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15화
야탄교의 지상과제는 세상의 혼돈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고통과 절망으로 물들임으로서 암흑의 마력이 활성화되는 환경을 만들고 33대악마를 지상에 강림시키는 것.
그것이 악신 야탄의 뜻이었다.
***
3년 전.
황제 쥬앙데르크는 대륙 각지로부터 최고의 의원과 사제들을 모집했다.
병석에 누운 황후 아리아떼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리아떼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의원과 사제들은 전설의 성녀가 출현하지 않는 이상 그녀를 살리지 못하리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왔다.
황실 보물고에 산처럼 쌓여있는 금은보화와 대전을 가득 메운 현자들조차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자와 황녀들의 어미인 아리아떼가. 내 소중한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쥬앙데르크는 그저 넋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떼 사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던 쥬앙데르크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국사를 등한시하지는 않았으나 매일 밤 술독에 빠져 건강을 해치기 시작한 그를 위로해준 사람이 바로 2황비 마리였다.
제4황자의 어미이며 강렬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그녀는 쥬앙데르크에게 헌신하였고 덕분에 쥬앙데르크는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마리의 세상이 열렸다.
황후를 잃은 상실감을 마리를 통해서 충족한 쥬앙데르크는 마리를 무척이나 총애하게 되었고, 마리의 권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흔하디흔하고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서막이었다.
마리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수작을 부렸다.
미인계와 권력, 그리고 흑마법사 디브의 능력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제1황자를 지지하였던 적기사단과 귀족 세력들을 와해시키는 등 온갖 간악한 짓을 벌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현재.
마리는 과거와 비할 바 없이 강력한 지지기반을 얻게 되었다. 수많은 귀족가문들이 그녀와 제4황자를 지지하였고 재편성된 적기사단 또한 그녀에게 충성했다.
마리는 만족스러웠다. 곧 자신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를 가소로이 비웃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최측근, 흑마법사 디브였다.
디브.
마리가 황비가 되기도 전부터 그녀의 가문을 쭉 섬겨왔던 흑마법사.
사실 그는 진즉에 죽었다.
야탄의 일곱 번째 종, 다크버스의 손에 의하여.
그렇다.
현재 디브의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다크버스였다.
야탄교 최고의 환술사이자 저주술사인 그가 수행 중인 임무는 사하란 제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
“이제 머지않았다.”
적통성이 부족한 제4황자가 황태자가 될 경우, 제1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반기를 들어 제국에는 피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다.
제국이 혼란에 빠진다면?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죽어가며 암흑의 마력이 들끓게 된다.
대악마를 강림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지난 3년의 노고를 머잖아 보상 받겠군.”
참으로 고단한 3년이었다.
제국의 마법사들과 현자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었기에, 놈들에게 정체를 발각당하지 않으려면 부단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한시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고생도 이제 머잖아 끝이다.
“끌끌끌…”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다크버스의 쇠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잠식해나가는 그때였다.
“헉?”
아스모펠의 저택에 광범위하게 설치해놓은 환영의 결계가 대번에 파괴되었다.
그를 감지한 다크버스가 기겁했다.
“침입자라고?”
아스모펠은 유용한 패였다.
한때나마 제국의 기둥이 되리라 칭송받았던 존재이고, 배반자 피아로를 척출한 공을 세웠기에 제국에서 그의 발언력은 무척이나 강했다.
다크버스는 아스모펠의 세뇌를 유지하면서 살려둬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스모펠의 저택에 머물면서 그를 감시하는 한편 보호하는 중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 아스모펠의 저택에 단 한 명의 외부인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끔 경계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결계가 파괴되었고 침입자를 허용하고 말았다.
‘내 결계를 이토록 쉽게 무너뜨리다니?’
대륙 전체에서 이 정도 실력자는 드물다. 필시 대단한 놈일 것이다.
하지만 마력에 감지되는 침입자의 숫자는 고작 한 명에 불과하다.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다.
심호흡한 다크버스가 냉정을 되찾았다. 거실로 나간 그가 적기사들을 찾았다.
적기사들은 근무 시간이 끝나 흑기사들과 교대한 상태였다.
“해이하기는!”
다크버스의 막강한 결계를 너무나도 신용하여 발생한 사태이다.
애초에 적기사들은 다크버스가 제대로 통솔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도도했다.
