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8화
“내 부하 중 하나가 우연히 너를 사냥터에서 보았는데… 그때 네가 사용하던 무기가 그리드의 무기 중 하나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고 하던데?”
<그리드의 대검>을 말하는 것일 터다.
사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는 긴장할 법도 하건만 태연히 응수했다.
“난 또 뭐라고.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아이템이 어디 한두 개인가?”
콧방귀 뀐 크리스가 그대로 장내를 떠나려했지만, 지발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너답지 않구나, 크리스. 너의 원래 성격이라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불 같이 화를 내야 정상 아니냐? 근데 그저 웃어넘긴다는 것, 내가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라 찔려서일 테지?”
“사람이 신사적으로 응수하니까 만만해 보이나보군.”
꽈악!!
크리스가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와 있는 지발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스탯 노가다를 밥 먹듯이 해온 그리드보다도 근력이 높은 크리스였기에, 지발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약한 소녀처럼 움츠러들어야 했다.
“근거 없는 심증만으로 사람 몰아붙이지 마라.”
크리스가 사늘히 뱉었다.
이곳에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위축되기는커녕 당당했다.
과연 통합랭킹 3위다운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는 지발이다.
비록 어떤 미친 농부에겐 호미 한 방에 살해당한 전력이 있다지만, 유저들 사이에서 그의 강함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크리스가 아무리 높은 카리스마를 보여 봤자 지발에겐 그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렇게 당당하다면, 네 무기의 상세 정보를 우리에게 공유하는 게 어떻겠나?”
씨익.
표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지발이었다.
이 상황에서 지발이 잃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크리스가 무기의 정보를 공개해서 그리드와 관련이 있음이 증명된다면 크리스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그리드와 관련이 없음이 증명된다면 사과함으로서 일을 무마시키면 됐다.
잠시 움찔하는가 싶던 크리스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제발 지랄 좀 작작해라, 지발. 세상에 어떤 머저리가 자신의 아이템 정보를 함부로 공개하겠나?”
아이템의 기능은 그 사람의 강점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고, 늘 변수를 만든다.
무기 정보를 공개한다는 것,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7대 길드의 수장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지발이 억지를 부린다고 느꼈다.
“지발, 좀 적당히 해. 안 그래도 템빨단과 블러드 카니발 때문에 골치 아픈 와중에 괜한 적까지 만들 생각하지 마.”
“그래, 왜 갑자기 생뚱맞게 크리스한테 그러는 거야?”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 크리스가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그리드와 같은 무기를 쓸 수도 있다지 않냐.”
골든 길드의 마스터 수에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투 특화 유니크 클래스, 영혼 약탈자.
레이단 침공전에서는 기간제 농부라는 자에게 패배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수에론은 아직 본인의 클래스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지금의 수에론은 기간제 농부뿐 아니라 정규직 농부와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연합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놈을 순순히 돌려보내고 싶진 않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 수에론이 <흉악한 총명검>을 뽑아 쥐었다.
기간제 농부에게 패배한 이후, 홧김에 천만이 넘는 골드를 투자하여 +9까지 강화시킨 지존급 무기였다.
덕분에 가계에 제법 타격을 입었지만, 수에론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만큼 +9와 +8무기의 격차는 컸다.
“이봐, 크리스. 당당하다면 무기를 꺼내보라고.”
수에론은 랭킹 1위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그가 경쟁 상대를 척살할 기회를 놓치고 싶을 리 만무했다.
“순순히 말해선 꺼낼 생각이 없나봐? 그렇다면 꺼낼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주마.”
파파파팟!!
수에론의 좌우 허공으로 네 자루의 옥빛 창이 떠올랐다.
인간, 혹은 몬스터의 영혼을 매개로 소환하는 <영혼 창>의 발현이었다.
지속적인 사냥을 통해서 최대치의 영혼을 축적시켜놓은 지금의 수에론은 컨디션이 최고조였다.
퍼퍼퍼펑!!
네 자루 영혼 창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근력에 대부분의 스탯을 투자한 탓에 민첩성이 낮은 크리스가 대처하기엔 무척이나 빠른 공격이었다.
푸푹!!
두 개의 창이 크리스의 몸을 꿰뚫었다.
수에론은 이미 크리스에게 접근, <영혼 족쇄>로 포박을 시도함과 동시에 흉악한 총명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여기서 크리스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리드의 대검>을 꺼내 이 빌어먹을 미친놈을 베어버리느냐, 아니면 세컨드 무기를 꺼내서 이대로 수세에 몰리느냐.
‘당할 수밖에 없나.’
크리스는 자신과 그리드가 한 통속이라는 누명을 심화시킬 생각이 없었다.
혹 이들과 적대시하게 되었다간, 자신의 길드원들이 피해를 입게 될 터였기에.
결국 크리스가 세컨드 무기를 꺼내 들었다.
쩌정!
“호오.”
수에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무기를 꺼냄과 동시에 영혼 족쇄를 쳐내고, 그대로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크리스의 대검술에 경탄한 것이다.
‘소문보다 더 대단한 컨트롤 솜씨군.’
느리되 효율적인 움직임이다. 최소한의 행동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낸다.
크리스의 대검술은 진심으로 뛰어났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다.
지이잉-
크리스의 대검과 맞물려있던 수에론의 검이 <영혼 전이>의 효과로 강화됐다.
그 순간,
쩌엉!!
“큭…!”
크리스의 근력이 무의미해졌다.
