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5화
“인간 따위가 내 도시에 발을 들이다니! 공기가 오염되어 역하구나!”
금발의 미남자가 기척도 없이 등장 한 순간, 템빨단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불길한 알림창이 연속적으로 떠오른다 싶더니,
[앞으로 5분 동안 <바람 장막>, <흑풍의 철퇴>, <영겁의 폭풍>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5분 동안 <방패 던지기>, <피해 나누기>, <수호자의 용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5분 동안 <멀티 샷>, <홍염의 화살>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
그리드를 제외한 일행 전원 최소 2개에서 3개의 스킬들을 봉인 당했다. 운 나쁘게 주력 스킬을 봉인 당한 사람들이 특히 난색을 표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 5분 동안 모든 속도가 30퍼센트 저하됩니다.]
제법 강한 억압이라더니, 모든 속도 감소라고?
공격속도와 이동속도 둘 중 하나만 하락할지라도 본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억압은 제법의 수준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드! 피해라!”
과묵하기로 유명한 페이커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
격노한 도시의 주인은 이미 그리드를 공격하고 있었다.
푸화하하학!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선홍색 피의 장막이 그리드를 집어삼켰다.
엘핀스톤은 그리드가 죽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크크큭, 잠시 후에 다시 찾아오마. 그때 또 한 놈을 죽이고, 그 다음번에도 또 한 놈을 죽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며 네놈들에게 극한의 공포를 맛보여주마!!”
스륵!
어둠과 동화되며 지껄인 엘핀스톤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템빨단원들은 감히 그를 쫓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 물러나주니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엘핀스톤은 압도적인 존재였다.
“…”
잠시간의 정적 후.
피의 장막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리드는 단 1의 생명력만을 남겨놓고 목숨을 연명했다.
꼴이 말이 아니다.
전신이 피투성이였고, <성스러운 빛의 갑옷>을 제외한 방어구 대부분이 넝마였다.
“그리드! 괜찮아?”
일행들이 달려왔다. 하나 같이 걱정을 표하는 얼굴이었다. 특히 지슈카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드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각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보다시피 괜찮지 않다.”
꿀꺽꿀꺽.
‘제기랄.’
식도를 타고 내려간 물약이 눈물이라는 형태로 변해 역류한다.
<극상의 생명력 회복 물약>
레이단의 연금술시설에서 제조한 물약이다.
15,000의 생명력을 회복시켜주는 이 최고급 물약의 병당 가격은 무려 10골드를 호가했다.
이거 3병 마실 돈이면 현실에서 치킨 2마리를 사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극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운이 좋아서 다행이다. 피가 딱 1만 남고 살아남다니, 이건 완전히 기적이잖아? 내참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서프라이즈에 출현해도 되겠어.”
그리드의 무적 패시브에 대해서 모르는 극검이었다.
흥분해서 떠드는 그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믿고 등을 맡겨야할 동료가 되었으니만큼 서로에 대해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불사 패시브를 보유하고 있거든요.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입게 될 경우, 5초 동안 생명력이 1로 고정돼서 모든 피해에 면역하죠. 쿨타임은 24시간이나 되지만.”
“헐…”
목숨 잃을 일이 흔한 것도 아니고,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면 좀 어떤가? 목숨이 2개인 셈인데!
완전 사기 수준이다. 과연 레전드리 클래스는 남달랐다.
선망의 시선을 보내오는 극검에게 그리드가 피식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항상 염두에 둬요. 최악의 상황에서는 방금처럼 나를 몸빵으로 세워야지.”
묘하게 ‘방금처럼’을 강조하는 그리드였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동료들이 그를 엘핀스톤에게 떠밀었다고 착각할법한 화법이었다.
“폰, 레가스. 조금 전 엘핀스톤이라는 자식, 너희들이 탐사했었을 때는 나타난 적이 없던 거지?”
“그래, 우리도 처음 봤다.”
“맞아요. 우리는 이곳을 한 달도 넘게 탐사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를 마주친 적이 없어요.”
“그땐 운이 좋았던 거네.”
“…”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도시 보스의 강함이 템빨단원들의 상정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우리들 중에서 생명력이 가장 높은 그리드의 무적 패시브를 일격에 발동시킨 놈이야. 스킬을 사용할 틈을 주면 안 된다는 뜻인데, 캐스팅 시간도 짧은데다가 등장할 때 기척조차 감지할 수가 없으니 대비하기가 힘들어.”
“놈이 1번 나타날 때마다 우린 1명씩 죽어나간다고 보면 되겠군.”
“차례대로 사냥 당하느니 차라리 전면전을 유도하는 게 어떨까?”
“그래봤자 결과는 전멸일 가능성이 높다. 재수 없게 주력 스킬들을 봉인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강적과의 사투에서 5분이란 지옥처럼 긴 시간이다. 5분 동안 봉인 당하는 스킬들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걸 어쩌나…”
“답이 없네.”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내게 시간만 있었어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을 텐데.”
그래, 레벨을 올릴 시간 말이다.
‘만약 내가 300레벨을 찍을 수만 있다면…’
엘핀스톤은 분명히 강하다. 화석을 채취당하지 않은 헬가오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특히 기척을 지우는 솜씨가 최상급이다.
현재 그리드의 통찰력으로도 놈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300레벨을 달성하고 모든 스탯이 3차 각성을 맞이한다면?
‘놈이 등장하는 순간의 기척을 읽고 반격을 가하는 게 가능해진다.’
파그마의 검무 회(回)로 반격할 수만 있다면, 놈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 있다.
동료들의 전투력이 저하되어 있는 5분 동안 최대한 버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셈이다.