다크버스는 아쉬운 대로 흑기사들만을 대동하여 저택을 나섰다.
“충!”
정원 곳곳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다크버스 일행을 발견하고 경례했다. 병사들은 침입자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다.
‘은밀하기까지…’
하지만 내 앞에서는 부질없다. 너의 위치 따위 내 마력으로 감지된다.
씨익.
다크버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는 사이 흑기사들이 소리쳤다.
“침입자다! 전원 집결하여 방어태세를 취하라!”
명령을 받든 병사들이 저택의 입구 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120명의 정예병사와 2명의 흑기사, 그리고 최강의 흑마법사인 다크버스가 나란히 도열한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파르르.
다크버스의 강대한 마력이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감지했다.
200미터 전방이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다크버스가 소리치며 마력을 방출시키자 침입자의 은신이 풀렸다.
특이한 형식의 로브를 뒤집어 쓴 채 기괴한 가면과 안대로 얼굴을 가린 사내였다.
‘누구지?’
어둠에 동화되는 흑발과 붉게 빛나는 눈동자. 듣도 보도 못한 놈이다.
“네놈은 뭐냐?”
질문하는 다크버스에게 침입자, 그리드가 대답해 주었다.
“뭐긴 뭐야, 적이지.”
그리드는 긴 말 하지 않았다.
무려 3주 만에 도달할 수 있었던 퀘스트의 종착지에서 굳이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타닷!
거침없이 질주하는 그리드와 병사들의 200미터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제국의 정예 병사들은 침착했다. 일제히 검을 뽑아 쥐고 제국검법의 자세를 취했다. 후위의 궁병들은 불화살을 날렸다.
‘제법.’
그리드가 감탄했다. 타지의 병사들과 비교하면 이곳의 병사들은 레벨이 무척이나 높아보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채채채채채채채챙!
신성의 방패로 화살들을 방어하며 접근한 후, 방패를 실패작으로 스왑한다.
쩌저저정!
“크…억!”
실패작이 청백색 반월의 검광을 길게 그리자 다섯 명의 병사가 동시에 신음하며 공중에 떠올랐다.
오우거의 근력을 월등하게 초월하는 그리드의 근력은 다섯 병사가 힘을 합쳐도 감당하기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었다.
“우와아아아!”
이내 바닥에 떨어져 널브러지는 동료들을 짓밟으며 병사들이 덤벼온다.
그리드가 스킬을 사용했다.
“대장장이의 분노.”
대장장이의 분노Lv.4는 그리드의 공격력을 25퍼센트, 공격속도를 40퍼센트 상승시켜준다.
그리고 실패작에는 <어두운 곳에서 공격력 20퍼센트 상승>이라는 옵션이 귀속되어 있는 바.
서걱! 콰지직!
달빛 아래 푸른 검광이 난무하면서 병사들의 몸이 갑옷과 방패 째로 썰리고, 일그러졌다.
압도적인 무용이었다.
한두 명씩 차례대로 덤벼봤자 ‘나 잡아먹어줍쇼.’하는 꼴밖에 안 됐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리드를 포위하여 사방에서부터 일시에 덮치자고 신호를 교환했다.
태세를 정비한 병사들이 원형의 진형을 갖추며 고립시켜오자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힘으로 돌파하면 그만인데.’
극명한 전력 차이 앞에서 전술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초연(超聯)만 사용해도 절반 이상 몰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잔챙이들을 상대로 스킬을 허비하는 건 어리석은 행위임을 지금의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싸우자니 스태미나가 아깝다.
‘쉽게 가볼까.’
지난 3주 동안 끊임없이 사냥하며 레벨 업한 그리드의 경험은 한층 더 농후해져 있었다.
시야를 넓힌 그리드가 전장 전체를 살폈다. 정원이라는 특성상 곳곳에 화단과 나무, 분수가 있었다. 그리드는 적들이 합격을 펼치기 어렵도록 최대한 지형이 복잡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를 쫓아야할 형국에 놓인 병사들의 진형이 서서히 무너졌다.
두세 명씩 쫓아오는 병사들? 대검의 긴 리치를 활용한 그리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죽는다.
“윽!”
“키약!”
