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4화
13번 뱀파이어의 도시.
입장하기에 앞서, 이곳을 이미 탐사해본 바 있는 폰과 레가스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입장하면 약 12미터 높이의 벼랑 위로 떨어지게 된다. 벼랑을 내려가기까지 적습은 없지만 워낙에 어둡고 경사가 가팔라서 자칫 낙사할 위험이 있어. 민첩성이 400 이하인 사람은 주의를 기울여서 신중히 이동해라.”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곳이기 때문에 입장하고 2분가량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거예요. 2분이 지난다고 해서 시야가 완전할 수도 없고요. 너무 어두워서 운신에 제약이 생길 테고, 우리 전원 100퍼센트의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 점을 미리 숙지해주세요. 아, 패시브 스킬로 매의 눈과 암살자의 눈을 지닌 지슈카와 페이커는 논외로 쳐야겠네요.”
반트너가 의문을 표출했다.
“어두우면 횃불을 밝히면 되잖아? 뭘 굳이 어두운 채로 다니려고 해? 우리가 무슨 원시인이냐?”
“뱀파이어들은 빛을 경계한다. 횃불을 켜는 즉시 고립당하고 말지.”
“아, 맞다. 전에도 들었던 것 같네.”
“멍청하긴.”
혀를 찬 폰이 설명을 이었다.
“벼랑 아래로는 바이란 절반 규모의 도시가 펼쳐져 있다. 뱀파이어의 사역마들이 거리를 배회하는데 평균적인 수준은 자이언트 웜보다 훨씬 아래야. 하지만 개체에 따라서 전투 능력이 천차만별이니까 너무 방심하지는 말도록.”
“사역마? 뱀파이어는 어디에 있고?”
“뱀파이어들은 도시 곳곳에 배치 된 건축물 안에 잠들어 있어요. 건물에 입장하면 순차적으로 깨어납니다. 예외로 가끔씩 기습을 가해오는 놈들도 있지만 드문 케이스에요.”
“흠… 보스도 건물 어딘가에 잠들어있겠군.”
“합당한 추측이다. 보스를 찾기 위해서는 건물들을 속속들이 뒤져야할 수밖에 없어.”
“그 과정에서 조심해야할 존재가 진혈족 뱀파이어입니다. 이따금씩 출몰하는 그들은 일반적인 뱀파이어와는 비할 바 없이 강하니까요.”
“얼마나 센데 그래?”
“나와 레가스 둘이 힘을 합쳐도 쓰러뜨리기 어렵다.”
“필드 보스급인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신성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큰 피해를 입힐 수가 없으니까 애를 먹었던 거지, 우리 전원이 힘을 합친다면 의외로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다.”
독보적인 원딜러 지슈카를 포함해서 그리드, 폰, 레가스, 페이커, 그리고 극검에 이르기까지 최강의 폭딜러들이 한데 모였다.
상성의 개념을 초월하는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진혈족 뱀파이어들도 쉽게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이 폰의 판단이었다.
“좋아. 입장 직후 어둠과 벼랑을 주의하고 빛의 발현은 최대한 자제한다. 진혈족들은 다굴… 일점사로 빠르게 처리한다. 이 정도만 숙지하면 충분한 거지?”
“그래.”
대답을 확인한 그리드가 마지막으로 파티 상태를 체크했다.
파티 이름:파브라늄 원정대
파티장:그리드(파그마의 후예. 296레벨)
파티원 목록:
폰(창기사. 307레벨)
레가스(아수라. 307레벨)
극검(감춰진 검. 306레벨)
페이커(신속의 주인. 305레벨)
지슈카(홍염의 화살. 305레벨)
반트너(철옹성. 302레벨)
제드노스(폭풍술사. 301레벨)
후로이(웅변가. 292레벨)
아이템 분배 방식:파티장 습득
충분한 휴식 덕분에 모두의 생명력과 마나, 스태미나가 충만하다.
아이템 분배 방식 또한 훌륭하다.
“가자.”
그리드 파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일제히 개미지옥으로 몸을 날렸다.
[뱀파이어들의 지하도시(13)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의 입구가 봉쇄되었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됩니다.]
[던전 보스를 처치하거나 사망하기 전까지는 던전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깜깜하다.’
입장 후 처음으로 느끼는 감상이었다.
정말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폰과 레가스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당황했을 수준이다.
일행이 어둠에 적응하고자 노력하는 그때였다.
푸득! 푸드드득!