무기의 공격력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천하의 크리스가 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 게임은 템빨이다. 다시금 실감하면서 크리스가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의 머리 위로 <영혼 화살> 수십 발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직감했다.
‘콤보에 당한다!’
시간 차 없는 연속 공격에 적중당할 경우 상태이상 경직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그리고 최상위 랭커들은 그 찰나의 경직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을만한 컨트롤 실력이 몸에 배어있었다.
이를 악 물며 고통에 대비하는 크리스.
그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지는 영혼 화살들을 갑자기 날아온 쇠사슬이 파쇄시켰다.
전투의 귀재, 하오의 개입이었다.
“수에론, 제멋대로 구는 것도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라.”
세상에 미친놈은 많다.
수에론처럼 대책 없이 싸움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정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크리스 같은 거물을 굳이 적으로 삼으려하는 지발과 수에론이 하오는 못마땅하고 이해도 안 됐다.
“이봐, 하오. 어떻게 봐도 크리스가 의심스러운 상황 아니냐? 저 자식이 꺼낸 무기 좀 보라고. 완전히 쓰레기잖아! 저게 저놈의 진짜 무기일 거라고 생각해? 저놈은 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만약 크리스의 무기와 그리드의 무기가 똑같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한 통속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되나?”
“…”
하오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자 수에론이 입을 다물었다. 부바트 또한 하오를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분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게 된 수에론이 크리스에게 악수를 건넸다.
“장난 좀 쳐본 거다. 국가대항전에 앞서서 서로의 실력을 체험해보는 일, 나쁘지 않잖아? 오히려 이득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수에론.
지금의 그는 크리스를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자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렇게 판단했다.
아주 짧은 전투였지만, 수에론이 크리스를 완벽하게 압도하였음은 사실이니까.
“…더 이상 용건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다.”
크리스가 순순히 물러났다.
마치 꼬리를 내린 개 같은 모습이었다.
“고작 저 정도가 랭킹 3위라니, 한심하군.”
패기를 잃은 크리스를 하찮게 여기며 비웃는 수에론.
그를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크리스가 실력을 숨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욕할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
그리고 최고의 무대는, 당장 40일 앞으로 다가온 국가대항전이다.
장내를 빠져나온 크리스의 눈빛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웨폰 마스터리.
‘그 어떤 무기를 장착하든’ 추가 공격력을 부여해주는 최강의 마스터리 스킬이다.
하지만 물론 만능은 아니었다.
웨폰 마스터리가 상승시켜주는 공격력은 한 개의 무기에만 최적화 된 마스터리 스킬들과 비교하면 꽤 낮았으니까.
그렇기에 그리드는 보우 마스터리의 레벨에 집착하고 있었다.
웨폰 마스터리가 올려주는 추가 공격력이 10퍼센트, 보우 마스터리가 올려주는 추가 공격력이 11퍼센트일 경우, 그리드가 활을 장착하였을 때 누릴 수 있는 효과는 웨폰 마스터리가 아닌 보우 마스터리다.
즉, 그리드가 훗날 웨폰 마스터리를 익히게 되더라도 보우 마스터리는 끝까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이템에 마스터리류 스킬의 경험치를 빨리 올려주는 옵션을 부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지만 연금술 시설을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연금술 시설에서 부여하는 옵션은 워낙 다양한데다가 랜덤이었고, 성공 확률도 낮았으니 의지할 수가 없었다.
“칸.”
이런 상황에서 그리드가 조언을 들을만한 상대는 역시 칸뿐이었다.
칸의 현재 대장장이 레벨은 고급 8 직전.
일신의 능력이 뛰어날뿐더러 그리드보다 수십 년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해왔기에 지식적인 측면도 방대했다.
“마스터리 스킬의 경험치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아이템에 대해서 혹시 들어본 적 없어요?”
“흐음…”
칸의 가문은 대대로 대장장이를 생업으로 삼아왔다. 조상 중에는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에게 영감을 줬던 장인, 알바티노가 있었을 정도다.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지식의 편린들을 뒤져보던 칸이 결국 난색을 표했다.
“미안하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구먼…”
늘 그리드에게 도움을 받아왔던 칸이다. 기회만 된다면 그리드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가 필요로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자 의기소침해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던 그가 문득 묘안을 떠올렸다.
“혹시 피아로님께 여쭤보면 어떻겠는가?”
“피아로에게요?”
“그래, 그분이라면 무기술을 보다 효율적으로 단련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게 아닌가? 자네라면 그 방법을 듣고 필시 아이템 제작에 접목시킬 수 있으리라 보네.”
무한한 호감도의 위력이다.
칸은 그리드에게 천금과도 같은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그리드가 기뻐서는 칸을 와락 껴안았다.
“고맙수!”
“하하! 도움이 된다면 기쁠 따름일세!”
툭하면 포옹을 나누는 두 사내의 모습, 레이단의 대장장이들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대장장이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거나 시선을 회피하는 등 그리드와 칸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반면 로드는 충격을 받고 있었다.
“아부부…?”
대장간 구석에서 망치질에 열중하고 있던 로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더니 기쁘고 반가워서 아장아장 걸어왔던 녀석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연신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째서 엄마가 아닌 다른 남성과 포옹을 나누는 것인지, 로드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혼란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칸이 속삭였다.
“저게 바로 사내간의 우정이란 것이다.”
“우죠…”
우정이란 단어의 울림이 무척 듣기 좋다.
로드는 다짐했다.
언젠간 자신도 멋진 친구를 찾아 사귀겠노라고.
훗날의 로드가 최강의 동료들을 거느리게 된 계기가 바로 이날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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