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25화 (220/1,794)

템빨 20권 - 7화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템빨단원들은 뱀파이어의 도시를 최고 난이도의 사냥터로 손꼽았었다.

하지만 다 옛말이다.

번헨 열도에서 다양한 시련을 겪고 극복한 템빨단원들은 이제 눈부신 발전을 이룬 바.

베리아체의 직계가 아닌 이상, 그 어떤 뱀파이어도 그들을 위협할 수 없게 됐다.

뱀파이어의 도시.

번헨 열도에서 한층 더 강해지고 돌아온 템빨단원들이 뱀파이어들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캬악!!

-히, 히이익!

“…”

몬스터들의 씨가 마르게 생겼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해야할 것 같다.

발견되는 족족 사라지는 뱀파이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라우엘이 의문을 표출했다.

“다들, 동대륙 포탈 스크롤 구매 안 했습니까?”

“응? 당연히 샀지.”

“엘릭서랑 스킬북 사고 남은 포인트는 전부 다 포탈 스크롤 구입에 사용했다.”

“아니, 근데 왜 죄다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까? 동대륙으로 안 넘어가요?”

한때 10인의 루키 중 최강자라고 칭송 받았던 라우엘.

그가 만약 전투 특화 클래스로 3차 전직을 했었다면, 지금쯤 템빨단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강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엘은 스스로를 희생했다.

개인의 강함보다 템빨단의 참모로서 활약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클래스는 <흐름의 주인>.

일시적으로 날씨와 지형을 변화시키는 신기를 부리지만, 그 대신 전투력은 최하위로 꼽히는 클래스였다.

“그 탓에 한 동안 뒤처지다가, 이제야 비로소 뱀파이어들을 사냥할 수 있게 되었건만… 마음먹고 레벨 좀 올려보려는데 잡을 몹이 없잖습니까? 이기적인 자들이여, 봉인 된 전생의 내 자아가 해방되어 유혈 사태를 일으키기 전에 이 구역을 순순히 내게 넘기십쇼. 그리고 당신들은 어서 새로운 모험을 떠나세요.”

“…”

말투야 어찌됐든, 라우엘은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입을 비죽 내민 채 불만을 표출하는 그에게 민망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 템빨단원들이 해명했다.

“우리가 번헨 열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다 그리드 덕분이잖아?”

“그리드가 아니었다면 동대륙으로 이동할 수단을 알아내기 어려웠을 거다.”

“아직 그리드님조차 동대륙에 가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먼저 가게 되면 왠지 하극상 같잖아요?”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까.”

“…”

템빨단원들의 해명을 들은 라우엘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격한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주군에게 충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거였군요. 이것 참 제법인데요?”

강한 세력을 일구기 위한 기본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끈끈한 동료애이다.

그리고 템빨단은 이미 그것을 갖췄다.

흡족함에 미소 지은 라우엘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주 멋집니다. 그럼 이제 솔플 그만하고 나랑 파티를 맺읍시다.”

“어…?”

“저와의 의리도 지켜주셔야죠?”

“…”

파티 플레이는 솔로 플레이보다 사냥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이점이 있는 대신 경험치와 아이템을 분배해야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충분히 솔로 플레이가 가능한 지역에서, 그것도 몬스터의 숫자가 한정적인 지역에서 굳이 파티 플레이를 한다는 건 사실 손해였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은 차마 라우엘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평소, 그 누구보다도-심지어 그리드보다 더- 길드를 위해서 애쓰는 라우엘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 포인트 1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세컨드 클래스 <전설의 대마법사>의 영향으로 포인트 6개가 지력에 강제 투자됩니다.]

쉰아홉 번째 섬.

42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대규모로 출몰하는 지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드는 자신보다 레벨이 최소 114이상이나 높은 몬스터를 평균 3~4마리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리드는 의외로 분전할 수 있었다.

400개씩 상승한 민첩성과 지력, 그리고 웨폰 마스터리와 매직 마스터리의 도움이 컸다.

[웨폰 마스터리의 레벨이 초급 6으로 올랐습니다.]

[매직 마스터리의 레벨이 초급 4로 올랐습니다.]

[<갓 핸드>의 소드 마스터리 레벨이 중급 7로 올랐습니다.]

[멤피스 ‘노에’의 레벨이 202으로 올랐습니다.]

[신비 숲 도플갱어 ‘랜디’의 레벨이 161로 올랐습니다.]

‘빡세긴 하지만.’

얻는 게 너무 크다.

빠르고 지속적인 성장이 그리드를 벅차게 만들었다.

‘물약이 더 여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그리드는 번헨 열도의 난이도가 이렇게까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하여 중간에 한 번 레이단을 들렸다 왔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물약을 확보하지 않았다.

챙! 채채챙!!

그리드는 뼈저리게 후회하면서도 전투에 열중했다.

노에와 랜디 듀오에게 한 마리 몬스터를 묶어두게끔 한 뒤, 다른 두 마리 몬스터를 동시에 상대한 그리드.

한 마리 몬스터를 어렵게 해치우고 남은 몬스터와 1대1로 대치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 일순 푸른 화염이 피어올랐다.

<아이템 합체>등과 마찬가지로 히든 피스를 통해서 습득한 스킬, <대장장이의 눈>이 발동하였다는 표식이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눈(Lv.1)이 대상 아이템을 꿰뚫어봅니다.]

[<트롤 로드>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의 기능을 파헤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가죽조끼>

방어력:???

옵션 1.???

옵션 2.???

옵션 3.찌르기 공격에 대한 피해 경감.

‘아, 이래가지고.’

