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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0화 (155/1,794)

템빨 17권 - 10화

“허억… 허억…”

육체적 한계는 진즉에 찾아왔다.

그럼에도 버티고 또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충의에서였다.

스테임 후작이 적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대처하기까지.

라덴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고자 분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끝났다.

적의 5천 본대를 목도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이 라덴의 지친 몸과 마음을 억눌렀다.

“왕자전하께 예를 갖춰라!”

기세를 잃은 라덴을 손쉽게 제압한 척슬리가 그를 강제로 무릎 꿀렸다.

“크, 크윽…!”

라덴은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에트날 왕가? 미래의 왕?

뭐가 되었든 내 주군의 적일 따름이 아닌가!

“무엄한 놈!”

척슬리가 라덴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그러자 목에 힘을 준 채 간신히 버티던 라덴의 시선이 결국 바닥을 보게 되었다.

그제야 만족한 척슬리가 왕자에게 예를 갖췄다.

“왕자전하를 뵙습니다!”

“여기까지 길을 여느라 고생이 많았소.”

척슬리를 치하한 렌 왕자가 패색에 짓눌린 라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베이다 경과 철풍대를 궤멸시켰다지? 젊은 나이에 훌륭한 실력이야. 북부 최강자는 피닉스라 들었는데 그것도 다 과거의 이야기인가보군.”

“…”

라덴은 대꾸하지 않았다. 척슬리를 비롯한 왕실군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모습이었다.

“놈! 왕자전하께서 친히 치하해주시거늘!”

“영광인 줄 모르고 입을 닫는가!”

“진정들 하라.”

아군의 분노를 잠재운 렌이 북부군을 쭉 살펴보았다.

하나 같이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왕실에 반기를 든 대역죄인들이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죽음을 직감하고 있음이다.

적기라고 판단한 렌이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대들 또한 에트날의 백성이니 왕실의 정통 후계자인 나를 따름이 옳지 않은가. 잘못을 뉘우치고 투항한다면 내 그대들의 죄를 사하고 받아들이겠다.”

결국은 같은 겨레다.

대범하게도 기회를 주는 렌 왕자의 태도가 북부군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살아날 구멍이 생겼으니 수군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때 라덴이 소리쳤다.

“우리의 터전을 지켜준 분은 당신도, 국왕전하도 아닌 스테임 후작각하십니다! 오로지 후작각하 덕분에 우리 북부인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각하께 충성을 맹세한 몸! 하니 당신의 제안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북부는 전란의 땅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와 야만족이 출몰하는 지역으로서 왕실은 진즉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

덕분에 북부인들은 늘 위협에 시달렸고 의지할 곳 없이 절망만을 맛봤다.

그들을 이끈 인물이 바로 스테임 후작이었다.

스테임 후작은 왕실의 지원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았다.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 북부인들을 하나로 뭉쳐 외세로부터 영토를 지키고 안정시켰다.

북부인들에게 있어서 스테임 후작은 영웅이자 은인이었던 것이다.

라덴의 외침을 통해서 그 사실을 상기한 북부군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투항하기는커녕 무기를 거머쥐고 끝까지 저항할 태도를 취했다.

“다 죽어가는 놈이 흥을 깨는가.”

렌 왕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천 병사를 거저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불쾌할 따름이었다.

가식된 태도를 거두고 본성을 드러낸 그가 척슬리에게 명령했다.

“쓸모없는 개 따위 죽여 버리세요.”

“예!”

대답하는 척슬리의 검이 라덴의 목을 겨누었다.

라덴은 후회하지 않았다.

주인을 배신하면서까지 목숨을 구걸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리드 공작각하, 부디 주군을 지켜주소서.’

구국의 영웅.

당신의 힘이라면 이 시련조차도 이겨낼 터.

믿어 의심치 않은 라덴이 눈을 감는 그때였다.

쩌어엉-!!

사막의 태양 아래 작열하는 황금 손.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그것이 5천 군대의 포위망을 꿰뚫고 날아와 라덴을 지켰다.

‘이게 뭐지?’

척슬리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황당할 따름이다.

주인도 없이 홀로 날아온 황금 손이 검을 휘두르다니?

그다지 위협적인 기습은 아니었으나 쾌속은 인정해야한다. 간과할 수 없었다.

“어떤 놈이냐!”

황금 손을 날려버린 척슬리가 소리쳤다.

