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9권 - 23화
‘파그마가 만든 놀이터라고?’
이곳 번헨 열도, 명예의 전당이라 불리며 예전부터 존재해왔다지 않았는가?
파그마가 만들었다기엔 시기적으로 맞질 않는다.
‘설마.’
<오염 된> 번헨 열도를 만든 게 파그마라는 뜻인가?
‘즉, 번헨 열도를 오염시킨 인물이 파그마다?’
브라함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파그마란 늘 찜찜한 구석이 있다.
브라함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잖은 호감을 품고 있는 그리드의 입장에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또 영혼을 받아들이라는 건 무슨 소리지? 당신, 본래의 육신을 되찾는 일에 실패한 거야?”
아니, 왜?
혼의 그릇만 만들어주면 부활은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더니?
쩌정! 쩡!!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이에도 골든 크라운들의 맹공은 계속되고 있었다.
네 마리 골든 크라운들이 번갈아가면서 휘두르는 몽둥이, 갓 핸드에 의지한 그리드라도 대응하기가 썩 쉽지 않았다.
현재 갓 핸드의 소드 마스터리 레벨로는 무려 380레벨에 달하는 골든 크라운의 신묘한 움직임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고전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말했다.
[골든 크라운은 다른 몬스터를 숙주로 삼아 기생한다. 숙주로 삼은 몸을 제어함에 있어서 한도를 두지 않기 때문에 전반적인 능력치가 동급 다른 몬스터보다 월등히 높아. 현재 네 실력으로는 압도하기가 쉽지 않을 게다. 그러니까 어서 내 영혼을 받아들여라.]
“다짜고짜 그렇게 말해봤자 내가 넙죽 아이고, 예, 하겠느냐고. 그리고 자꾸 일방적으로 말하지 말고 사람 질문에 대답 좀 해주지 그래?”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였을 당시, 그리드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쏟아지는 거만한 중2병 멘트들에 큰 고통을 받았었다. 또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원치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몸을 타인이 조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기도 했고.
퍼엉!!
파그마의 검무, 제(制)로 골든 크라운들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제약한 그리드.
한 마리 골든 크라운의 왕관을 대검으로 베어 넘김과 동시에, 반대편에 서있는 골든 크라운의 왕관을 노리고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에 왕관을 꿰뚫린 골든 크라운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기세는 죽지 않았다.
“캬가가가각!!”
“윽!”
과연 브라함의 말대로다.
골든 크라운은 숙주로 삼은 몬스터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육과 관절이 파손될지언정 신경 쓰지 않고 한계를 돌파하는 움직임을 연달아 선보였다. 팔을 선풍기처럼 회전시키면서 몽둥이를 휘둘러대니 미칠 노릇이다. 부러진 팔꿈치 사이로 튀어나온 뼈까지 무기로 활용하는 놈들, 그리드를 여러모로 난처하게 만들었다.
[네가 품은 사소한 의문들, 나를 받아들인다면 자연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시답잖은 위기 또한 손쉽게 극복할 수 있겠지.]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전설의 대마법사>
★히든 퀘스트★
브라함은 본래의 육신을 되찾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소진한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한 공간에 머물기 바라며, 그 공간으로서 당신의 육신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일 경우 당신은 강력한 힘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퀘스트 수락 보상:브라함과의 호감도 50퍼센트로 상승.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 <전설의 대마법사> 획득.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라고?’
그리드의 뇌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안 그래도 얻기 힘든 세컨드 클래스를 무려 레전드리 등급으로 얻을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또 있을까?
‘이게 꿈이야, 생시야?’
최초의 세컨드 클래스 전직자 후로이가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한 플레이어의 숫자는 채 100명도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심지어 그들 중 태반이 노멀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를 얻었을 뿐, 상위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를 얻은 플레이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레전드리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란, 존재하는지도 모를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마법사가 되는 건가…!’
전율하는 그리드.
그에게 내내 잠자코 있던 스틱세이가 주의를 주었다.
“그리드님,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브라함의 실체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입니다. 그것도 베리아체의 아홉 직계 중 하나이지요. 다른 전설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로서 경계함이 옳으니, 결코 저자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골든 크라운에게 숙주로 삼아진 몬스터들과 같은 꼴을 당하실 수도 있어요.”
신신당부하는 스틱세이다.
그를 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곱지 못했다.
“내가 골든 크라운에게 당하고 있는 동안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던 양반이 이제와 걱정하듯 말해봤자 별 공감이 안 되는데.”
이제는 그리드 또한 브라함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브라함은 자신에게 도움이 된 존재였던 까닭에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면 또 어떤가?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에게 편견을 갖기엔, 그리드가 그간 겪어온 일들이 너무 많았다.
스틱세이가 당황했다.
“제가 현자라고 불린다고는 하나 만물의 이치를 전부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골든 크라운이라는 몬스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하여 당신께 조언을 해드릴 수 없었던 것이지 악의적으로 당신을 방관했던 게 아닙니다.”
“그렇게 정색할 건 없어. 딱히 당신을 매도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리드는 더 이상 스틱세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노에와 랜디를 소환, 골든 크라운들과 맞수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오로지 브라함의 영혼만을 주시했다.
“브라함, 내가 당신의 영혼을 받아들일 경우 나는 또 저번처럼 당신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넘겨야하나?”
만약 그렇다면, 제아무리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가 탐나더라도 이 히든 퀘스트를 섣불리 수락할 수 없다.
과거에 봤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중한 그리드.
그를 보면서 내심 감탄한 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니, 네가 나를 받아들일지언정 너의 육체는 순전히 네 것이다. 네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내가 네 육체의 주도권을 가질 일은 없다.]
