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4화
“그리드? 최근의 그는 필시 성장했지요. 에트날 내전 영상을 봤을 때는 솔직히 감동했을 정도입니다.”
Satisfy 최강국, U.S.A.
수천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지발이 기자회견에 임하는 중이었다.
회견의 주제는 제2회 국가대항전.
한데 어찌된 것이,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그리드에 관한 질문들만 쏟아져 나온다.
“과거의 그리드는 오로지 아이템과 스킬, 그리고 스탯의 힘만을 빌려서 승부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던 반면, 지금은 제법 컨트롤 실력까지 겸비하게 되었더군요. 그의 재능을 감안해 봤을 때 아마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가 아닐지 추측해봅니다. 그의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를 ‘제법’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훌륭하다고 말할 수준은 못 된다는 뜻입니까?”
“뭐…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 정도도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요?”
“아직 하이랭커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거군요. 국가대항전 전용 패치로 인해서 그리드의 힘이 약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저 또한 의견이 같습니다. 템빨과 스탯빨을 내세우지 못하는 그리드라… 지극히 평범할 것 같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 의문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리드가 약해진 게 맞습니까? 상대방을 일격에 해치웠던 그리드의 막강한 공격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해봤자, 결국 두 방이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느 노년 기자의 질문이 지발은 물론이고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만큼 기자의 질문이 초보적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한 지발이 입을 열었다.
“Satisfy에 존재하는 능력치는 공격력과 생명력뿐만이 아닙니다. 방어력이라는 개념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 방어력이 100이고 그리드의 공격력이 1,000이라고 칩시다. 이때 내가 그리드에게 공격을 받으면 몇의 피해를 입게 될 것 같습니까?”
“…900 아닙니까?”
은퇴를 앞둔 노년 기자는 Satisfy에 대해서 잘 몰랐다. 기자답지 않게 시대에 뒤떨어지는 인물이었고, 사실 그는 이번 기자회견에 참가할 예정조차도 없었다.
하지만 후배 기자에게 갑작스러운 변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 후배를 대신해서 이번 기자회견에 참석한 상태였다.
대놓고 문외한 티를 내는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인 지발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니죠, 그게 아닙니다. 방어력에는 공식이 적용됩니다. 우선, 스탯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어력 외에도 직업군, 혹은 레벨 구간마다 고유의 저항력이 존재하며, 여기에 방어력이 추가로 합산되어 적의 데미지를 감소시키는 형태로 말입니다.”
“말인 즉, 이번 패치로 감소 될 그리드의 공격력은 50퍼센트가 아닌 그 이상이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비단 그리드뿐만이 아닌, 그보다 공격력이 낮은 다른 유저들에게도 이번 패치는 치명적인 게 아닙니까? 서로에게 데미지를 어떻게 입히죠?”
노년 기자의 계속되는 초보적인 질문.
질린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지발이 스스로의 머리와 심장을 가리켜보였다.
“적의 급소를 가격하면 됩니다.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더 많이.”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그럴만한 솜씨가 없다, 이거다.
드디어 이해한 노년의 기자가 메모를 적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다른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PvP관련 종목들에서 활약하리라 예상됐던 그리드의 영향력이 약화 된 지금, 한국의 국가대항전 종합 순위를 예측해본다면 어떻습니까?”
“22위쯤?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엔 뚜렷한 인재가 유라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녀 혼자선 한계가 있겠죠.”
“극검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건가요?”
“물론 극검은 뛰어난 실력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공격 형태는 하나 같이 일격필살. 위력이 강력한 대신 공격 후 딜레이가 무척 길지요. 그 또한 이번 패치의 피해자 중 한 명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은 여러모로 안타깝게 됐어요.”
“크라우젤이 있는 러시아는요?”
“러시아는 참가자 전원의 면면이 제법 화려하고, 또한 크라우젤은 제가 인정하는 유일한 실력자이니까… 아마 10위권에는 쉽게 진입하지 않을까요.”
“개최국인 프랑스는요?”
“최소한 5위권에는 무난히 들어가겠지요.”
“미국은요?”
“당연히 1등입니다. 늘, 모든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
중국, 베이징.
“하오. 당신은 작년에 한국에서 열렸던 제1회 국가대항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그 탓에 우리 중국은 7위라는 낮은 성적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대회에 당신이 참가하겠다고 표명한 이유는 우리 중화인들의 실망을 잠재우고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맞습니까?”
템빨단원들이 랭킹계에 대격변을 불러일으킨 지금까지도 통합랭킹 16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오.
대륙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괴물은 전투의 귀재다.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PvP에서 압도적인 능력치를 뽐냈다.
작년, PvP 관련 종목들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중국에게 있어서 하오의 빈자리란 컸다.
그에 대한 보상심리를 갖고 있는 기자들의 질문에 하오가 냉소했다.
‘마음 같아서야 인민들의 마음 따위 나와 관계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중국인들의 성격은 같은 중국인인 하오가 잘 알고 있었다.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간,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를 당해서 봉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스린 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작년의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국가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그 일을 무척 후회해 왔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위대한 마오쩌둥의 영령 앞에 맹세하오니, 나는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우리 조국의 승리를 이끌 것입니다.”
“작년에 그리드를 필두로 세운 한국이 중국을 방해하고 3위의 자리를 꿰찼었습니다. 그리드가 너프를 당한 지금, 당신이라면 과거의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줄 수 있겠지요?”
