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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3화 (138/1,794)

템빨 16권 - 20화

숙녀여고에 재학 중인 학생은 400명이 채 안 된다.

하지만 학교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총 면적 161,150㎡.

2개의 운동장과 야외, 실내 수영장. 그리고 온갖 분야의 실습실과 전시장, 체육관, 각종 편의시설 등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이는 어지간한 대학 규모를 방불케 만드는 것으로서 고등학교로서는 독보적인 규모였다.

고등학교가 이리 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이유는 숙녀고의 설립자이자 숙녀재단 이사장인 김정숙 여사의 이념에 있다.

풍족한 환경이 훌륭한 숙녀를 키운다!

라는 이념이었다.

실제로 숙녀고는 단 50년 만에 최고의 명문고 중 하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수많은 여학생들이 훌륭한 시설과 아름다운 조경을 갖춘 숙녀고에 입학하기를 희망하였고, 숙녀고는 그중 인재만 받아들이면 되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단지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숙녀고의 거대 부지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인 숙녀여고.

인파로 북적이는 그곳에 허우대 좋은 2명의 사내가 수상한 몰골로 서성거렸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이들, 다름 아닌 영우와 극검(강대한)이었다.

“와, 뭔 놈의 학교가 이렇게 커?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영우는 지방대 출신이다. 지방대 중에서도 막말로 돈만 주면 입학 가능한 학교를 다녔고 그곳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그곳과 비교하면 숙녀고가 족히 3배 이상 컸다.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잖아? 근데도 처음 와보는 건가?”

“오더라도 항상 정문 앞까지였거든. 들어와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랬군… 응?”

영우와 대화하던 극검이 갑자기 얼굴을 콱 찌푸렸다. 그가 치를 떨었다.

“타코야끼? 오코노미야끼? 야키소바? 이런 빌어먹을!! 여기가 무슨 일본도 아니고, 대한민국 고등학교 축제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들이 왜 죄다 왜놈들의 음식인거지!!”

극검이 화를 낼만도 했다.

학교 정문부터 교정까지 일렬로 쭉 늘어서있는 노점상 중 대다수가 일본어로 쓰여진 홍등 간판을 달아놓고 있었다.

왜색이 짙은 것이, 마치 일본식 주점이 범람하고 있는 홍대 거리를 보는 듯하다. 이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여튼 대한민국 국민들은 너무 착하고 대범해서 탈이야! 우리 조상님들께서 일제강점기를 겪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셨건만, 그 후손들은 어느덧 일본을 용서하고 그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내 원 참! 포용력이 커도 너무 커!”

“…”

대한애국협회장 극검은 한국과 한국인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하여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혀를 내두른 영우가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군.’

노점상들이 한국전통의 부침개를 팔든, 아니면 일본, 중국식 부침개를 팔든 솔직히 영우는 관심 없었다.

지금 영우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세희의 안전이었기에.

‘김두현!’

월드 스타라는 입장을 이용해 순수한 여고생들을 유린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 음흉한 놈이 세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영우는 반드시 막아낼 각오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 이곳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축제를 보러온 인파가 예상보다 더 많았던 탓에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든 실정이었다. 이래서야 100미터 이동하는데 족히 10분씩은 걸릴 것 같았다.

‘아무래도 김두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팬이 많은가본데…’

영우가 골치 아파하는 그때였다.

“저기요, 잘생긴 오빠.”

웬 학생 하나가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왔다. 앞치마를 입고 조리용 모자를 쓰고 있는 조그마한 여고생이었다. 꽤나 깜찍하고 사랑스러웠다.

“응, 왜 부르니?”

여고생만 보면 동생 세희가 떠올라서 친절하게 응대하는 영우였다. 평소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굉장히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던지라 극검은 닭살이 돋았다.

“우리 디저트 실습 동아리가 축제 기간에 맞춰서 출시한 신작 디저트가 있거든요. 혹시 드셔보지 않을래요? 단 돈 3천원만 받을게요.”

