁니다.]

[저항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눈앞으로 쉴 새 없이 똑같은 알림창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은 채 이벨린이 결단을 내려주기를 바랐고, 결국 이벨린은 백기를 들었다.

"200…"

"노. "

"230…"

"내가 쓴다. "

"250! 제발 250에 팔아주세요! 제가 L. T. S 시절부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열심히 게임하고 방송 출현하면서 힘들게 모은 전재산이에요! 제발요!!"

"…후. 어쩔 수 없지. 같은 길드원이니까 내가 한 발 양보하마. "

"가,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지금 당장 8만 골드를 선금으로 지불해라. "

"네? 아, 넵!"

호구짓은 무아지경의 검 사건만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나는 앞으로 더 이상 손해 볼 생각 따위 없다.

초심을 상기하고 유일한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자라는 점을 내세워서 Satisfy의 모든 유저들에게 바가지를 씌울 것이다. 길드원도 예외는 아니다.

[8만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얼른 차 사러 가야겠다.

나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지슈카와 왠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벨린을 뒤로하고 서둘러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우선 아버지 계좌에 7억을 입금해드렸다.

"허, 허억?! 영우야! 이게 웬 돈이냐?!"

"그거로 우선 빚부터 갚으세요. 남은 돈으론 가게 안정화 시키시고… 요즘 일꾼도 안 부리고 어머니랑 둘이서 밭일하랴 장사하랴 힘드셨죠?"

"영우야…"

"불안해하지마세요. 합당한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이니까 혹시라도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 믿으시죠?"

"흑흑! 아이고~! 우리 철부지 아들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다니! 엄마는 이게 꿈같지 뭐니!"

"꿈 아니에요. 꿈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영우야! 흑흑흑!"

어머니가 나를 얼싸안고 우셨다. 요즘 들어 부쩍 늙으신 어머니의 작은 등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언제나 당당하시던 아버지께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계신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진작 잘했어야 했는데…'

부모님께서 기껏 비싼 등록금 내서 대학까지 보내주셨건만, 나는 공부를 하기는커녕 게임에 빠져서 돈만 축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빚쟁이가 되어서 부모님 속을 시커멓게 태우고 말았다.

나 때문에 몇 년을 마음고생 하신 두 분께 지금부터라도 효도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그 날 오후.

8억짜리 세단을 계약하고 온 나는 어머니께 아직도 철 안 든 거냐며 혼나고 등짝을 얻어맞았다.

무지하게 아팠지만, 아픈 만큼 어머니의 손에 실린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서 안심 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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