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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90화 (85/1,794)

템빨 14권 - 16화

“주둥이에 금칠을 해놨더군.”

교황 후보 연설 행사에서 가장 큰 활약율 펼친 사람은 데미안이었다.

다른 후보들이 파벌과 야탄교를 비난하며 정치색과 투쟁심을 표출할 때 데미안만큼온 자애를 강조했다.

레베카 교단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교리를 되새김으로서 성직자들의 본질을 자극하고, 파스칼의 행태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상기시켰다.

‘청자들의 성향이 분산되어 있을 경우,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깨닫게 만드는 편이 반감을 사지 않고 접근할 수 있다.’라는 후로이의 가르침에 기반한 연설 기법이었다.

효과는 컸다.

파스칼의 지지 세력이 미세하게나마 균열을 일으켰고 데미안을 경계하던 교인들은 데미안에게 도리어 작은 호감을 품었다.

지난 2주 동안 후로이에게 철저히 교육 받은 성과가 제대로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은 조소할 따름이었다.

“네놈의 이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미 드레비고를 겪고 물욕에 더럽혀졌기 때문이지. 자애? 그 무의미한 행위에 집착하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고자 하는 말이 워지?”

“네놈이 감언이설로 하위 성직자들을 현혹해봤자 부질없다는 뜻이다. 정작 투표권을 지닌 고위 성직자들은 네게 동조하지 않을 게야. 너의 연설은 대상을 잘못 잡았다.”

데미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서서히 변할 거야.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당신과 달리 근본부터 썩은 자들이 아니니까. 모든 성직자들이 과거의 모습을 되찾게 되는 그날까지 나는 쉬지 않고 노력하겠어. 오늘은 그 첫걸음이었을 뿐이고.”

“네놈…”

데미안의 분위기는 지난 2주간 크게 변했다.

보다 당당해졌고 두려움을 몰랐다.

어떤 확고한 신념이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드가 떠오를 지경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닮아도 더러운 놈을 닮아가고 있다.

한숨 뱉은 파스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워. 네놈이 지금은 그리드를 믿고 활개를 칠 수 있겠으나 그것도 잠시다. 조만간 현실을 깨달을 수 있겠지. 기대해라. 한 달 후 내가 교황이 되어 레베카의 딸들을 혹독히 다루는 모습을. 무력한 네놈은 절망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을게다.”

데미안 곁에 잠자코 서있던 이사벨이 움찔했다.

뱀 같은 눈길을 보내오는 파스칼율 보자 지옥과도 같던 지난날들이 떠오른 까닭이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과 사의 기로에 놓여 있던 그녀이기에 두려움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위축된 이사벨을 등 뒤로 숨긴 데미안이 이를 갈았다.

“설령 당신이 교황이 될지라도 이사벨 쨩들은 내가 지켜."

“끝까지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힘이 없다면 닥치고 웅크려라. 그것이 섭리다.”

오로지 강자만이 군림할 수 있고. 약자는 짓밟히기 위해서 존재한다.

수많은 식민지를 점령하고 식민지민들을 가축처럼 부리는 제국인들의 가치관이었다.

뼛속까지 제국인인 파스칼이 교황이 된다면. 레베카교는 기득권층만을 위한 종교로 변질될 것이었다.

“하하하하핫!!”

겁먹은 이사벨을 감싸는 데미안.

하찮은 놈의 같잖은 몸부림을 비웃은 파스칼이 박장대소하며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이사벨을 데미안이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이사벨 쨩은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어.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데미안….”

청년의 순수하고도 진실된 마음이 소녀에게 닿기 시작한다.

***

원로회실.

레베카교의 신성한 업무를 관장하는 그곳에서 23명의 원로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옆구리에 헐벗은 여자를 낀 상태였다.

치리타 백작이 제국에서부터 데려온 창녀들이었다.

파스칼의 얼굴이 구겨졌다.

“뭣들 하는 게요? 오늘 행사 때문에 교황청을 찾아온 각국 인사들이 도대체 몇 명인 줄 잊은 게요? 보는 눈이 많은 오늘 만큼은 자중을 했어야지!”

“자. 자. 너무 성내지 마시오. 내 어련히 은밀하게 하였겠소?”

원로들 사이에 끼어있던 치리타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스칼을 상석으로 끌어와 앉힌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드라는 놈. 지금쯤이면 싸늘한 주검이 되어있을 게요.”

솔깃한 파스칼이 성질을 죽였다.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고 자시고 당연한 일이 아니오? 19번 기사 플뤼톤은 혼자서도 능히 수천 병사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요. 그의 표적이 된 이상 그리드라는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도리가 없지.”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하다.

당대의 적기사단이 전대의 적기사단보다 못하다고는 하나 10번대 적기사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여태껏 그들에게 패배란 없었다.

