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5화 (50/1,794)

템빨 13권 - 2화

도살귀의 안대는 재질도, 모양도 평범함 그 자체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검정색 안대일 뿐이다. 특별한 개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감정도 해보기 전에 불만부터 지껄였을 것이다.

“아오, 씨벌! 고작 꼬질꼬질한 안대 하나 얻겠답시고 열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거야? 염병! 뭣 같네! 라우엘 이런 개$%!#$!”

라며,

아주 지랄발광을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그리드는 이제 없다.

‘라우엘이 꼭, 반드시 얻으라고 조언한 안대다.’

그저 그런 아이템일 리가 없다.

애초에 아이템이란 겉모습만으로 판별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큰 기대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스킬을 사용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띠링~

<도살귀의 안대>

등급:유니크

내구력:7/7

*스킬 <급소 간파> 생성.

도살귀는 한평생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고문을 강제적으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체의 급소를 파악하는 일에는 도가 텄습니다.

도살귀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이 안대에는 그 능력의 일부가 귀속되어 있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0.1

[아이템의 숨겨진 기능을 발견했습니다!]

!!!! 도살귀의 원한이 깃들어 있는 아이템입니다. 착용자는 살인 충동에 지배당하여 무분별한 살인귀가 됩니다. !!!!

저주. 그것도 무지막지한 저주를 받은 아이템이다.

분별없는 살인귀가 된다면 정상적인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저주?

저항하면 그만이다.

“라우엘, 이 예쁜 녀석.”

그리드가 고무되었다. 그의 심정 같아서는 지금 당장 라우엘을 소환하여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도살귀의 안대는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아니, 단지 훌륭한 수준이 아니다.

절반은 생산직인 파그마의 후예가 응당 감수해야할 ‘한계’를 한 꺼풀 벗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아이템이었으니, 실로 환상적이다 표현할 수 있겠다.

‘설마 급소 간파를 얻게 될 줄이야.’

급소 간파.

전투에 최적화 된, 극히 소수의 직업군만이 습득하는 최상급 패시브 스킬이다.

기능은 간단하다.

이름 그대로 상대방의 급소를 파악한다.

하지만 그 간단한 기능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대상의 급소에 정확한 타격을 입히게 될 경우, 크리티컬 발생 확률이 상승하며 출혈, 마비 등의 상태이상을 유발하므로.

쉽게 말해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는 뜻이다.

‘라우엘 녀석, 헤인스와 끈이 있다더니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군.’

몬스터 감별사 랭킹 1위, 헤인스.

그는 몬스터의 특징을 토대로 몬스터가 드롭하는 아이템을 예측하는 능력을 지녔다.

마이너가 광물 탐지기라면 헤인스는 아이템 탐지기인 셈이다.

‘헤인스에게 이만한 정보를 얻으려면 대가로 거액을 지불했을 텐데.’

그리드는 라우엘의 충심이 날로 깊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인의 약점을 극복시켜주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에 대한 호감도가 무한대로 솟구쳤다.

‘영주 대행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내 생각까지… 그 노고에 필히 보답하마.’

다짐하며, 희열에 휩싸인 그리드가 안대를 착용했다. 그러자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안대로 가려진 왼쪽 눈이 희미한 적색의 안광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밝은 곳에서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안광이었지만 지금 이 지하실처럼 어두운 곳에서는 붉은 빛이 명확하게 보였다.

중2병 라우엘이 봤다면 무척이나 멋지다며 흥분할만한 모습이었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피어오릅니다. 살인 충동에 휩싸입니다.]

[저항하였습니다.]

그리드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 받고 있었다.

곁에 서있는 랜디를 슬쩍 돌아보자, 도플갱어의 ‘생명 핵’이 자리 잡은 부근이 자연스럽게 포착되었다. 비록 정밀하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나마 대상의 급소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이다.

‘한쪽 시야가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도 않군.’

완벽한 아티팩트다.

살인 충동이라는 저주를 억누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그리드는 교황을 레이드하고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획득했을 당시와 비견될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그리드가 노에의 검정색 꼬리를 주시했다. 뭉툭하고 적당한 길이의 귀여운 꼬랑지였다. 끝 부분만 눈처럼 하얀 것이 마치 꽃이 핀 것 같다.

“너는 꼬리가 약점이었냐…”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에게 약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냥!”

괜히 앞발을 들어 올리면서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노에였다. 아무래도 약점이 간파 당하자 당황한 듯하다.

그리드는 녀석을 위한 꼬리용 방어구를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살귀가 드롭한 또 다른 아이템으로 관심을 돌렸다.

도살귀의 가면.

얼굴의 오른쪽 절반을 가릴 수 있게끔 설계된 철가면이다.

‘재질은 흑철.’

재질이 평범했던 안대와 달리 가면은 재질부터가 좋았다. 다만 디자인이 영 거슬렸다.

울고 있는 눈매와 상반되게 웃고 있는 입 모양.

생김새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광대의 가면이다. 눈가에 피눈물 한 방울이 양각되어 있었으므로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 가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었는데.’

사소한 아이템이니까 강조하지 않은 것일 터.

그리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띠링~

<도살귀의 가면>

등급:레전드리

내구력:39/39 방어력:21

*스킬 <악귀의 피눈물> 생성.

반인반마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도살귀의 슬픔이 깃든 가면입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55.

[아이템의 숨겨진 기능을 발견했습니다!]