‘그러면 레이드를 성공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져.’
하지만 현재 그리드의 레벨은 296에 불과했다.
이곳에 진입한 이후 경험치가 많이 올라 곧 297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300이라는 레벨은 하루 이틀에 찍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경험치 물약을 복용한 상태로 이 도시의 모든 뱀파이어들을 다 쓸어버린다면 또 모를까.
“빌어먹을.”
엘핀스톤은 잠시 후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당장 5분 후, 10분 후일 수도 있다. 그리드에게 시간은 없었다.
즉, 결론은.
‘이번 원정은 실패다.’
확신한 그리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점령해야 할 뱀파이어의 도시가 무려 15개나 되건만, 그중 첫 번째 도시에서부터 이 사달이 발생하였으니 좌절감에 휩싸였다.
“빌어먹을! 퀘스트 난이도가 높아도 너무 높잖아!”
15개의 파브라늄을 잃게 생긴 그리드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절망하는 그를 바라보는 템빨단원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어두웠다.
그들 모두 이번 원정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음을 깨닫고 있었기에 그리드를 섣불리 위로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슈카만큼은 달랐다.
아직 Satisfy가 오픈하기 전, 크게 흥행했던 MMORPG 의 지존이었던 그녀는 그리드에게 희망을 심어줄만한 분석을 내놓았다.
“엘핀스톤이 재출현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길지도 몰라. 녀석이 사용한 스킬의 위력을 봤을 때 쿨타임이 짧지는 않을 것 같거든.”
치고 빠지는 형식의 전투 방식을 구사하는 몬스터들의 리듬은 대개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에 따른다.
<백골 섬>의 <퓨커>들이 그랬다.
놈들은 정확히 7분 간격으로 나타나 산성액을 뱉고 도망가곤 했으니까.
“녀석이 재출현하기까지 텀이 길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어. 그리드의 레벨을 300까지 올리는 거야.”
“무슨 수로?”
“몹몰이를 해서 그리드에게 경험치를 몰아주는 거지. 이곳의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 양을 고려해 봤을 때, 최소 일주일이면 그리드는 300레벨을 달성할 수도 있어.”
“그리드가 300레벨을 달성하면 엘핀스톤을 레이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알겠다. 하지만 몹몰이 중에 지속적으로 등장할 엘핀스톤에게 무슨 수로 대처해야하지?”
“놈의 스킬 공격을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 없지. 처음 몇 번은 불가능해서 한 명씩 희생당하겠지만 혹시 또 알아? 언젠간 대처법을 발견할지도.”
지슈카가 내놓은 방안 외에는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일행 모두가 그리드 키우기 프로젝트에 찬성했다.
그리드는 면목이 없었다.
“내 개인적인 퀘스트 때문에 너희들을 이런 위험에 빠뜨려서 미안하다.”
“미안하면 열심히 해.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몰아다줄 테니까 꼭 300레벨을 찍어보라고.”
반드시 그리하겠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명성 상점을 소환했다.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300레벨을 찍어야만 한다. 경험치 물약의 필요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뽑는다!’
그리드가 <뽑아! 뽑아! 다 뽑아!> 머신 앞에 섰다.
그의 잔여 명성은 28,013이었다.
1회당 999명성을 소모하는 뽑기를 총 28회 시도할 수 있는 수치였다.
‘28번 돌리면 1개는 뜰 거야. 분명히 뜰 거야. 안 뜨면 이상한 거야.’
덜컹.
그리드가 머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미친!”
초장부터 2연속 꽝이라니!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계속 뽑기를 진행해도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들었고, 가능하다면 뽑기를 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증발한 명성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유혹이란 무서운 법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이대로 뽑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뽑기!
과거, 수많은 게이머들의 지갑을 거덜내고 모바일 게임 제작사들의 배를 기름지게 부풀려줬던 그 최악의 사행성 시스템이 지금 이 순간 그리드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씨발! 그래! 누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결국 욕설까지 지껄이기 시작한 그리드가 머신에 명성을 재차 투입했다.
[축하합니다! 쌉싸름한 초콜릿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축하합니다! 영유아의 지식 발달에 도움을 주는 블록 장난감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아! 어찌하여 뽑기는 하면 할수록 도리어 확률이 더 낮아진단 말인가!
잔여 명성이 1만 이하로 떨어지자 그리드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경험치 물약은 둘째 치고, 어떻게 된 게 쓸모 있는 물건이 하나도 안 나올 수가 있지?’
너무 열이 받아서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멈추고 싶지만 손은 계속 머신을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본전을 뽑아야한다는 심리가 작용되어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잔여 명성이 6천대로 떨어졌을 때였다.
[축하합니다! 경험치 획득량 상승 물약을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획득량 상승 물약>
3일 동안 경험치 획득량이 20퍼센트 증가합니다.
무게:0.1
“드, 드디어…!”
기쁘다. 분명히 기쁜데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걸까?
1년 넘게 모아온 명성 중 대부분을 소모한 탓에 정작 뽑아놓고도 패배자가 된 기분이다.
“에휴… 어쨌든 나온 게 어디냐.”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인벤토리로부터 <말락서스의 망토>를 꺼냈다.
무수한 사람들의 피 냄새가 배인 탓에 몬스터들을 유인하기에 용이한, 희대의 몹몰이용 망토가 오래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리드가 그것을 반트너에게 건넸다.
“입어.”
“헐…”
그리드에게 빠르게 사냥감을 몰아다 주기 위해선 무슨 수를 써야하는가?
일행들과 함께 논의하고 있던 반트너의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