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2화
“그리드 공작은 아직 아바마마의 병세를 모르오. 그 증거로서 레이단의 군비가 여전히 허술하니, 이때를 노리고 레이단을 쳐야하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소.”
제1왕자 렌은 그리드와 그의 부하들이 얼마나 고강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당시 그들의 신위를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를 적대하려는 이유는 첫째, 가만히 있어봤자 잡아먹힐 게 분명했기 때문이고 둘째, 휴렌트를 비롯한 전사들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휴렌트의 시야에는 연계 퀘스트 내용이 갱신되고 있었다.
<에트날의 왕자Ⅳ-종장->
난이도:측정불가
오러의 극의를 목도한 제1왕자 렌의 당신을 향한 신뢰는 절대적입니다. 당신과 척슬리 단장만이 그리드 공작의 대항마라고 믿습니다.
렌의 군세와 함께 레이단으로 진격하십시오!
왕실을 우습게 여기는 그리드 공작에게 정통의 철퇴를 내리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레이단 점령
퀘스트 클리어 보상:렌이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며 당신은 공왕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유저 최초로 나라를 갖게 될 경우, 매우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퀘스트 실패 시:예측 불가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측정불가의 난이도란 즉 고난이도를 뜻함이 아니다.
퀘스트에서 적대하는 대상, 혹은 세력이 유저일 경우 난이도와 결과를 추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괘념치 않고 미소 지은 휴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왕자님을 돕겠습니다.”
현실시간으로 어느덧 10개월 전.
휴렌트는 그리드에게 단 5초 만에 패배하는 굴욕을 당했었다. 그것도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멸시와 수모를 당했던가?
‘이번 퀘스트를 기회로 명예를 되찾고야 말겠다.’
공왕이라는 지위?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휴렌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최강이라는 칭호를 되찾는 것이었고, 지금의 자신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드, 오러 마스터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지난 10개월 동안의 내 노력, 네게는 재앙이 되리라.
***
가을의 정취에 젖은 가로수길.
“펫 마이스터가 정확히 뭡니까?”
축제가 끝난 후.
영우는 세희, 예림, 두현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음식을 주문한 뒤 곧바로 질문하는 영우에게 두현이 설명했다.
“몬스터 테이머의 강화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몬스터를 조련하여 펫으로 부릴 수 있을뿐더러 타인의 펫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올수도 있죠. 또한 내 펫과 동료의 펫 모두에게 버프를 내리는 일도 가능하고요.”
동료의 펫에게 버프를?
최강 버퍼 후로이조차도 못하는 일이었다. 후로이는 본인의 펫에게만 버프를 내릴 수 있었다.
더군다나.
“타인의 펫을 빼앗는다?”
“펫에 대한 명령권을 제가 갖는 겁니다. 지속 시간은 최소 15초, 최대 50초입니다.”
“명령권을 빼앗은 펫의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나?”
“네.”
“사기네.”
과장이 아니다.
적의 펫을 빼앗은 후 펫의 본래 주인을 향해서 스킬을 사용하게끔 한다면?
펫의 마나를 소모시킴과 동시에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가 있다.
펫이 보유한 스킬이 버프 계열이라면 아군에게 사용하게끔 만들면 될 일이고.
어쨌든 효용성이 무척 뛰어났다. 전투에서 빛나는 가취를 발휘할 터였다.
“하지만 펫 마이스터의 진정한 능력은 따로 있죠.”
두현은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았다.
세희, 예림 같은 미소녀들과 함께 있어서?
전혀 아니다.
두현은 오로지 영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영우의 펫, 노에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들뜬 상태였다.
“진정한 능력?”
“대상 펫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펫의 스탯과 스킬, 약점과 장점 등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또 있어?’
영우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예비 템빨단원의 장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영우야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한껏 기대하는 영우에게 김두현이 펫 마이스터의 궁극적인 장점을 이야기했다.
“펫 미용이 가능합니다.”
“…미용?”
“네, 그러니 어서 내게 노에를 소개시켜주십시오. 나라면 노에를 더욱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나는 꼭 노에의 전속 미용사가 되고 싶습니다!”
“…”
명색이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가 미용사를 꿈꾸다니?
어째 이번 신입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황당해서 혀를 내두르는 영우의 뇌리로 과거, 체다카 길드 시절의 반트너가 했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당장 툰만 봐도 그렇고, 그리드가 길드에 가입한 이후로 들어온 신입들이 죄다 정상이 아니다. 아무래도 미친놈은 미친놈을 끌어들이나봐.”
‘내가 문젠가?’
뒤늦게 깨닫는 영우의 입으로 예림이 돌돌 만 파스타를 넣어줬다.
“어때요? 맛있죠?”
얼떨결에 받아먹은 영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다지. 이딴 거 사먹을 돈이면 차라리 간짜장 2그릇을 사먹겠다.”
“나처럼 섹시한 여자가 먹여주는 음식이 맛없을 리 없을 텐데요?”
“꼬맹이가 여자는 무슨… 하나도 안 섹시해.”
“아잉~ 이래도요?”
“힉! 공공장소에서 이러지마!”
‘그리드 이 사람.’
두현은 예림, 세희 사이에 앉아 만끽(?)하고 있는 영우를 보면서 깨달았다.
진정한 여고생 킬러란 다름 아닌 영우였음을 말이다.
