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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81화 (76/1,794)

템빨 14권 - 7화

“아이고, 그리드 공작각하! 오늘은 웬일로 밖에 나와 계시는 겝니까?”

부하들을 대동한 파스칼이었다.

큰 뜻을 펼치려면 굽힐 줄도 알아야하는 법!

그리드를 반드시 회유하겠다고 결심한 파스칼은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받았던 치욕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허…?”

부하들에게 보물 상자를 내려놓도록 지시하던 파스칼.

그의 눈빛이 이채를 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리파엘의 창을 발견한 것이다.

“이거, 이거.”

내면에 분노를 감춰두고 있던 거짓 미소가 진정어린 미소로 변모한다.

‘이사벨 그년이 드디어 죽었나보군.’

바퀴벌레 같은 년이었다.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진즉 죽어버렸다면 피차 편했을 것을.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로구나.’

레베카의 딸이란 그저 명령만 수행하면 되는 존재다.

주관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벨, 린, 루나는 참으로 골치 아픈 것들이었다.

본교를 빛으로 인도했던 전전대 교황 루이즈와 본교를 타락시켰던 전대 교황 드레비고.

그 둘을 모두 섬겼던 그녀들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의문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쳤다.

괘씸한 일이다.

‘도구 따위가.’

레베카교를 대사하란 제국만의 국교로 만들 계획인 파스칼에게 있어서 현재의 레베카의 딸들은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이제 이사벨이 죽었으니 근심거리가 사라졌다.

리파엘의 창을 새로운 주인에게 인계하고, 변방에 파견 시켜놓은 린과 루나를 차례대로 없애게끔 명령한다면.

‘드디어 내 세상이 도래한다.’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다.

파스칼의 심정 같아서야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눈치를 보느라 자제했다.

연신 입 꼬리를 씰룩이는 그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차갑다.

“너희가 그토록 물고, 빠는 레베카 여신과 교단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해온 소녀가 죽었다. 그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

‘물고, 빨아?’

파스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여신을 섬기는 고귀한 행위를 저급한 단어로 폄하하는 그리드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태까지의 내 인내는 뭐가 된단 말인가?

간신히 화를 억누른 파스칼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대로, 이사벨은 평생을 여신과 본교를 위해서 봉사해온 아이이외다. 숨을 거둔 그 아이가 향할 곳은 필시 여신의 곁… 신들의 세상에서 영원히 여신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그리 생각하자 기쁘고 뿌듯하여 자꾸 웃음이 나오는구려.”

‘지랄.’

진심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개소리에 혀를 차는 그리드였다.

그에게 파스칼이 보물 상자를 건넸다.

“오늘은 기필코 받아주시길 바라외다.”

[파스칼이 180만 골드를 건넵니다. 파스칼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선물을 받을 경우, 파스칼의 소원 하나를 무조건 들어줘야만 합니다.]

“어차피 데미안은 교황이 될 수 없소이다.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봤자 뭐합니까? 투표권을 지닌 교인은 단 100명의 고위 성직자들뿐이고, 그들 중 최소 80퍼센트는 이미 내 사람입니다. 그리드 공작각하, 미래를 보고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시…”

“싫다.”

파스칼의 말을 자른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굴만 봐도 구역질나는 네놈과 손을 잡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그리드는 파스칼을 혐오했다.

과거의 자신을 괴롭혔던 놈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데미안과 이사벨을 함부로 깔아뭉개며 지껄이던 파스칼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제아무리 억만금을 줘봤자 결코 그와 손잡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정치적인 문제도 얽혀 있었고.

“말이 심하군.”

파스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제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와야 하는 법이 아니오? 지난 수일 동안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건만, 당신은 매번 나의 노력을 조롱하고 내게 모욕감만을 주는구려. 당신은 정녕 예의라는 것을 모르오?”

“뭘 새삼스럽게 예의를 운운해? 상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은 네가 평소에 즐겨하는 거잖아?”

“크윽…!”

그리드의 태도를 보아 결코 자신에게 회유당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에 초조함을 느낀 파스칼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오! 내 당신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일지라도 바칠 용의가 있소! 내가 대체 무엇을 드려야 당신은 나의 손을 잡아줄 게요?”

“무엇이든 주겠다고?”

“그렇소!”

“호오, 그것 참 구미가 당기는데?”

드디어 입질이 온다.

환희에 찬 파스칼이 그리드의 요구사항을 경청할 준비를 하였다.

그에게 그리드가 요구했다.

“천조.”

“…?”

천조?

무슨 보물 이름인가?

‘처음 듣는데?’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파스칼에게 그리드가 다시 말했다.

“1,000조 골드만 내놔. 그러면 너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이런 미친놈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1,000조 골드는 제국의 국고를. 아니,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국고를 탈탈 털어도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 황당한 금액을 요구하는 그리드가 정상인으로 보일 리가 만무했다.

“뭐? 미친놈? 무엇이든지 주겠다기에 원하는 걸 말했더니 미친놈이라고?”