여고생이 유혹하듯 앞치마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

그녀는 자기 동아리에서 운영하는 노점상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호객 행위를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영우는 상술에 넘어가주는 호구 짓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내 동생 세희의 친구일 수도 있었다.

영우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하나 줘봐.”

“헤헷! 고마워요!”

신난 여고생이 영우와 극검을 동아리 노점상으로 끌고 갔다.

근데 어째 노점상에 붙어 있는 메뉴들의 이름이 심상치 않았다.

‘김치 아이스크림? 김치 케이크?’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온다.

똥 밟았다는 생각에 영우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반면 극검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오오! 이 아이들 장하구만! 외국인들이 김치를 쉽게 접할 수 있게끔 고안한 디저트들인가 본데, 정말 기특하지 않냐!”

“…기특하기는 염병.”

애초에, 외국인에게 굳이 김치를 강요하는 이유가 뭘까? 한국을 대표할만한 음식은 김치 말고도 많지 않던가?

영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울상을 짓는 그의 귓가로 김치 아이스크림을 컵에 퍼 담고 있는 여고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봐. 내가 호구 같다고 했지? 한 번 웃어주니까 좋다고 쪼르르 따라오는 꼴 좀 봐.”

“헤에, 차림새부터가 변태 같더라니, 여고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얼간이들인가 보네.”

“…”

제발 욕을 하려면 안 들리게 해다오.

차마 동생뻘 아이들에게 심한 말 못하고 성질을 삼키는 영우 앞으로 시뻘건 아이스크림 2개가 대령되었다.

“8천원이에요!”

“뭐? 아까는 3천원이라며?”

“2개엔 8천원이에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약을 파는 여고생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딱히 예림이만 특별하게 까졌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영우였다.

전반적으로 요즘 애들이 참 무서웠다.

한숨 쉰 영우가 여고생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적당히 해, 자식아. 애교도 정도껏이어야지 누굴 진짜 호구로 아냐?”

“히, 히잉.”

여고생의 눈가로 눈물이 핑 돌았다.

영우는 타고난 골격이 좋을뿐더러 정신 차린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을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힘이 꽤 좋았다. 꿀밤도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려하는 여고생을 보고 당황한 영우가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통증을 완화시켜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 울지 마. 그러다가 경비라도 오면 골치가…”

“하으응.”

영우에게 이마를 어루만져진 여고생이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 귀까지 빨갛게 붉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몽롱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를 보고 영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놈의 손재주가…!’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좋다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할 것 아닌가!

자칫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에 초조해진 영우가 극검에게 소리쳤다.

“빨리 계산하고 튀어!”

“어? 그, 그래!”

대체 뭐가 문제지?

극검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이 아이스크림들을 내가 사기로 했던 건가? 의문을 느끼면서 여고생들에게 8천원-그는 호구였다-을 지불하고 영우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우오오오오!! 이건 진짜 천상의 진미다!! 달콤한 김칫국물이 혓바닥 위에서 사르르 녹으니 과연! 외국인들도 좋아하겠어!!”

“…다 먹으슈.”

영우는 감격하는 극검에게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마저 떠넘겼다. 그리고 핸드폰을 펼쳐 보았다.

1시간 전 예림으로부터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다시금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이번 축제에서 저랑 세희는 유령의 집에서 일하기로 했어요!*^0^* 나는 처.녀.귀신♥ 섹시하죠?>

“크흠…”

문자에 첨부 된 사진이 가관이다.

새하얀 허벅지와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개량 소복을 입은 예림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뇌쇄적인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처녀 귀신이야.”

남자 여럿 잡을 요부 귀신이 따로 없다.

뭐, 어찌됐든 분명히 보기엔 좋았다.

하지만 내 동생도 이런 야시시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썩 불쾌하고 걱정되었다.

김두현의 표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초조함에 휩싸인 영우는 서둘러 인파를 헤쳐 나갈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고, 이내 묘안을 떠올렸다.

‘손재주다.’

