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8권 - 19화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지존을 꿈꾸지만, 그들 중 태반은 재능과 환경적 한계에 좌절하고 꿈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드 또한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노력 끝에 기회를 쟁취하였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지금까지 쭉 최고가 되고자 애써왔다.
최초에는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서, 다음에는 과시하고 싶어서, 또 다음에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싶어서.
그리고 이제는 이루어놓은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명예를 위해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보다 올곧은 방향으로 열망을 정제해왔다.
지금의 그가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외면하는 일, 결코 있을 수 없었다.
“로그인.”
***
번헨 열도, 마흔 번째 섬.
블루 코코넛을 음미하고 있던 스틱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엔 빨리 돌아오셨군요?”
그의 뒤편으로 나타난 그리드가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인스턴트 던… 아니, 이곳 번헨 열도처럼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장소에 강제로 입장할 수 있는 방법, 혹시 없을까?”
없다.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할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스틱세이.
그는 남들보다 높은 지식과 지혜를 쌓았으므로 현자라 불리는 존재였으니까.
과연 스틱세이는 그리드의 기대에 부응해주었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1년에 최대 두 번만 시도해볼 수 있죠.”
“나를 위해서 시도해줄 수 없을까?”
“…사정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리드는 생명의 은인인 바, 스틱세이는 무한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도 모른 채 무턱대고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켜주고 싶은 이들이 있다.”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 그리드.
그의 눈빛은 깊고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틱세이는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우선 이곳을 나가야겠군요.”
스틱세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염 된 번헨 열도의 정화?
그리드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와서 진행하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드가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
뱀파이어 도시 원정대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폰, 레가스, 페이커, 지슈카, 유라, 후로이, 극검, 반트너, 토반, 제드노스, 이벨린, 툰.
템빨단 최정예인 것이다.
엘핀스톤을 레이드한 이후 지금까지, 10번대 뱀파이어 도시들을 전전하며 성장해온 그들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리드가 조심하라 일러주었던 마리로즈를 제외하면, 본인들이 레이드하지 못할 뱀파이어는 없으리란 확신을 가질 정도로.
하여 9번 도시에 당당히 도전한 그들은 지금 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이 나이에 미아가 되다니.”
9번 도시는 하나의 성이었다.
에트날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레이단 영주성보다 몇 배나 더 큰 규모의 고성.
온갖 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복도는 마치 미로 같아서, 템빨단원들은 의도치 않게 흩어지게 되었다.
“까~꿍.”
일행과 떨어지게 된 폰과 반트너.
기둥 숲 사이에 숨어있는 그들의 등 뒤로 장난기 가득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폰과 반트너가 무기를 휘둘렀지만 괜한 기둥을 때리고 손목에 통증을 느낄 뿐이었다.
“아오! 저 얄미운 년!”
열 뻗친 반트너의 대머리가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문어 같았기에 폰이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반트너의 머리가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이 상황에 웃기냐!”
“네가 거울을 봐. 안 웃고는 못 배길 거다.”
“이런 개자식이!!”
폰과 반트너는 여전히 앙숙이었다.
흥분한 반트너가 폰의 멱살을 붙잡는 그때였다.
“오빠들끼리만 놀면 내가 심심하잖아.”
앞서선 기둥 뒤편에서 들려왔던 여성의 장난기 가득한 음성이 이번엔 천장에서부터 들려왔다.
폰은 멱살을 붙잡힌 채로도 창을 위로 찔렀고, 반트너는 폰의 멱살을 풀면서 도끼를 거머쥐었다.
그들의 사이로, 뱀파이어 남작 란이 뛰어내렸다.
푸푹!!
높은 민첩성과 은신능력이 장기인 란의 날카로운 손톱이 두 사내의 가슴에 상처를 아로새겼다.
“큭…!”
“아오!!”
반격을 가하려다가 실패한 폰과 반트너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호호홋~ 시시한 오빠들이네.”
조롱한 란이 또 한 번 어둠 속으로 숨어들자 반트너가 씩씩거렸다.
“저 계집앤 페이커랑 매칭됐어야하는 거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페이커만 있었으면 쉽게 잡았을 텐데, 하필이면 너 같은 둔탱이랑 따로 떨어져서 이게 뭔 고생인지 모르겠군.”
“내가 할 소리다, 이 새끼야!!”
팀워크가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났다.
란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세워진 기둥들 사이사이로 메아리쳤다.
***
“장난감처럼 작은 단도 따위에 이 몸이 상처 하나 입을 것 같은가?”
고성 1층의 대형 홀.
함정에 휩쓸린 일행들과 떨어지게 된 페이커가 홀로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었다.
뱀파이어답지 않게 갑옷을 무장하고 대형무기를 다루는 놈의 이름, 마운틴이었다. 남작급 뱀파이어인 놈의 체구는 이름처럼 엄청 컸다. 키만 봐도 족히 3미터가 넘었다.
‘단단하군.’
투척 스킬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방어력이 높다.
포커페이스 페이커의 얼굴에 드물게 긴장감이 떠올랐다.
***
“이거 최악이네.”
고성 1층 북쪽의 복도.
엄폐물 하나 없이 탁 트인 그곳 중앙에 지슈카와 제드노스가 고립되어 있었다.
복도 양측에서부터 몰려오는 뱀파이어 대군이 둘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쟤들 접근 허용했다간 답도 없어.”
“알죠.”
궁사 지슈카와 마법사 제드노스.
이들은 전투계열 직업군 중 가장 접근전에 취약했다.
뱀파이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복도 반대편으로 화살과 마법을 난무해보지만…
“인간 따위가!”
성난 뱀파이어들의 숫자가 도통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놈들을 확인한 제드노스가 혀를 내둘렀다.