“뭣…!”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어둠 저편으로부터 수백 개의 작은 적광이 쏟아져왔다.
셀 수 없이 많은 박쥐 떼의 쇄도였다.
“미친! 저게 뭐야! 벼랑을 내려가기 전까지 적습은 없다며!”
전장에서 잘못 된 정보는 큰 위협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방패를 곧추세운 반트너가 버럭 성을 내는 것을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터텅! 터터터터텅!!
<그리드의 방패:프로토타입A>
높은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을 겸비한 <신성의 방패>를 기본 베이스로 설계한 방패다.
상급 광물 중에서는 구하기가 비교적 쉬운 흑철을 재질로 사용하여 단단했다.
무겁다는 단점이 있지만 근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반트너가 사용하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 거대한 칠흑의 방패에 수백 마리 박쥐 떼가 날아와 대가리를 부딪치니 사방으로 피가 비산했다.
철퍽! 콰직!
자그마한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소름 돋게 만든다.
“크윽!”
반트너의 악 물린 입으로부터 신음이 새어나왔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박쥐 떼들의 타격을 방패로 막아내고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차건만, 좌우로 날아든 박쥐 떼들에게는 물리고 뜯겨 형편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젠장! 초장부터 스킬을 쓰게 만들고 앉았네! 강철의 수호!”
[3분 동안 물리 방어력이 30퍼센트, 찌르기와 베기에 대한 내성이 50퍼센트 증가합니다.]
타탁! 탁!
반트너의 갑옷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박쥐들의 작지만 날카로운 이빨이 더 이상 반트너의 살까지 닿지 않게 되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어둠에 적응한 지슈카와 페이커가 반트너를 지원했다.
“춤추는 화살.”
파팟! 파파파팟!
<멀티 샷>에 연계 된 스킬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져 박쥐들을 꿰뚫었던 수십 발의 화살이 춤추듯 회전하며 궤도를 바꿨다.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화살에 적중 당한 수십 마리의 박쥐 떼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페이커 또한 멋진 활약을 펼쳤다.
<폭발의 룬>을 장착한 단검 20개를 전면으로 쏘아 박쥐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나머지 일행들의 시야가 어둠에 적응했을 무렵에는 이미 대부분의 박쥐가 소멸한 후였다.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반트너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빌어먹을. 들어오자마자 죽을 뻔했네.”
“미안하다. 이전과 패턴이 바뀌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대부분의 던전은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위치와 행동 패턴이 일정한 편이다.
하여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폰을 보자 반트너는 더 이상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이후 그리드 일행은 반트너가 적정량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반트너는 파티의 유일한 탱커였으므로 그의 상태가 중요했다.
“쉽네, 쉬워.”
“그러게요.”
반트너가 회복한 후, 일행은 벼랑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끙끙거리며 힘들어하는 반면 그리드와 제드노스는 여유가 넘쳤다.
그들은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저들끼리만 편하게 하강하는 둘의 모습은 얄미울 정도였다.
타앗.
먼저 벼랑 아래로 착지한 두 사람이 주변을 살폈다.
일행이 벼랑을 내려오는 동안 혹시 모를 적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대형 늑대 5마리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겁나 크네.”
몸집의 크기가 일반적인 늑대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저건 거의 곰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와 제드노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9 실패작을 착용하였습니다.]
[어두운 장소에서 +9 실패작의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8 그리드의 부츠를 착용하였습니다.]
[어두운 장소에서 +8 그리드의 부츠의 방어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그리드는 템빨을 믿었고,
‘내 곁에는 그리드님이 계신다!’
제드노스는 그리드를 믿었다.
두 사람을 먹잇감으로 알고 덤벼들었던 늑대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깨갱! 깽!
[흡혈 늑대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490,800을 분배 받았습니다.]
[흡혈 늑대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487,210을 분배 받았습니다.]
[흡혈 늑대의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흡혈 늑대의 가죽>
매우 질긴 가죽입니다. 잘만 무두질할 수 있다면 갑옷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료로 거듭날 것입니다.
무게:15
9명이 나누는데도 경험치를 꽤 짭짤하게 줬다. 과연 뱀파이어의 도시는 렙업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은기사 길드 출신 중에 재봉사가 3명 있다고 했지?’
그리드도 가죽으로 방어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번 실험해본 결과 광물로 제작하는 것보다는 성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가죽을 재질로 아이템 만들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더 이득일 정도였다.
