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6화
‘이거, 설마.’
그리드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여신의 정수!’
여신의 정수는 교황 드레비고가 드롭한 아이템 중에서 유일하게 쓰임새를 알 수 없던 물건이다.
1년 이상 처분하지도 못하고 방치해놨던 애물단지다.
그리드가 인벤토리로부터 그것을 꺼내 들었다.
‘드레비고가 쓸모없는 아이템을 드롭했을 가능성은 적어.’
드레비고는 일반적인 보스가 아니다.
강함은 둘째 치고 Satisfy 스토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연급 인물이었다.
Satisfy 제일 종교인 레베카교를 변질시킨 장본인이니까.
그가 드롭한 이 액체가 단순한 맹물일 가능성은?
‘없지.’
애초에 이름에서부터 특별함이 팍팍 묻어난다.
그리드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리파엘의 창을 봉인 해제한 원인. 파스칼이 등장하여 활개 치게 된 원인. 고위 성직자들이 파스칼에게 동조하는 원인…
그 모든 원인이 드레비고에게 있었다.
‘놈이 드롭한 이 아이템이야말로 모든 사태의 해결책일 가능성이 높아.’
본래 게임이란 게 그렇다. 최종 보스가 드롭한 아이템이 절망을 극복할 단서인 경우가 많다.
“확인해보자.”
결정한 그리드가 작은 유리병의 뚜껑을 개봉했다. 그리고 리파엘의 창에다가 그것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톡.
아다만티움으로 구성 된 리파엘의 창과 여신의 정수가 맞닿는 순간.
솨아아아아아아!
영롱한 청색의 빛이 발생하며 좁은 방 안을 가득 매웠다.
“아…!”
이사벨이 탄성을 흘린다.
아름다운 빛에 시선을 사로잡혀 있던 그리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소 짓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여신의 정수>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
까마귀로부터 5일째 소식이 없다.
이제 까미앙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죽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까마귀의 암살 능력은 최고였으니까.
설마 그가 암살에 실패했다고 상정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5일째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아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멍청한 것, 자신만만하더니 꼴불견이군.’
어쨌든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역시, 그리드의 무력은 나와 같은 수준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어.’
더군다나.
‘신중하기까지 하다.’
암살 위협을 당해놓고도 그리드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마치 암살 위협 같은 건 받은 적도 없다는 듯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다.
배후를 확실하게 밝히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터.
‘파스칼과 원로들에게 지껄이던 태도를 보아 막무가내인 놈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여우같은 놈이었어.’
알면 알수록 까다로운 놈이다.
교인들에게 칭송 받고, 개인의 무력이 출중할 뿐더러 신중하기까지…
‘파스칼의 회유 작전도 매일 같이 실패하는 중이고. 시간을 더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
까미앙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미안과 후로이가 오늘도 어김없이 선거 유세 중이었다.
거슬리는 놈들이다.
‘특히 저 후로이라는 놈…’
연설 능력이 보통이 아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었다. 이미 파스칼에게 매수당한 고위 성직자 중 몇 명도 데미안에게 호감을 보일 지경이었다.
저놈이 개똥을 약이라고 우긴다면 죄다 믿어버릴 기세다.
‘내가 직접 나선다.’
앞으로 일주일 후.
교황 선출일을 정확히 30일 남기게 되는 시점에 행사가 열린다.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레베카 신전의 신관들과 각국의 귀족들이 참석하는, 교황 후보들의 연설 행사다.
그때 사하란 제국에서는 치리타 백작이 참석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파스칼의 부친인 그는 파스칼과 성향이 다르다. 위험요소는 무조건 배제한다.
‘그에게 지원을 받아서 그리드를 친다.’
그리드 개인의 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리드의 전력은 볼품없었다.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레베카의 딸과 어리바리한 데미안, 그리고 주둥이만 산 웅변가가 전부다.
치리타 백작의 기사들과 힘을 합친다면 쉽게 해치울 수 있다.
***
<여신의 정수>
레베카 여신의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물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단순한 맹물이지만 흑마력을 보유한 자들에게는 독으로, 여신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명약으로 작용합니다.
광물과 혼합할 경우, 광물의 점성을 극대화 시키고 광물의 고유 기능을 향상시킵니다. 또한 신성력을 주입합니다.
무게:0.1
‘점성의 극대화? 찰흙처럼 된다는 뜻인가? 아이템의 모양을 만들기 쉬워지겠군.’
깔끔한 결합부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있었다.
[리파엘의 창에 대한 이해도가 4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의 숨겨진 비밀을 자력으로 밝혀냈습니다! 위대한 업적입니다!]
[통찰력이 30 상승합니다.]
[지력이 30 상승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의 기능이 향상됩니다. 아이템을 관찰할 시 올라가는 이해도 수치가 상승합니다.]
“와, 나. 대박.”
그리드가 환희에 찼다.
여신의 정수의 용도와 결합부의 비밀을 밝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는데, 덤으로 엄청난 보상까지 얻었으니 날아갈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그리드가 이사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혈색은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여신의 정수 한 방울이 리파엘의 창과 공명하면서 발생시킨 파장만으로 치유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우선 이사벨을 살린다.’
이게 급선무다.
이사벨이 건강해져야 리파엘의 창과 그녀를 떼어놓을 수 있었다
‘분해와 조립 과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됐어.’
미션 클리어라는 뜻이다.
미소 지은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탄하고 있는 이사벨에게 여신의 정수를 건넸다.
“마셔.”
이사벨이 거부했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왜?”
“이렇게 귀한 물건을 선뜻 받을 정도로 나는 염치없지 않아요.”