“정신적인 교감은?”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였을 당시 그리드는 브라함과 생각을 일부 공유하였고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신비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꾸준히 지속하기엔 여러모로 껄끄러울 터였다. 브라함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는 지금, 적정한 선은 긋는 것이 옳았다.
[지금의 나는 아주 미약하다. 너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다가는 내가 네게 영향을 받고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 교감은… 내가 너의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올 경우가 아닌 이상 없을 것이다.]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미소지은 그리드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내게 머무는 기간은?”
[최소 1년.]
“확실히 대답해야지. 최대 몇 년?”
[…4년이다.]
1년에서 4년.
그리드가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를 보유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뜻이며, 당연히 Satisfy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드는 다소 아쉬웠다.
‘너무 짧은데.’
기껏 얻게 된 힘을 어느 날 갑자기 허상처럼 잃게 된다면, 그 허무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일 수가 있다.
완전히 갖지 못할 힘이라면 애초에 외면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고민하는 그리드의 마음을 읽은 브라함이 구미가 당기는 말을 했다.
[네가 나를 품고 있는 동안 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보느냐? 너는 나로부터 온갖 마법과 지혜를 터득할 수 있게 될 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일 텐데?]
“…좋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그리드는 판단을 내렸다. 스틱세이가 말려보지만 부질없었다.
“그리드님, 상대는 극악무도하며 도의를 모르는 마족…!”
“마족이고 나발이고 관계없어. 나는 강해지고 싶을 뿐이야.”
그리드가 남부럽지 않은 돈을 벌게 되고서도 여전히 Satisfy에 열중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입증하기 위함이다.
무시와 멸시만 당해왔던 과거와 보다 더 멀어지기 위해서, 그리드는 더욱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당면한 목표는 국가대항전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
그리드는 다시 한 번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특히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크라우젤이라는 산을 반드시 넘어야만 했다.
“브라함, 나는 당신의 영혼을 받아들이겠다.”
[현명한 선택이다.]
번쩍!
빛을 잃어가던 브라함의 영혼이 그리드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내 빛에 휩싸이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브라함의 영혼과 하나가 됩니다.]
[세컨드 클래스 <전설의 대마법사>를 획득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더블 레전드리 클래스를 달성하였습니다!!]
[실로 위대한 업적입니다!! <신화를 엿보는 자>칭호를 획득합니다!!]
<신화를 엿보는 자>
당신의 클래스 등급을 <신화>로 상승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입니다.
칭호 자체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신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알고 있다.
Satisfy 세계관에서 최고로 치는 등급은 전설이 아닌 신화라는 사실 말이다.
그건 레베카교의 3대 신기를 비롯한 온갖 아이템 등이 신화 등급으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신화 등급, 플레이어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는 것을.
‘라우엘이라도 몰랐을 걸.’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 앞서가는 기분이라 성취감이 대단하다.
흥분하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는 계속해서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브라함의 마법 전부를 습득합니다.]
[지력이 낮아서 실패합니다!]
[브라함의 마법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지력을 올려야합니다.]
[브라함의 영혼에게 꾸준한 마력을 제공,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력을 올려야합니다.]
[앞으로 레벨이 오를 때마다 6개의 스탯 포인트가 지력에 강제적으로 투자됩니다.]
[스킬 <동화>가 생성됩니다.]
<동화>
당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브라함의 의식을 일깨우고 하나가 됩니다.
이때 클래스가 <대마법사>로 전환되며 육체의 주도권이 브라함에게 넘어갑니다.
스킬 지속 시간:3분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일
“…?”
무려 레전드리 등급의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하였건만, 결과적으로는 썩 좋아보이질 않는다?
아니, 좋아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
구리다.
레벨을 올릴 때마다 획득하는 10개의 스탯 포인트.
그중 6개가 강제적으로 지력에 투자된다니?
그리드는 절로 욕이 나왔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그에게 스틱세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브라함에게 뭔가 속으신 겁니까? 그러게 마족이란 상종해선 안 될 족속입니다.”
“…”
세계의 균형을 지키고자 살아가는 엘프와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마족의 상성은 당연히 최악이다.
브라함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스틱세이의 계속되는 발언을 그리드는 묵살했다.
‘명백히 말하면 속은 건 아니지.’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일 경우 내가 어떤 페널티를 받게 될지, 미리 물어보지 않은 스스로가 잘못이다.
‘이미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면서 레벨이 1로 다운되는 엿 같은 경험을 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를 얻는데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은 스스로가 한심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자책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브라함 당신의 힘을 테스트 해봐야겠어.”
쉰한 번째 섬의 미션 클리어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8분 35초.
그 안에 10마리 골든 크라운을 사냥해야만 한다.
설령 노에와 랜디를 소환할지라도, 그리드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이 출동하면 어떨까?
“동화.”
스르륵-
그리드의 넓은 어깨와 두꺼운 팔뚝이 차츰 가녀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턱 선이 가늘어졌고 흑단 같던 머리카락이 눈처럼 흰색으로 물들었다.
“…큭큭큭, 개만도 못한 잡것들. 이 섬과 함께 통째로 불태워주마.”
홍옥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미소 짓는 그리드,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일본에 제5한류 열풍을 불러일으킨 백발 버전 그리드였다.
그 위용은 실로…
“파이어 볼.”
[지력이 낮아서 마법이 발현되지 않습니다.]
“…”
그리드가 브라함의 영혼을 처음 받아들였을 당시, 브라함의 영혼은 충만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제발, 좀.’
이제는 히든 퀘스트의 보상마저도 내 뒤통수를 후려치다니, 그리드는 그저 울고 싶을 따름이었다. 여러모로 후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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