“한 달 후면 8천만 교인의 어버이가 되실 교황 성하께 내 술 한 잔 올릴 영광을 주시오.”

치리타 백작이 파스칼에게 술을 따랐다.

아들을 상전처럼 극진히 모시는 아버지라니,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홈.”

눈엣가시 같던 그리드.

놈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자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다.

번들거리는 머리통이 간질거리는 것을 보아 조만간 새로운 머리털이 자라날 것 같았다.

‘빌어먹을 탈모로부터 드디어 해방되겠군.’

통쾌함을 느낀 파스칼이 술잔을 털어 넘기고 있노라니 원로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플뤼톤인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크억!”

쿠당탕탕!

허락도 없이 열린 문율 넘어 들어온. 아니. 날아온 것은 치리타 백작의 기사들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그들 여섯은 커다란 검상을 입고 있었다.

이미 한 명은 죽어가는 중이다.

“도, 도망치십시오.”

기사들이 말한다.

그들은 죄다 겁에 질려있었다. 마치 사신이라도 목도한 기색이다.

“도망치라니?”

이곳은 원로회실이다.

교황청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하나로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받아왔다.

어떤 고난을 맞이했을 때 최후의 보루로 선택해야할 장소가 바로 이곳이건만, 이곳으로부터 도망치라니!

말에 어폐가 있지 않은가?

술기운 탓인지 용기백배한 원로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감히 어떤 놈이 신성한 장소를 침범한 것이냐!”

“여기가 신성한 곳이었어? 썩어문드러진 곳인 줄 알았는데?”

문 너머로부터 비꼬는 음성이 들려온다.

뚜벅뚜벅.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이때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예상치 못하였다.

설마 침입자의 정체가…

“그, 그리드?”

“이럴 수가!”

파스칼 부자와 원로들은 귀신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리드는 적기사들과 흑기사들의 손에 처리당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설마!’

파스칼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드가 19번 적기사 이상의 실력자였다고?’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원탁 가까이 다가온 그리드가 창녀들을 훑어보았다. 그중 가슴이 유독 큰 여성에게 한참이나 시선을 빼앗겨 있는가 싶더니 이내 실소했다.

“꼬라지들 봐라.”

이 순간 그리드는 확신했다.

‘레베카 여신부터가 잘못 됐어.’

교리를 어기고 패악율 저지를지언정 자신만 믿고 섬기면 신성력을 나눠준다고?

참으로 편협하고 허술한 여신이다.

‘아니. 여신은 단지 순수할 뿐일지도 모르지.’

문제는 여신의 순수함율 악용하는 농들에게 있다.

‘뭐가 어찌됐든 나와는 상관없다만.’

지금 그리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너희들, 여기서 다 죽어줘야겠다.”

“…!"

파스칼과 원로들이 질겁했다.

석상처럼 굳은 그들에게 그리드가 활짝 웃어보였다.

“내가 말했었지? 나는 데미안하고 입장이 달라서 너희들을 마음껏 상대해줄 수 있다고.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나한테 덤벼줘서 고맙다."

파스칼 부자와 원로들의 이름이 죄다 빨갛다. 적기사와 흑기사들을 자객으로 보낸 장본인들로서 시스템이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신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해하여도 된다.

기뻐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치리타 백작이 경을 쳤다.

“이 무엄한 놈! 근본도 없는 것이 여기 계신 분들과 내가 누군줄 알고 함부로 찾아와 지낄이느냐!”

아들 덕분에 벼락출세한 치리타 백작은 감이라는 것을 잃고 있었다.

세상만사가 제 뜻대로 되는 줄로만 알았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죽여라!”

부상당한 기사들에게 명령한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봤자 죽을 터.

쓰러져있던 치리타 백작의 기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그리드를 덮쳤다.

그들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투지도. 살기도, 살고자 하는 의지도 아니었다.

오로지 공포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레벨이 200초반대에 불과한 그들이 몸까지 딱딱하게 굳었으니 그리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서걱!

대검술의 가장 큰 장점은 강력한 파괴력에 있다.

호쾌한 검격이 기사들의 몸을 일거에 베어 넘기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흩뿌려지는 핏줄기가 온갖 산해진미가 깔려있는 원탁 위를 뒤덮는다.

“꺄악!”

창녀들이 혼비백산하였고 치리타 백작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정말인가… 저자는 플뤼톤보다 강한 것인가…”

넋 나간 치리타 백작이 중얼거리는 그때, 파스칼은 그리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드 공작각하, 당최 무슨 일이기에 그리도 격노하셨소이까? 우선 진정부터 하시고 대화로 오해를 플어나가십시다.”

과연 파스칼은 고단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낯빛 하나 안 바뀌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이미 적기사와 흑기사들을 보내서 사람을 암살하려한 주제에 뭘 시치미야? 그냥 잠자코 죽어.”

파스칼이 정색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만?”