정원 곳곳을 누비는 그리드 탓에 숫자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게 된 병사들이 각개격파 당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핏줄기와 살점이 비산하자 병사들이 위축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드를 함부로 쫓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흐름을 바꿔야한다고 판단한 흑기사들이 다크버스에게 요청하였다.
“디브 님, 저자에게 저주 마법을.”
“알았다.”
대답하는 다크버스의 주변으로 붉은 오망성이 빠르게 그려졌다. 흑마법 캐스팅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마법진의 발현이었다.
마법진을 완성시킨 다크버스가 극한의 저주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했다.
“앰플리파이 데미지! 로우어 레지스트! 로우어 블레시드!”
목표물의 받는 피해량 증가, 목표물의 모든 저항력 감소, 목표물의 모든 능력 감소라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간직한 저주 마법들이 그리드에게 직격한 그 순간.
“가자.”
흑기사들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은 약화된 침입자를 순식간에 10등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들에게 다크버스가 다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
저주 마법이 통하질 않는다!
그 말을 채 이을 새도 없었다.
인간의 신체능력을 초월한 흑기사들은 이미 그리드에게 근접해 있었고, 분수를 사이에 둔 채 그들과 마주한 그리드는 미소 지었다.
“파그마의 검무, 제(制).”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흑기사들을 지배한다.
“큭…?”
“이게 무슨!”
흑기사들이 혼란스러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살(殺)의 보법을 밟아 분수를 넘고 그들과의 거리를 좁힌 그리드가 평타를 날린 뒤 물 흐르듯이 살(殺)을 연계했다.
푸욱!
“……!”
푸른 대검과 옥빛 대검에 가슴을 관통당한 흑기사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대량의 피를 쏟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친!”
일격에 당하는 동료를 곁에서 생생히 목격한 흑기사가 질겁한다.
제(制)의 영향력에서 간신히 벗어난 그가 이를 갈았다.
“네놈!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냐!”
“요술?”
그리드의 적색 안광이 흑기사를 관조했다.
도살귀의 안대에 귀속 된 <급소 간파>가 발동하면서 적광이 더욱 짙어졌다.
“요술이 아니라 기술인데.”
냉소하는 그리드의 등 뒤로 일곱 자루의 황금 칼날이 떠올랐다.
푸푸푸푸푸푸푹!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에 완벽한 적중률이었다.
황금 칼날들이 흑기사의 검은 갑옷 이음새들만을 집요하게 노리고 꽂혀 들었다.
각 관절부위마다 칼날이 박힌 흑기사의 움직임은 크게 둔화되었고, 그리드는 연(聯)을 전개하였다.
채채챙! 채챙!
흑기사는 사력을 다했다.
이를 악 물고 검을 휘둘러 맞섰다.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연(聯)의 레벨은 현재 5.
255레벨인 흑기사의 실력으로는 그 광속의 검술에 항거할 수 없었다.
10회, 15회, 20회, 25회, 30회.
흑기사의 몸에 수십 가닥의 검흔이 순식간에 아로새겨진다.
“쿨럭…!”
풍덩!
넝마가 된 흑기사가 휘청거리더니 분수 속으로 고꾸라졌다.
물감처럼 번지는 핏물을 보면서 병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단 중 하나인 흑기사단의 기사 둘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하다니? 꿈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병사들은 악몽 속에서 헤매는 심정이었다.
한편 저주 마법이 통하지 않자 당황하고 있던 다크버스가 뒤늦게 그리드의 정체를 눈치 챘다.
‘저주에 저항하고 푸른 대검과 황금 칼날을 사용하는 놈…! 그래! 저놈은 필시 발락이 말했던 놈이다!’
야탄의 다섯 번째 종, 발락.
그는 네 번째 종 니베리우스와 함께 바이란을 침공하였다가 호되게 당하고 돌아온 전력이 있다.
그때 발락이 말했었다.
바이란에는 푸른 대검과 황금의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괴물이 있다고.
그놈이 말락서스와 니베리우스를 죽였다고.
놈이 스스로를 칭하기를…
“템플…!”
아니,
“템빨러!!”
네놈이 여기엔 왜!
에트날 왕국에 있어야할 네놈이 어째서 제국까지 찾아와 나를 방해한단 말이냐!
“내 3년의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들 작정이더냐!!”
다크버스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야탄 신께서 나를 버린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