대답이 들려온 방향은 하늘 위였다.

“공작각하시다.”

“……!”

마치 시라도 읊는 듯이 평온하고 차분한 음성이다.

전장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척슬리와 렌 왕자, 그리도 5천 왕실군을 비롯한 라덴과 북부군의 시선 모두가 하늘 위로 향했다.

그곳에 흑발의 사내가 있었다.

작은 왕관을 머리에 비뚤어지게 얹은 사내.

격조 높은 조화를 이루는 적색 갑주와 칠흑의 부츠를 무장한 그가 전장을 굽어보고 있었다.

“송사리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네. 같잖게.”

오만함이 극의에 이른 표정으로 함부로 지껄이는 사내.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평민 출신으로서 오로지 능력만으로 공작위를 쟁취한 실력자!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전장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리드…!”

“그리드 공작각하!!”

무려 5천이나 되는 왕실군이 단 1명의 사내에게 위축되었고 다 죽어가던 1천의 북부군은 환희했다.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감이었다.

***

신속의 부츠는 경이로운 이동속도를 자랑한다. 스태미나와 내구력이 급속도로 하락한다는 단점을 지녔으나 모든 지형에서 이동속도가 최대 3배까지 상승했다.

사막을 거침없이 질주한 바니바니는 저 멀리 렌 왕자의 본대를 포착할 수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군!’

안도한 바니바니가 시야를 카메라 모드로 전환시킴과 동시였다.

퍼엉-!

“뭣…!”

머리 위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최초에는 거대한 새인 줄 알았으나 시야를 올려 줌인해보니 사람, 그것도 그리드였다.

“저건 타고난 거다!!”

극적인 순간에 등장, 위기에 빠진 북부군을 구원하는 그리드를 영상으로 담으면서 바니바니는 깨달았다.

국가대항전과 라인하르트 골렘침공전 등에서 무수한 활약을 펼쳤던 그리드.

매번 절묘한 순간에 등장함으로서 대중을 환호하게끔 만들었던 그는 타고난 주인공이다.

‘이 사실을 내가 왜 이제야 깨달은 거지?’

그리드는 Satisfy의 다른 유명인들과 달리 안티가 매우 많다.

실력보다는 템빨을 앞세우는 존재였기에 반감을 샀던 까닭이다.

바니바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니바니는 그리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는 영상, 대중들에게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쉽게 말해서 작품성이 없었다.

하여 그리드를 늘 색안경 끼고 보았지만 이젠 달랐다.

지금, 늦게나마 깨달았다.

애초에 템빨은 비하할 요소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신속의 부츠 덕분에 늦지 않게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는가?

템빨은 게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니 템빨을 갖춤 또한 곧 실력이다.

그리드를 색안경 끼고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깨닫고 쓸데없는 아집을 버릴 수 있게 된 바니바니가 영상의 포커스를 그리드에게 맞췄다.

“그리드! 주인공의 활약을 보여줘라!”

당신의 영상, 전 세계인들이 몇 번이나 돌려보며 환호하게끔 만들어 보이겠다.

***

<대영주의 검>

최고의 영주들에게만 지급되는 진귀한 보검으로서 대상 인물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대상 인물이란 한 명으로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시에 여러 명을 관찰하는 일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그리드는 비상식적으로 높은 통찰력을 보유하고 있는 바.

대영주의 검에 귀속 된 <캐릭터 관찰>스킬의 위력을 통찰력을 토대로 한층 더 증폭시켰다.

덕분에 그리드는 전장의 모든 인물들의 정보를 동시다발적으로 시야에 띄울 수 있었다.

대신 지극히 간략한 정보였다.

이름:척슬리 로칸

레벨:313

이름:페럴 샤에바 드 번

레벨:305

이름:앙드

레벨:301

..

왕실군의 기사들을 비롯하여,

이름:라덴

레벨:258

..

북부의 기사들.

또한 왕실군과 북부군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그들 전원의 이름과 레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탯과 스킬, 그리고 스토리 등을 비롯한 상세 정보의 확인은 불가능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다.

‘평균 레벨이 130이라… 의외로 높군.’

북부군 병사들의 평균 레벨은 110인 반면 왕실군 병사들의 평균 레벨은 그보다 20 이상 높았다.

몇 달 전 봤던 윈스톤 병사들의 레벨이 아직 100도 안 됐던 점을 감안해봤을 때 왕실군 병사들의 레벨은 평균치를 가뿐히 상회하는 것일 터였다.