Satisfy에서 수천 개의 아이템을 제작하고 아이린을 수십 번도 더 기쁘게 만들어주면서 단련시킨 손재주.

전설의 경지에 오른 그 기술을 드디어 현실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순간이 찾아왔다.

‘잘 될 거야. 매일 밤마다 마늘을 까면서 요령을 파악했으니까.’

실제로 조금 전 여고생에게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가? 그때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뚜둑! 뚝!

손을 푼 영우가 극검에게 말했다.

“잘 따라와요.”

“음?”

이 인파를 어찌 헤쳐 나가겠다고?

의아해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극검이 이내 경악했다.

“하응!”

“핫!”

“꺄흑!”

영우의 손길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성들의 허리나 등을 살짝 스칠 때마다 여성들이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무슨!”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모세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었다.

영우가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여성들이 주저앉으며 길을 열어주었으니 이 현상은 그저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과, 과연 갓리드…!”

원리는 모르겠지만 역시 갓리드는 대단하다.

극검은 영우가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

숙녀고 가을 축제는 총 3일 동안 진행되며 축제 기간 동안 방문자수가 평균 1만 명에 육박한다.

단순한 고등학교 축제의 개념을 넘어선, 명실상부 경제 창출의 장으로서 재단과 교직원들 또한 축제에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아침방송 등의 언론매체들로부터 숙녀고 축제 이야기가 수시로 언급되는 것은 모두 의도적인 마케팅이었던 것이다.

“두현씨가 우리 숙녀고 축제에 참석하시겠다는 뜻을 주셨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숙녀고 교장 이청순이 김두현을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매해 축제 때마다 비싼 돈 들여 아이돌을 초대하고는 하였는데, 김두현은 월드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노개런티로 축제에 참석해주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이청순만 수지맞았다. 이사회로부터 높이 평가 받을 수 있었다.

“별 말씀을.”

짤막하게 대꾸한 김두현이 축제 일정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로지 Satisfy와 관련 된 일정에만 관심을 가졌다.

Satisfy 펫 콘테스트.

Satisfy 수영 대회.

Satisfy 무투 대회.

“이중에서 그리드님이 참가하기로 한 종목이 뭡니까?”

만남 이후 내내 짤막한 대답만 하던 두현이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에 화색이 돋았던 이청순 교장의 표정이 금세 또 어두워졌다.

“그분이 출전하는 종목은 없습니다. 그분께 축제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보내봤지만 거절당했거든요.”

두현이 짐짓 당황했다.

만약 자신이 그리드였다면, 친동생이 재학 중인 학교의 행사에는 꼭 참석하여 동생의 입지를 올려주고자 하였을 텐데 그리드는 아니라니 놀라웠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는 건가… 과연 고귀한 멤피스 노에의 주인님답게 성품이 올곧구나. 나도 배워야겠다.’

멋대로 오해한 두현이 재차 물었다.

“루비… 아니, 세희양은 어느 종목에 참가하기로 했습니까?”

“어디 보자. 무투 대회네요.”

“…”

의외다.

가녀리고 청초한 인상이기에 펫 콘텐스트나 수영 종목에 참가하리라 예상했는데 설마 무투 대회에 참가했을 줄이야?

어쨌든 이걸로 내 일정도 정해졌다. 세희에게 자연스럽게 접근, 그리드와 친분을 도모할 기회를 얻었다.

마음을 정한 두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또한 무투 대회에 참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펫 콘테스트에도…”

두현은 평소 Satisfy를 즐겨한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애완묘, 애완견들과 놀아주거나 Satisfy를 플레이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인터뷰에서도 몇 번 언급한 사실이다.

그래봤자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평소에 연애질만 하고 다니리라 억측했지만.

‘펫 콘테스트에는 얼마나 예쁜 아이들이 나올까?’

두근두근.

기대감에 심장이 뛴다.

상기 된 얼굴의 두현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올해 나이 60을 바라보는 이청순 교장이 반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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