‘그리드…’
라우엘의 말에 따르면, 그리드는 천외천 크라우젤마저도 넘어설 존재라고 한다.
헛소리로 치부하고는 있으나, 라우엘이라는 인물이 괜한 허풍선이는 아니었다. 뭔가 그리드에겐 저력이 있을 게 분명했다.
‘섣불리 말해서 좋을 건 없을 것 같다만.’
입을 다문 하오가 회견장을 쭉 둘러보았다.
기자들의 눈빛엔 하나 같이 기대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한숨 쉰 하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리드야 너프를 당했든, 그렇지 않든 애초에 내 상대가 못 됩니다.”
“오오!!”
기자들이 원하는 그대로의 답변이었다.
이들이 봤을 때, 대국의 인간이 소국의 인간을 이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찰칵!
찰칵찰칵!!
연신 셔터가 터지면서 하오의 발언이 실시간으로 인터넷 기사에 등록됐다.
그 사이 냉수를 삼킨 하오는 생각했다.
‘거짓말도 아니지.’
내가 도달하지 못한 하늘은 크라우젤이 유일하며, 크라우젤 바로 아래 버티고 있는 태산이 바로 나다.
하오는 스스로의 실력을 그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레이단 침공전 당시, 혼자서 템빨단원 여럿의 발을 묶었던 실력자다운 자신감이었다.
***
프랑스, 파리.
“봉드레, 당신은 그리드에게 단 4초 만에 패배하는 굴욕을 당한 경험이 있지요. 당시의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또한 활약하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프랑스는 제1회 국가대항전의 강력한 우승후보국이었다.
의외로 많은 전문가들이 프랑스가 미국을 넘어 우승을 차지하리라 분석했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대표하는 최강자 봉드레가 그리드에게 처참히 당하는 바람에 모든 게 꼬이고 말았다.
프랑스는 미국과 간발의 차이로 준우승국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 당시 봉드레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았던 언론사 기자들의 악의적인 질문이 봉드레를 콧방귀 뀌게 만들었다.
“트라우마? 그딴 건 당신들 같은 하이에나들에게나 생기는 거겠지. 나는 맹수다. 결코 위축되지 않아.”
“자신감은 좋군요. 하지만 이번 패치는 당신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필살기인 절대영도가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텐데요?”
프랑스는 제2회 국가대항전의 개최국이다.
개최국으로서 기왕지사 우승을 차지하기를 전 국민이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봉드레를 신뢰하지 못하는 여론이 많았다.
그를 대변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봉드레가 조소를 보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내 필살기가 절대영도래?”
“…?”
“1회 국가대항전부터 지금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더욱 더 강력한 마법을 많이 습득했고, 또한 애초에 얼음술사는 딜링보다 방어력과 유틸성이 뛰어난 클래스야. 이번 패치는 내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너무 열 받은 나머지 언젠가부터 반말을 사용하는 봉드레였다.
도끼눈을 뜬 그가 자리에 모여 있는 수십 개 언론사를 상대로 선언했다.
“개고기를 먹는 미개한 한국인 따위, 내가 아주 박살을 내주겠어. 그리고 나를 대하는 당신들의 태도 또한 보다 온순해지게끔 만들어주지. 내가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고 말겠다.”
***
캐나다, 오타와.
통합랭킹 3위 크리스 또한 기자회견 중이었다.
“작년, 캐나다는 국가대항전의 강력한 우승후보국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3위권에조차 진입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맛봐야만 했습니다.”
“올해 국가대항전은 부디 작년과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국민들이 소망하고 있는데요. 크리스씨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흥해줄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부디 있다고 대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자들의 눈빛을 읽은 크리스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작년의 저는 무력하였습니다. 보스 레이드에서는 지발에게 고배를 마셨고, 미궁 돌파에서는 봉드레에게, 또한 PvP에서는 레가스에게 패배하였으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 번 사죄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사실은 크리스가 사죄할 일이 아니었다.
작년의 크리스는 매우 멋졌다.
보스 레이드와 미궁 돌파에서는 은메달을 하나씩 획득했고, PvP에서는 8강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었으니까.
그렇다.
세계 최고의 플레이들을 상대로, 크리스는 홀로 분투한 것이다.
“고개를 드십시오!”
“당신은 우리들의 영웅입니다!”
기자들의 외침에 부흥하듯,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던 크리스가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더니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대가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아닌 이상 모조리 이겨 보이겠습니다.”
“그, 그리드?”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그리드는 이번 패치 최대의 피해자로 손꼽히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의 랭커와 전문가들은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에서 활약하기 어려울 거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한데 어째서 크리스는 그리드를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식하는가?
‘분명, 크리스 또한 패치의 피해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크리스는 달인의 경지에 오른 대검술 솜씨를 지녔다. 그리드와는 격이 달라.’
의문을 품는 기자들에게 크리스는 하하,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 미친 농부와 잠시나마 호각을 겨루는 것처럼 보였던 그리드를 내가 쉽게 이길 리가 없지.’
세상은 그리드의 진가를 모른다.
여태껏 그리드가 보여 온 행보가 하나 같이 대단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컨트롤 솜씨가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우습게 보는 여론을 크리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벌써부터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둘 모두 대단하고 결코 쉽게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크리스였지만, 아예 승산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이는 교만이 아닌 통합랭킹 3위의 숭고한 긍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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