한 마디로 왕국의 정예다.

‘하지만 그래봤자.’

레이단의 병사들보다는 못하다.

레이단 병사들의 현재 평균 레벨은 무려 148이었고 또한.

‘오늘 160을 찍게 될 테니까!’

씨익!

참으로 음흉한 미소다. 왕실군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대영주의 검을 해제한 그리드가 <브라함의 부츠>를 <그리드의 부츠>로 스왑했다.

[마법 플라이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플라이 마법의 발동이 정지됩니다.]

[추락합니다.]

콰앙!!

그리드의 부츠는 높은 무게감을 자랑하는 바.

사막 위로 낙하한 그리드를 중심으로 모래가 비산하였고 뿌연 흙먼지가 발생했다.

“그, 그리드 공작각하!”

라덴은 당혹스러웠다.

하늘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스스로 버리고 적진 한가운데로 떨어지다니?

그로서는 그리드의 판단능력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이없어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타박을 주었다.

“너 진짜 약하다.”

“…예?”

“내가 너 허풍이나 칠 때부터 알아봤어. 허풍쟁이치고 제대로 된 인물이 없지.”

그리드가 라덴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는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처음 만났던 날.

라덴은 아이린의 침실에 웬 쥐새끼가 숨어있다면서 나댔었다. 하지만 결과는? 쥐새끼는 개뿔, 파리 한 마리도 숨어있지 않았었다.

둘째는 레벨.

왕실군 기사들의 레벨이 최소 300을 넘는 반면 라덴의 레벨은 258에 불과했다. 남들 다 열심히 사냥할 때 라덴은 혼자서 놀고 다녔다는 뜻이다.

셋째는 결과.

왕실군 기사들과 병사들은 죄다 멀쩡한 반면 라덴과 북부군은 죄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수적 열세가 크다지만 이런 일방적인 결과는 무력함을 증명할 뿐이다.

“쯧쯧… 장인어른께서 왜 너를 높이 평가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윽…”

재차 심한 소리를 듣는 라덴의 심장에 비수가 꽂혔다.

‘공작각하의 말씀이 사실이다. 난 너무 약하고 쓸모없어.’

라덴이 자괴감에 빠졌다. 주군께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한편 왕실군은 경악하고 있었다.

‘베이다님과 철풍대를 해치우고.’

‘척슬리 단장님의 검을 몇 번이나 방어한 실력자를.’

‘약하다고 비하하다니?’

그리드가 보는 강함의 척도는 우리와 많이 다른 듯하다.

하긴, 애초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드는 구국의 영웅.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에서 압도적인 신위를 이미 선보인 바 있다.

범인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5천의 군세가 위축되는 그때였다.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다니, 상황 파악을 못하는가보오.”

척슬리 단장이 그리드에게 검을 겨눴다. 그의 기세는 당당했다.

검호.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존재이니만큼 상대가 그리드일지언정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당시 나는 다소 부족했었지. 멀리서 활약하는 당신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이후 나는 피나는 노력을 하였고, 당시의 당신과도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척슬리가 검을 날렸다.

직선으로 꽂히는 쾌검에 흠잡을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야말로 날렵하고 정교한 일격이었다.

어느덧 상당한 거리를 좁혀온 채 영상을 찍고 있던 바니바니가 질색했다.

‘너무 빠르다!’

저건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리드가 적에게 먼저 선공의 기회를 준 것이 문제다.

바니바니는 그리드가 우선 한 대 맞고 시작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쩌어엉-!

허공에 생성 된 칠흑의 아공간으로부터 솟아난 혈빛의 마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 대신 그 유려한 장검을 무장한 그리드의 공격속도가 척슬리의 쾌검을 넘어섰다.

‘빠르다!’

선공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빠르기가 아닌가!

공격이 차단당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척슬리에게 그리드가 조소를 보냈다.

“바보냐? 네가 강해지는 동안 나는 뭐 놀고 있었을 줄 알아? 네가 강해진 것 이상으로 나는 더 강해졌지, 이 듣보잡아.”

“듣보잡?”

무슨 뜻이지?

의아해하는 척슬리에게 그리드의 맹공이 쏟아졌다.

반복적인 사용과 분해, 그리고 조립의 과정을 거쳐서 이해도를 100퍼센트까지 끌어올린 이야루그트가 토해내는 기성이 전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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