“같잖은 연기는 집어 치우고.”

“아!”

그리드가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자 파스칼이 치리타 백작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보냈다.

“치리타 백작. 설마 당신입니까? 당신이 감히 그리드 공작각하께 자객을 보낸 겁니까?”

“무, 무슨…!”

이놈은 지금 지 애비를 팔아먹으려하는 것인가?

큰 충격을 받은 치리타 백작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파스칼이 속삭였다.

“희생하십시오. 나는 교황이 되어야할 몸입니다.”

“파스칼…! 어찌 아비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어리바리하게 구는 치리타 백작을 바라보는 파스칼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지난 수십 년. 변방의 영주에 불과했던 당신은 오로지 내 덕에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난 자식된 도리를 다 하였을 텐데? 반면 당신은 뭐지? 부모로서 내게 해준 것이 있던가?”

“파, 파스칼…”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아비 노릇은 해야지. 안 그래?”

“으, 으윽…”

치리타 백작이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리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아들자식에게 하찮은 취급을 당하자 충격이 크고 슬펐다.

흐느끼며 고개 숙이는 그롤 확인한 파스칼이 그리드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하하, 이거야 원. 치리타 백작이 독단으로 어리석은 짓을 벌였나 봅니다. 자. 그리드 공작각하. 그 노여움을 어서 백작에게 푸시고 이리와 제 술잔을 받…”

“미친놈."

그리드가 파스칼을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약자를 짓밟는 유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파스칼만 보면 과거에 자신을 조롱하고 괴롭혔던 놈들이 떠올라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드가 파스칼을 싫어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나고 말았다.

“후레자식.”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리드.

그는 가족끼리 치킨을 시켜 먹을 때마다 부모님께 닭다리를 양보해드렸을 정도로 엄청난 효자이다.

부친을 희생양으로 삼는 파스칼의 작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극도의 혐오를 느꼈다.

“꼼수 부리지 마라. 어차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니까.”

도살귀의 가면과 안대를 장착하는 그리드의 기도가 종전과 확연히 바뀌었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그로부터 위협율 느낀 파스칼이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일랑 관두시오! 우리를 건드렸다가는 대사하란 제국이 당신을 응징하게 될 것이오! 당신은 후환이 두렵지도 않소!”

“물론 두렵다.”

사하란 제국과는 아직 적대해선 안 된다.

현재 레이단의 전력으로 제국과 맞불게 되었다가는 반나절도 안 되어 짓밟힐 게 뻔했으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을 죽인다. 적기사와 흑기사들을 내가 죽였다는 사실이 제국에 전해져서는 안 되거든.”

“함구할 터이니 걱정 마시오! 지금 당신이 우리를 죽이기라도 했다가는 일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될 게요! 당신이 원로회실로 향했다는 목격자가 단 한 명이라도 없을 것 같소? 당신은 결국 범인으로 지목되어 죽게 될 것이고. 데미안 또한 당신과 한통속으로 엮여 교황이 되지 못할 것이란 말이오!”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지금 교황청 정원에서 교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거든.”

도플갱어 랜디가 활약하고 있었다.

“알리바이는 완벽하단 뜻이야.”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몰라도 돼. 어차피 넌 곧 죽율 거니까.”

“크윽!”

그리드의 살기가 짙어졌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파스칼이 원로들에게 소리쳤다.

“버프와 힐로 버터라! 소란이 커지면 성기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현재 파스칼의 신성력은 전대 교황 드레비고에게 근접해 있었다. 아직 교황으로 등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급 신성력을 보유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와 23명의 원로들이 힘을 합쳐서 작정하고 버틴다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

일격에 살해당하지 않는 한. 서로에게 계속 힐을 해주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것은 꽤나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드라는 것이 문제였다.

신성력과 암흑력은 서로에게 상극으로 작용하는 바.

“흑화.”

[암흑 마력을 증폭시립니다.]

[암흑 마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력으로 대체합니다.]

[흑화가 유지되는 동안 종족이 반마(半魔)로 변경됩니다.]

[반마 상태에서는 생명력 최대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공격력, 마력, 민첩성이 각각 2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이 암흑 속성으로 전환됩니다.]

혹화.

레전드리 등급의 액세서리인 <다크버스의 귀걸이>에 귀속되어 있는 스킬이다. 백화와 상반되는 스킬로서 악마력을 보유한 그리드와 궁합이 좋았다.

스르륵.

피부는 백짓장처럼 창백해지고 안대를 착용하지 않은 오른쪽 눈 흰자위는 온통 검정색으로 물든다.

칠흑의 마기와 함께 나부끼는 흑발이 보는 이로 하여금 불길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현재 그리드의 모습은 인간들이 상상해온 악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연(超聯).”

광포한 마기가 원로회실을 집어삼킨다.

원로회실이 공포로 점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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