어쩐지 살(殺)과 연살(聯殺)의 데미지가 비정상적으로 박힌다 싶었다.

쩌엉-!!

상승한 민첩성을 기반으로, 종전보다 더 빠르게 <그리드의 대검>을 선회시킨 그리드.

트롤 로드의 도끼를 방어함과 동시에 파그마의 검무를 밟아 극살(極殺)을 전개하였다.

서걱!!

[대상에게 90,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극살(極殺)의 영향으로 생명력 4,500을 잃었습니다.]

-키야아아아악!!

트롤은 높은 생명력과 재생력을 자랑하는 몬스터이다. 그중에서도 트롤 로드는 트롤계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놈조차도 방어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극살(極殺)의 파괴력 앞에서는 몸서리를 쳤다.

한 번에 9만의 피해를 입고 누런 피를 흩뿌리는 놈으로부터 그리드가 황급히 물러섰다.

“그놈 참.”

트롤에게 재생할 틈을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 그리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트롤 로드의 피는 지독한 산성액체였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피를 분수처럼 내뿜는 놈에게 그리드는 쉽사리 콤보를 넣을 수가 없었다. 거리를 벌리기 급급했다.

꾸득! 꾸드득!!

그리드에게 베인 가슴의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트롤 로드.

놈이 그리드에게 도발적인 미소를 흘렸다.

마치 ‘넌 나를 절대 해칠 수 없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드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네임드도 아닌 놈이.”

그리드가 사투를 벌이는 동안, 4개의 갓 핸드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겠는가?

슈우우우웅!!

“……!”

트롤 로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굴 안쪽으로부터 번쩍이는 황금의 손들이 날아오더니, 그리드에게 새로운 무기를 날라다주는 모습을 본 까닭이었다.

“이게 바로 아이템 합체라는 거다.”

고오오오오-!

상어 모양의 푸른 대검 주변으로 혈빛의 검기가 벚꽃처럼 흩날린다.

<이야루그트+실패작>의 아름다운 조화였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파(聯殺派).”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키…! 키에에에에에엑!!”

산성액 같은 피를 뿜어대어 접근하기 어렵다면?

멀리서 조지면 될 일이다.

잿빛으로 산화하는 트롤 로드를 확인한 그리드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만, 그 미소는 길게 이어질 수가 없었다.

스킬들이 죄다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린 이 타이밍에, 또 새로운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

[예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세이브 포인트가 있습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등록되었습니다. 이후 번헨 열도에 입장 시, 예순 번째 섬부터 시작합니다.]

“허억… 허억… 와, 또 뒤지는 줄 알았네.”

아슬아슬하게 쉰아홉 번째 섬을 돌파한 그리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명력과 스태미나를 회복하기 위해서 명상을 취해보지만, 상념 때문인지 명상 상태에 쉽게 돌입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스킬에 도통 적응이 안 된다.’

대장장이 눈의 발동 조건은 대상이 무장하고 있는 장비 아이템을 최소 3초 이상 주시하는 것이었다.

이게 어렵냐고?

평소에야 쉽겠지만 전투 중에는 당연히 어렵다.

시야가 협소해져서 대상의 움직임을 놓치기 일쑤였고 자꾸만 빈틈을 드러내게 됐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이템 정보가 시야를 가려.’

전투 중에 시야를 장악하는 대상의 아이템 정보가 심하게 거슬린다.

네비게이션 화면이 운전자석 창문을 가린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차차 적응해나가면 되겠지.’

그리드는 당장 직면한 문제부터 주목했다.

60번대 섬.

과연 여기서도 내 실력이 통용될까?

번헨 열도의 난이도는 10개 섬 단위로 증폭됐다.

그리고 번헨 열도의 마지막 섬은 66번째 섬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60번대 섬부터의 난이도는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리란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원래라면 국가대항전 전까지 이곳을 클리어하고 싶었지만.’

현실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리드.

그의 불안감을 읽은 것일까?

<동화>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고 잠에서 깨어난 브라함의 영혼이 말해왔다.

[우선 도전해라.]

“브라함!”

브라함에게 점차 의지해나가는 중인 그리드였다.

브라함의 목소리를 듣고 반색한 그리드가 질문했다.

“도전하라는 말은, 즉 나라면 번헨 열도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다는 뜻이야?”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오만하군. 나는 이곳을 파그마가 만들어놓은 놀이터라고 말한 바 있다. 아직 파그마의 실력에 미치지 못한 네가 이곳을 완전히 공략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내가 네게 우선 도전해보라고 말한 이유는, 네가 아직 미약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의도에서였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파그마가 만든 놀이터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본래의 번헨 열도가 어떤 곳이었는지는 아느냐?]

“스틱세이에게 들었어. 역대 전설들의 업적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이자, 당대 전설들을 위한 수련의 장이었다고.”

[맞다. 전설들을 적대했던 놈들에겐 아주 거슬리는 장소였지.]

“전설들을 적대했던 놈들?”

[대악마다. 놈들은 전설과 전설을 잇는 이곳 번헨 열도를 파괴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었다. 놈들을 막기 위해서 파그마가 여러 가지 관문을 설치하였었고 말이야.]

“대악마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

설명을 들어나가던 그리드가 의문을 품었다.

“파그마는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거지?”

파그마가 전설의 대장장이라고는 하나 신은 아니다.

각종 장치를 설치하는 일이야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몬스터를 소환시키고 과거의 시련을 재현하거나 도전자의 모습을 복제하는 등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마법사라면 또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대악마라면 가능한 일이지.]

“뭐?”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