!!!! 도살귀의 원한이 깃들어 있는 아이템입니다. 착용자는 살인 충동에 지배당하여 무분별한 살인귀가 됩니다. !!!!

<악귀의 피눈물>

피격 시, 8퍼센트의 확률로 혈류를 분출합니다. 분출 된 혈류는 도살귀의 가면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혈류를 총 10회 분출하게 될 경우 가면이 완연한 적색으로 변모합니다.

이때 착용자의 공격력이 5초간 50퍼센트 상승합니다.

“미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감탄사였다.

그리드는 경악하고 있었다.

악귀의 피눈물.

조건부로 발동하는 스킬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력이 너무 뛰어났다. 가히 사기적이다. 괜히 레전드리 등급의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라우엘이 이 아이템을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몰랐었기 때문이군.’

헤인스의 경지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증거다.

결과적으로 이득이었다.

만약 헤인스가 이 가면의 존재까지 알았더라면 라우엘은 더 큰 정보료를 지불해야만 했을 테니까.

“크크큭.”

신나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리드.

얼굴의 절반을 칠흑의 가면으로 가린 채, 붉은 안광을 내뿜는 왼쪽 눈에는 안대를 착용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악마와도 같았다.

과거,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뒤집어쓰고 다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위압감이 그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라우엘이 본다면 한 눈에 반할만한 모습이었다.

***

“이, 이럴 수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지브라 백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쓰러뜨리지 못했던 도살귀가 사체의 일부만 남긴 채 소멸하다니.

그것도 고작 한 사람에 의해서!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오? 헉?”

이것이 정녕 인간의 실력이란 말인가?

주춤거리며 질문하던 지브라 백작이 숨을 삼켰다.

기괴한 가면과 안대를 착용하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보고 겁먹은 것이다.

‘눈에서 웬 붉은 빛이…’

도무지 인간 같아 보이질 않는다.

혹시 이자야 말로 진정한 마물이 아닐까?

오만가지 상상을 하고 있는 지브라 백작에게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귀걸이나 내놔.”

“아, 알았소!”

지브라 백작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보물을 냉큼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착용자의 지력을 15퍼센트 상승시켜주는 흑수정 귀걸이.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그것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이다.

도살귀를 퇴치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어지자 다급한 마음에 가보를 보상으로 내걸었던 것인데, 설마 이것을 정말로 누군가에게 주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와서 아까워졌다.

‘어차피 도살귀는 적기사단이 퇴치해주기로 약속이 돼있던 건데… 제길, 이놈에게 암살자를 보내서 되찾아 와야겠다.’

아무렇지도 않게 잔악무도한 계획을 세우는 지브라 백작의 눈빛에는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탐욕하면 누군가?

바로 그리드다.

그리드가 지브라 백작의 눈빛을 읽지 못할 리 없었다.

‘가소로운 녀석.’

피식.

그리드가 실소했다. 그러자 지브라 백작이 뜨끔해서는 물었다.

“가, 갑자기 왜 웃는 거요?”

“귀여워서.”

“뭣…!”

지브라 백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대제국의 백작이자 나이 마흔을 넘긴 내게 귀엽다니? 좋은 뜻으로 저런 말을 하겠는가? 이는 명백한 조롱이다.

‘정신 나간 놈!’

지브라 백작은 그리드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영 싸가지 없는 놈이다. 성깔 같아서는 잔인하게 고문한 뒤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고, 고맙소.”

지브라 백작은 도살귀를 혼자서 처치한 그리드와 감히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웠다. 우선 빨리 이놈이 꺼져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눈을 내리까는 그를 보며 이죽거린 그리드가 흑수정 귀걸이를 왼쪽 귀에 착용했다.

[지력이 15퍼센트 상승합니다.]

‘S+급 퀘스트의 보상치고는 영.’

사실 지력을 15퍼센트 올려주는 액세서리는 그 가치가 무척이나 높았다. 특히 마법사라면 누구라도 탐낼만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온갖 칭호의 효과 덕분에 지력 수치가 이미 1,000을 넘기고 있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지력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스탯이었다.

스킬을 난사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마나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제는 다인슬레프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마력 수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자색 오리하르콘으로 악세사리를 제작할 수 있는 세공사를 구할 때까지만 사용하다가 팔아먹어야겠군.’

계획한 그리드가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지브라 백작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약자의 심정이라는 걸 알아?”

“…?”

뜬금없는 우문이다.

지브라 백작은 이 무시무시한 놈이 제발 좀 그만 닥치고 사라져주길 바랐다. 하지만 차마 그 마음을 표출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따위 것 나는 모르오.”

백작의 아들로 태어나 쭉 강자로 군림해왔다. 수만 백성들이 내 앞에 고개를 조아렸으며 수천의 병사들이 복종했다.

약자의 심정?

느껴본 적도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모르니까 그런 짓을 해온 거겠지.”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괴롭힘을 당한다.

그것만큼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도 없음을 그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유흥을 위하여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잔악하게 고문한 뒤 살해하는 지브라 백작을 살려두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당신, 약점이 많군?”

안대 너머의 붉은 눈이 뒤룩뒤룩 살 오른 지브라 백작의 전신을 훑었다.

그에 소름이 돋은 지브라 백작이 기겁하며 뒷걸음쳤다.

“뭐, 뭐요? 뭘 하려는 거요!”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뭘 해?”

그러더니 그냥 지나쳐가는 것이 아닌가?

지브라 백작은 멀어져가는 그리드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안도했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숨죽인 채 기다렸다가 냉큼 대전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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