“생사의 기로에서 염치를 따지고 앉았어? 그냥 마셔.”
“싫어요.”
“누가 다 마시래? 한 방울만 마셔.”
여신의 정수의 용량은 1ml이다.
물 한 방울의 용량이 1/20ml였으니, 1ml는 20방울의 용량이라는 뜻이 된다.
그중 한 방울이 리파엘의 창과 공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사벨의 건강을 호전시켰다.
만약 이사벨이 한 방울의 정수를 직접 복용한다면, 그녀는 완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이사벨이 고집을 피웠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더 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아요.”
“아니, 딱 한 방울만 먹으라니까?”
“싫어요.”
지난 5일.
이사벨은 그리드와 단둘이 붙어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알게 됐다.
그리드가 이미 혼인하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드는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존재였다.
이사벨은 그리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한 선을 그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더 이상 그리드의 친절을 받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버티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사벨, 너는 나를 오해하고 있구나?”
“…?”
“내가 너를 돕는 이유는 내게 득이 되기 때문이야. 조건 없는 선의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괜한 착각하지 말고 후딱 마셔. 나 바빠.”
그리드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이사벨은 더 이상 거절하기도 난처했다.
“자, 어서.”
“…”
재촉하는 그리드로부터 이사벨이 작은 유리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했다.
자칫 실수로 여러 방울을 마시게 될까봐 염려하는 것이다.
‘애가 많이 소심해졌네.’
본래 이사벨은 제멋대로라고 보일 정도로 당당한 소녀였다.
하지만 드레비고와 파스칼을 겪으면서 과거의 모습을 상실하고 위축되어 있었다.
너는 인간이 아닌 도구라느니, 어서 죽으라니… 몇 년 째 그딴 개소리만 듣고 지냈으니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불쌍한 아이다.
한숨 쉰 그리드가 유리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한 방울의 정수를 덜어낸 후 이사벨의 입가로 가져갔다.
“핥아.”
“에엣…”
이사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남성. 더군다나 좋아하는 남성의 손가락을 핥아야한다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것 참, 직접 먹여주기까지 해야 돼?”
그리드가 이사벨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핫…!”
칭호의 효과들까지 합한 그리드의 손재주는 2,300 이상이다.
그의 손가락이 입술과 치아를 스쳐 입속으로 들어오자 이사벨은 오싹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전신에 휘몰아치며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하윽…!”
목젖을 스치는 두껍고 단단한 손가락이 결국 이사벨의…
이하 생략.
잠시 후.
“하아… 하아…”
탈진한 이사벨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부르르 경련하는 그녀의 가녀린 육신을 따스한 청색의 기운이 휘감고 있었다.
여신의 정수가 즉각적으로 효력을 보이는 것이다.
윤기를 잃었던 백금색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고, 거칠어졌던 피부는 투명하고 매끈해졌다.
“과연 예뻐. 이제 살만 붙이면 옛 모습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겠네.”
그리드가 칭찬해주자 이사벨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보고 그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상태가 이상한데.’
건강은 회복 됐다. 한데 왜 도리어 더 지쳐 보이는 걸까?
톡. 톡톡.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작은 창문을 두드리고 있는 전서구를 발견했다.
아이린이 보낸 전서구였다.
창문을 열어 편지를 받은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챙기며 말했다.
“이곳에도 대장간이 있다고 했지? 나는 대장간에 있을 테니까 너는 좀 쉬고 있어.”
“네…”
길게 뻗은 손가락 틈새로 그리드를 엿보는 이사벨의 눈빛은 촉촉이 젖어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열망하는 듯하다.
침대에서의 아이린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눈빛이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야한 상상을 떨쳐내기 위함이었다.
‘건강이 회복되는 과정이 어지간히도 기분 좋나보군.’
그렇게 생각한 그리드가 방에서 나갔다.
“흐냐옹.”
복도 창틀에 앉은 노에는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통통한 배를 내놓고 뒹굴거리는 녀석을 그리드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쯧쯧, 경계 서라고 내놨더니 하는 일도 없이 잠만 자네.”
5일 전, 암살자가 자신을 노리고 침입해왔었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몰랐다.
노에만 불쌍한 일이었다.
[백화가 발동합니다.]
[신성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화의 발동에 실패합니다. 부작용이 발생하여 신체에 무리가 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정신없는 알림창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대장간으로 향하기 전, 정원에 들른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편지를 펼쳐보았다.
<뱃속아이의 움직임이 느껴져요. 매일이 신비롭고 즐거워요. 어서 빨리 낭군님과 이 행복을 공유하고 싶어요. 낭군님, 당신께서는 우리 득템이가 무엇에 관심을 갖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시나요?>
[부인의 질문에 응답하십시오. 태어날 아이의 능력치에 영향을 줍니다.]
1.무예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2.마법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3.학문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4.신학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5.기술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6.그저 건강하면 좋겠다.
‘4번은 무조건 싫다.’
그리드는 하필이면 드레비고와 파스칼 등의 썩은 종교인들만 본 탓에 신학에 부정적이었다.
‘6번도 싫어. 왠지 쥬드처럼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남은 선택지 중에서 가장 끌리는 것은…
‘기술이다.’
태어날 내 아이가 영지의 노동력이 되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리드가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이린에게 사랑한다고 전한 후, 답변을 적었다.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면 찾아가도록 하겠소.’
마무리한 그리드가 편지를 전서구의 다리에 묶었다.
푸드득.
전서구가 남쪽 방향으로 힘차게 날아갔다. 윈스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드가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