“근데 극검 아저씬 어디 갔어요?”
식사가 끝나갈 무렵.
예림이 뒤늦게 떠올리고 물었다.
이때까지 극검을 까맣게 잊고 있던 영우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또 어디 가서 두 유 노우 하고 있겠지.”
영우를 위해서 성추행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극검!
벌써 몇 시간째 경비업체 직원들과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그가 들으면 서러워 오열할만한 일이었다.
***
<양산형 그리드 세트>
무기, 투구, 갑옷, 장갑, 신발로 구성 된 무구세트다.
무기의 종류로는 한손 검, 단창, 활, 방패가 있으며 그리드가 레이단의 병사들에게 보급해줄 의도로 설계, 제작한 것이었다.
하나 같이 성능이 뛰어났고 세트로 장착 시 효과가 매우 탁월하여 동레벨 그 어떤 무구들과 비교해도 뛰어났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레벨 제한이 160이라는 점이었다.
반면 레이단 병사들의 레벨은 아직 133에 불과했으니 당장 보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벨 제한을 이 이상 낮췄다가는 성능이 너무 아쉬워진다.’
어쩌지?
생각해본 그리드가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소환했다.
***
“허.”
그리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레이단 외성벽.
그리드는 휴대용 용광로 앞에 서서 아이템을 제작 중이었고, 그의 뒤로는 4개의 황금 손이 날아다니며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으니 마치 굉장한 마법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수준이 낮군.’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기준에서 봤을 때 자이언트 웜은 매우 약한 몬스터였다.
그들은 일격에 자이언트 웜을 베어버릴 수 있었고, 아마 그리드 공작 또한 스킬을 사용한다면 마찬가지일 터였다.
반면 저 황금 손들은 어떤가?
4개가 힘을 합쳐봤자 자이언트 웜 한 마리를 사냥하는데 4분 이상을 소요했다. 애초에 전투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스스로 움직이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썩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빼어난 속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황금 손들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도 내가 상대했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어.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감상하고 있는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병사들의 레벨을 하나 올리는데 얼마나 걸리지?”
“현재 기준으로 5일입니다.”
“헐…”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레벨 업 속도였다.
윈스톤에 머물렀을 당시, 윈스톤 병사들의 레벨이 몇 달 동안 80대에 머물렀던 점을 감안해보면 레이단의 병사들은 실로 경이적인 속도로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대제국의 기둥이 될 운명이었던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훈련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 넉넉잡아 5개월 후쯤이면 병사들의 레벨이 160을 달성하겠군?”
“그렇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아스모펠이었다.
너무 자신감이 넘쳤던 까닭에 그리드는 도리어 욕심이 생겼다.
“혹시 레벨을 더 빨리 올릴 수는 없을까?”
“이미 훈련의 강도가 매우 높습니다. 이 이상 병사들을 혹사시킨다면 자칫 부상을 입을 우려가 있고 또한 불만이 폭주할 것입니다.”
“안 다치게 잘,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리면 되잖아? 그리고 불만은 또 무슨 불만?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그리드는 대한민국 육군 출신답게 병사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강도 높은 훈련?
죽을 만큼 빡세봤자 결국에는 적응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빡세게 구르다보면 불만을 지껄일 틈도 없어진다.
“응? 굴리자.”
“…알겠습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은 그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었다.
그리드가 다소 버거운 명령을 내릴지라도, 그것이 불합리한 것이 아닌 이상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레이단의 병사들만 개고생하게 됐다.
“뛰어! 굴러! 기어!”
“찔러라! 쏴라! 베어라! 찍어라!”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자비란 없었다.
레이단의 1천 병사들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매일매일 훈련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결과 병사들의 레벨업 속도가 최소 1.3배에서 최대 1.5배까지 상승하는 쾌거가 발생하였으나,
[레이단 병사들의 충성도가 9 하락하였습니다.]
[레이단 병사들이 당신을 존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그리드는 병사들에게 원망이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일반적인 영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다.
병사들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이 낮아질 경우, 다시 복구하기가 어려웠고 명령 수행 능력이 떨어졌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
따앙! 따앙!
매일 밤낮 가리지 않고 제작하고 있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
이것들을 보급하게 되는 날, 병사들의 자신에 대한 충성도와 존경심이 다시금 수직상승하게 되리란 사실을 지금의 그리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
아이린의 출산 예정일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맞춰 에트날 왕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북부의 지배자인 스테임 후작이 레이단을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인어른.”
“오오! 공작각하께서 친히 마중을 나와 주시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레이단을 관찰하는 스테임 후작의 눈빛에 이채가 실렸다.
그가 알기로 레이단은 크기만 할 뿐, 다 죽어가는 유령도시였건만 그리드가 영주로 부임한 이후 순식간에 발전한 것이었다.
아직 인구가 2만밖에 안 된다고는 하나 에트날 왕국의 여느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아니, 농업 분야만 놓고 보면 가히 독보적이었다.
대제국 사하란조차도 이만한 농업도시를 보유하진 못했을 터였다.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도시를 굳이 농업 도시로 발전시킨 결단력부터가 범인은 당최 이해하지 못할 수준으로 놀랍구나!’
과연 내 사위는 대단하다.
자랑거리가 늘어났음에 싱글벙글 미소 짓는 스테임 후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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