“10번대 도시의 뱀파이어들보다 평균 레벨이 20은 높아 보이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절망하는 두 사람이었다.
***
“다들 무사할까?”
레가스, 후로이, 극검, 반트너, 이벨린, 툰.
파티의 선두에 섰다가 <텔레포트 발동 함정>을 밟고 2층으로 떨어진 그들의 근심이 가득했다.
1층에 남겨진 동료들이 무사한지 확인이 불가능했던 까닭이다.
“위치랑 생명력 파악이 안 되네.”
“그 인원으론 위험할 것 같은데.”
“아니, 레가스. 그러니까 페이커를 맨 앞에 세우자고 했잖아. 너는 수색능력도 없으면서 뭘 믿고 앞장 선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의욕이 너무 앞서서 그만.”
“누구 탓할 시간에 어서 1층으로 내려가자.”
극검.
평소에는 푼수 같은 면이 있지만 50대 길드에 당당히 들었던 은기사 길드 마스터 출신이다.
진지할 때의 그는 높은 통솔력과 상황판단능력을 발휘했다.
다른 동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군말 않고 극검의 뒤를 따랐다.
한데 1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에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3마리의 남작급 뱀파이어들이었다.
“…여기 엄청난데.”
10번대 도시들에선 남작급 뱀파이어들이 중간 보스급으로 한두 마리 등장한 게 전부였다.
한데 이곳 9번 도시는 남작급 뱀파이어들이 바글거리고 있었으니 난감하고 황당할 따름이다.
“발검, 섬.”
서걱-!
극검의 선공으로 전투가 개시됐다.
***
데빌 슬레이어, 유라.
그녀의 레벨은 어느덧 247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반인은 2년이 걸려도 못 올릴 레벨을 불과 7개월 만에 올린 것이다.
통합랭킹 5위 출신의 노하우와 레전드리 클래스, 그리고 뱀파이어 도시라는 최상의 사냥터가 부합 된 결과였다.
지금의 유라는 템빨단의 주력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자작급 뱀파이어를 홀로 상대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이제 한계인가 보지?”
남작급 뱀파이어보다 월등히 강력한 귀족.
자작, 티라멧이 무릎 꿇은 유라를 굽어본다.
넘쳐흐르는 마력과 무한한 체력을 보유한 그의 얼굴은 오만으로 물들어 있었다.
“더러운 총알을 쏘기에 조금 긴장하였건만, 시시하군. 당대의 데빌 슬레이어는 고작 이 정도인가.”
조소 짓는 티라멧에게 유라가 질문했다.
“전대의 데빌 슬레이어를 알고 있다는 말투이군요?”
“모를 리가 없지.”
티라멧이 늘어뜨린 은발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드러난 이마엔 깊은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내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혔던 놈이니까.”
살기가 피어오른다.
과거를 떠올린 티라멧의 적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싹수 노란 계집. 오늘 내 너를 철저히 짓밟아주마.”
퍼엉!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그렇듯, 티라멧 또한 마법과 육탄전 전부에 능했다.
마법으로 의식을 빼앗고 물리공격으로 마무리 짓는 전투 스타일을 구사했다.
“같은 수에 또 당하진 않아요.”
정화탄을 쏘아 마법을 상쇄시킨 유라가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이어서 날아오는 발차기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그녀가 또 한 번 총을 쐈다.
타앙-!
명중이다.
티아멧의 미간에 정화탄이 정확하게 꽂혔다. 엄청난 사격 솜씨였다.
하지만 유라의 안색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247레벨에 불과한 그녀가 360레벨 이상의 네임드 보스에게 큰 타격을 입힐 리 만무하였으니까.
“큭…! 계집!!”
데빌 슬레이어의 공격은 마족에게 치명적인 독이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심하다한들 큰 고통을 느낀 티라멧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퍼엉! 퍼엉!!
콰앙-!!
양손을 휘두를 때마다 쏘아지는 칠흑의 마력이 유라의 행동을 제약시켰고,
“부셔주마!!”
전투를 완벽하게 설계하였다고 자부한 티라멧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전광석화처럼 날아간 그의 발차기가 유라의 작은 얼굴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뻐억-!!
경쾌한 타격음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티라멧은 연약한 인간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라고 확신했다.
“큭큭…! 응?”
뇌수를 쏟아내며 죽어갈 인간 계집의 모습을 상상하고 웃던 티라멧.
그가 의문에 휩싸였다.
‘이게 뭐지?’
내 다리와 맞물려 있는 이 황금 방패,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나타난 것인가?
‘이 계집이 무슨 수작을…!’
경계한 티라멧이 뒤로 물러서는 그 순간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대전 바깥에서부터 흑청색 검기 폭풍이 날아와 티라멧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전개한 티라멧이 경악했다.
‘강하다…!’
방어가 불가능한 수준의 공격력이다.
뒷걸음치는 티라멧의 전신이 금세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웬 놈이냐!!”
검기의 폭풍이 끝난 직후, 격분한 티라멧이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대전 바깥을 노리고 마법을 전개하려던 그가 멈칫했다.
어느덧 날아온 4개의 황금 손이 내 팔과 다리를 구속하였기에!
“이게 무슨…!”
티라멧이 황금 손들을 떨쳐내고자 몸부림쳤다. 하지만 썩 쉬운 일은 아니었다. 힘에선 자신이 월등히 앞섰으나 손들의 손가락 놀림이 뭔가 절묘해서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때 보인 몇 초의 빈틈이 문제였다.
어느덧 그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신형이 날아들고 있었다.
안대너머 적안을 번뜩이는 흑발의 인간,
“파그마의 검무.”
그리드였다.
“연살(聯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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