“아, 아니외다. 내 심히 당황하여 헛소리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파스칼이 손사래 쳤다. 핑계를 지껄이는 그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이걸로 협상은 결렬이다. 그럼 이만 각자 갈 길 가자고.”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슬슬 대장간으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내내 잠자코 있던 까미앙이 그의 목에 칼을 겨눴다.

“리파엘의 창은 두고 가라. 교단의 물건을 외부인인 네가 언제까지 함부로 갖고 다닐 작정인 것이냐?”

“…”

번뜩이는 칼날을 내려 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두 번.”

“뭐?”

“네가 내 목에 칼을 겨눈 게 이걸로 두 번째다. 일국의 공작인 내게 말이야.”

까미앙이 조소했다.

“그래서, 뭐? 너의 왕 비스바덴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타국의 기사 따위가 내 국왕의 존함을 함부로 거론한다.

얼마나 열이 받을까?

까미앙은 그리드를 고의적으로 도발하는 중이었다.

그리드가 평정심을 잃어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애초에 그리드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우리나라 국왕 이름을 옆집 개 이름 부르듯이 멋대로 불러대는 건 좋은데 말이야.”

덥썩.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손에 쥐었다.

[백화가 발동합니다.]

[신성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화의 발동에 실패합니다. 부작용이 발생하여 신체에 무리가 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나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건 용납 못하겠다.”

그리드가 파스칼을 비롯한 원로들을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신의 저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까미앙은 어떤가?

그는 레베카교의 성직자가 아니다.

놈이 까불어대는 꼴을 굳이 지켜만 볼 이유 따위 없었다.

“혼 좀 나자.”

스윽.

그리드가 알고 있는 최강의 창술사는 폰이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그리드는 수도 없이 지켜봤다. 실제로 몇 번이나 대련하기도 했다.

폰의 창술이 그리드의 손에서 불완전하게나마 펼쳐진다.

쩌엉!

창대가 사선으로 움직이자 그리드의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던 까미앙의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놈!”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솜씨에 놀란 까미앙이 물러서며 태세를 정비한다.

그 틈에 오른쪽 다리를 뒤로 크게 뻗은 그리드가 창을 회수함과 동시에 앞으로 찔렀다.

쩌어어어엉-!

[리파엘의 창의 옵션 효과로 인하여 ‘빛의 차륜격’ 스킬이 발동합니다.]

[리파엘의 창의 옵션 효과로 인하여 대상에게 5,00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커억!”

까미앙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드의 찌르기가 갑자기 원을 그린 탓이다.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그조차도 미처 대응할 수 없는 변칙적인 공격이었다.

“쿨럭! 쿨럭!”

허리에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 주저앉은 까미앙이 검붉은 피를 토했다.

‘이런 위력이라니…!’

까미앙은 정신이 아찔했다.

뼈가 부러진 것은 물론이고 몸속의 내장이 죄다 터져버린 듯한 고통이다.

신화급 무기와 스킬의 위력이었다.

“저, 저럴 수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꺽꺽거리는 까미앙을 보면서 파스칼은 경악하고 있었다.

적기사.

대륙 최강의 기사 중 하나인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다니?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어, 어떻게 당신이 리파엘의 창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오?”

레베카교의 3대 신기는 오로지 선택 받은 존재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

타고난 신성력이 범인의 경지를 초월할 것.

최소 9년 동안 레베카 여신께 기도를 올려 신탁을 받을 것.

마지막으로…

‘여성일 것!’

파스칼이 뒷걸음쳤다.

“다, 당신…”

무표정하게 서있는 그리드를 귀신 보듯이 하는 파스칼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다.

“그리드 당신! 설마 여자였소!”

“…”

그리드가 태어난 이래 들었던 개소리 중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개소리였다.

반론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181키의 건장한 청년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고쳐 쥐었다.

그는 정말로 까미앙을 죽일 생각이었다.

용납할 수 없었던 파스칼이 힐을 사용했다.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던 까미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고쳐 쥐는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힐 참 오래간만에 보네.’

Satisfy는 일반적인 게임보다 훨씬 더 힐러가 귀하다.

레베카교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레베카교의 사제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유저는 지극히 드물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군.’

소란을 들은 교인들이 정원으로 몰려와 있었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까미앙을 죽였다가는 데미안의 선거 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물러났다.

“오늘은 봐주마.”

유유히 자리를 떠나는 그리드를 노려보는 까미앙의 두 눈에 살기가 충만했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그리드!’

오늘 내가 네놈에게 패배한 이유는 찰나의 방심 때문이다.

설마 신의 무기를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빌어먹을 새끼!’

옆구리의 상처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다.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다.

까미앙은 치리타 백작이 도착할 일주일 후를 기약했다.

“자, 그럼.”

교황청 내의 대장간.

성기사들의 무기를 생산하는 그곳에 그리드가 자리를 잡았다. 그의 손에는 전설의 대장장이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어디 한 번 시작해 볼까?”

따앙! 따앙!

리파엘의 창.

신이 만든 무기가 인간의 손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재해석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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