“각종 제작 재료들은 우리들끼리 분배하지 말고 길드원들에게 일감으로 주도록 하는 게 어떨까? 우리가 구해다준 재료로 만들어진 아이템은 외부에 판매해서 길드 수익금을 올리는 거지. 제작자들한테는 별도의 포상금을 주고.”
다섯 마리 흡혈 늑대를 해치우는 동안 벼랑에서 내려온 일행들에게 의견을 내놓는 그리드였다.
그리드가 이토록 입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문 일. 아니, 거의 처음이었기에 감탄한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또 한층 성장한 그리드를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폰과 레가스가 뒤늦게 우려를 표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곳, 전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박쥐 떼도 그렇고 흡혈 늑대들도 그렇고. 사역마들의 환경 반경이 전과는 비할 바 없이 넓어졌어요. 주는 경험치가 10퍼센트 이상 많아진 걸로 보아 레벨도 오른 것 같고요.”
레가스가 말하는 동안 잠시 생각해본 폰이 그리드의 퀘스트 내용을 떠올렸다.
“뱀파이어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존재의 기운이 뱀파이어들에게 축복을 내려줬다고 했지?”
“응.”
“그게 문제였군. 그 축복이라는 것 때문에 뱀파이어 도시의 전반적인 난이도가 상승한 것 같다.”
꿀꺽!
극검이 긴장했다.
이번 원정이 자칫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템빨단원들은 도리어 잔뜩 신이 났다.
난이도가 올랐다는 뜻은 즉,
“득템할 확률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군!”
“그렇지! 렙업 속도도 빨라지고!”
“…”
템빨단원들의 긴장감 없는 사고방식은 극검이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가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템빨단원들은 날라 다녔다. 거리를 배회하는 사역마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하며 경험치와 아이템을 쌓았다.
그리고 머잖아 고풍스러운 고딕 양식의 고층 건물 앞에 서게 됐다.
“이런 건물이 대략 10개쯤 있다, 이거지?”
보스를 찾아 죽이고 파브라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건물들을 최대한 빠르고 철저하게 수색해야만 했다.
그리드가 망설임 없이 건물의 거대한 문을 열어젖히려 하는 순간이었다.
[13번째 도시의 주인,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이 출현하였습니다.]
[강력한 사기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일부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뱀파이어의 시선은 하등한 종족을 굴종시킵니다. 신체에 제법 강한 억압이 가해집니다.]
그리드 일행의 눈앞으로 동시다발적인 알림창이 떠오르더니,
스르륵.
그리드의 머리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속으로부터 등장한 금발의 미남이 보석보다 아름다운 적안을 번뜩였다.
“인간 따위가 내 도시에 발을 들이다니! 공기가 오염되어 역하구나!”
엘핀스톤에게도 사연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몇 달 푹 자고 일어났더니 도시가 쑥대밭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부하들에게 들어보니 웬 정신 나간 인간 놈 둘이 쳐들어왔다고 했다.
인간 따위가, 그것도 고작 둘이서 뱀파이어의 도시를 침공하다니?
참으로 황당하고 괘씸한 일이었다.
격분한 엘핀스톤은 벌써 두 달째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자려고 누우면 너무 화가 나서 도무지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열이 뻗쳐서 18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나 산책을 나왔던 차다.
한데 때마침 인간 놈들을 발견한 것이다. 화풀이하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내 숙면을 위해 죽어라!!”
엘핀스톤은 인간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듯한 사내를 노리고 자신의 최강 스킬을 사용했다.
<극한의 수혈>
대상의 생명력을 대량으로 빼앗아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무시무시한 일격필살 스킬이자 회복 스킬이었다.
하루에 단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하찮은 것들을 겁주기에 이보다 적합한 스킬도 없었다.
푸화하하학!!
피의 장막이 솟구치더니 인간 사내를 덮쳤다.
필시 죽었으리라!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한 엘핀스톤이 냉소를 머금었다.
“크크큭, 잠시 후에 다시 찾아오마. 그때 또 한 놈을 죽이고, 그 다음번에도 또 한 놈을 죽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며 네놈들에게 극한의 공포를 맛보여주마!!”
스륵!
다시금 연기로 변한 엘핀스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피의 장막이 걷혔다.
그 안에서부터 그리드가 무사히 살아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려 24시간인 무적 패시브를 허무하게 잃었다.
하지만 어쨌든 살았다.
그리드와 엘핀스톤, 둘 모두 낭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