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12화
망토.
소매가 없이 어깨에서부터 내리 걸치는 외투를 칭한다.
흔히 쓰이는 소재가 천, 가죽인지라 망토를 제작하는 것은 재단사의 영역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하지만 대장장이들 또한 망토를 만들 줄 안다.
당연한 일이다.
대장장이들은 온갖 종류의 가죽 방어구를 제작하였고, 이로 인해서 수준 높은 무두질을 구사하였으므로 망토를 만드는 일에 능숙했다.
물론, 천과 가죽의 스페셜리스트인 재단사가 제작한 망토보다 디자인과 옵션 면에서 뒤떨어지는 게 현실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방어력만 놓고 본다면 대장장이가 제작한 망토가 더 뛰어났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란스티어의 망토는 대장장이가 제작한 망토임이 분명했다.
‘칼날을 쳐내는 망토.’
노에의 강력한 할퀴기조차 찢지 못했던 그 질기고 탄성 높은 망토의 재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레이단으로 귀환하는 내내 그리드는 생각해보았었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가죽의 종류를 모조리 떠올리고 하나하나 대조해봤었다.
그 결과 도출해낸 가죽은?
‘없다.’
광석처럼 단단하여 방어력이 뛰어난 가죽은 물론 많다.
퓨리 미노타우로스의 가죽과 블루 그리핀의 가죽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로 그것들은 최상급 레더 아머의 재료로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망토의 재료로 적합하냐고 자문해본다면 결단코 아니었다.
‘너무 두껍고 무겁다. 아무리 무두질을 해도 부드러워지지 않아.’
그것으로 망토를 만든다?
망토라기보다는 박스를 뒤집어 쓴 모양새가 되고 말 것이다. 망토로서의 활용성이 아예 없다.
그렇다면, 란스티어의 망토는 대체 무엇을 재질로 만들어진 걸까?
‘장담하건데 천은 아니지.’
데스 나이트가 된 란스티어의 장비를 지급해준 사람은 파그마다. 파그마는 대장장이이기 때문에 천을 수준 높게 다룰 수 없다.
‘가만.’
기억을 되짚어 나가던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란스티어의 망토, 외피와 내피의 색상이 달랐음을 떠올린 것이다.
‘외피는 검정색.’
그리고 내피는 붉은색이었다.
‘파그마는 망토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두 종류의 가죽을 덧댄 거였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굳이 미노타우르스의 가죽과 그리핀의 가죽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그 가죽들보다 내구력은 떨어질지언정 망토를 만들기에 보다 적합한 가죽들이 존재할 테니까.
이제 그리드는 몇 개의 가죽을 후보군에 올린 후 검정색 가죽과 붉은색 가죽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없는데?’
검정색 가죽은 너무 많아서 문제고, 붉은색 가죽은 없다. 그나마 붉은색과 비슷한 가죽은 리자드 퀸의 분홍색 가죽이었다.
‘심지어 리자드 퀸의 가죽은 너무 단단해서 망토의 안감으로 삼기엔 무리가…’
지난 일주일 동안 갑옷과 투구, 그리고 각반과 건틀렛의 제작을 완료한 그리드.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스킬을 사용, 란스티어의 망토를 재현하고자 시도하려고 했던 그가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었다.
***
자신감이 엿보이는 도도한 눈매, 지성이 충만한 눈동자, 여유가 느껴지는 차분한 입매.
이지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이 여성, 아시아 제일 미녀라고 칭송이 자자한 유라다.
자신의 인상과 잘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고수해왔던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웬일인지 변했다.
치렁치렁,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가녀린 목선을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닿는다.
‘부끄럽네.’
전신거울 앞에 선 유라가 얼굴을 붉혔다.
새하얀 얼굴 위로 떠오르는 분홍색 홍조가 복숭아를 연상하게 만든다.
‘어색해.’
허벅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짧은 원피스. 바짝 밀착되어 유라의 이상적인 몸매를 전체적으로 부각시킨다.
흰 티에 청바지, 혹은 정장만을 입어왔던 유라로서는 거울에 비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도통 적응이 안 됐다.
몸매를 노출한 채 밖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떨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리드. 즉, 신영우를 만나는 날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남성에게 유라는 기왕지사 호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스타일에 변화까지 준 것이다.
그리드의 취향에 부합하게끔.
하지만 이제 보니 가슴 사이즈가 문제였다.
그리드의 취향은 최소 D컵이라지 않았던가?
“…”
템빨의 힘이라도 빌려볼까 고민하던 유라가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도 이미 평균보단 컸다.
이날.
“헉…”
“…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길에서 우연히 유라를 목격하게 된 남성들이 노소에 상관없이 감격하여 울부짖었다.
평생 눈을 씻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
딩동~
국가대항전까지 3일 남은 날.
누군가가 영우의 집을 방문했다.
“오오~! 갓리드!!”
극검이었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것처럼 큰 소리로 반가움을 표출하는 그에게 영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기운이 팔팔하시네.”
“우리 갓리드님을 영접하는 날인데 없던 기운도 솟아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거 참.”
극검은 칸 같은 구석이 있다.
내게 무한한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싫을 리가 없다.
너털웃음을 흘리고 만 영우가 슬리퍼를 신더니 현관을 나섰다.
“호오?”
연녹색 트레이닝복에 하늘색 낡은 슬리퍼.
집 앞 슈퍼 가는 차림의 영우를 위아래로 훑는 극검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랐다.
영우의 몸매가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튼튼해져있는 까닭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꺼운 허벅지가 무척이나 듬직했다.
“저번에 보니까 매일 아침마다 조깅하는 것 같더니만,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해왔나 본데?”
“건강해야 게임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게임도 체력 없으면 못한다. 특히 가상현실게임의 피로도는 매우 높았다.
“아주 좋은 자세야. 근데 눈 밑에 다크서클이 심한 걸? 요즘 통 잠을 못 잔 건가?”
“국가대항전에 앞서서 아이템 몇 개를 만들고 있는데, 그게 잘 안 풀려서… 음?”
집 앞으로 나온 영우가 자신의 차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극검의 차를 발견하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를 본 극검이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이번에 새로 뽑은 찬데 아주 잘 빠졌지? 갓리드의 8억짜리 13시리즈와 나란히 서있어도 꿀리지 않는 스포츠세단은 참 드물 거야. 그치?”
“…문 라이트 블루.”
영우는 극검의 차 색상에 주목하고 있었다.
햇빛 아래서 보면 푸른색이 감돌지만 음영 아래서 보면 오로지 검게 보이는 색상.
‘설마…!’
란스티어의 망토를 구성하고 있는 2개의 가죽 중 적색 가죽.
그것, 어쩌면 적색이 아닐 수도 있다.
61번째 섬이 불길로 뒤덮여있는 공간이었음을 상기하고 깨달음을 얻은 영우가 다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다시 게임에 접속할게요!”
“어? 으, 응?”
극검이 당황했다.
오늘은 유라를 비롯한 한국팀 국가대항전 참가자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작전회의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 아니었던가?
근데 그 약속에서 일방적으로 빠지겠다니?
“작전이야 우리끼리 짜면 되지만 유라가 실망할 것 같은데…”
유라와 극검은 옛날부터 나름 친분이 있었다.
극검이 일방적으로 유라를 ‘두 유 노우 클럽’에 가입시킨 후 따라다니는 형태였지만 어쨌든 친구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템빨단에서 재회한 이후부턴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고, 극검은 유라가 영우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늘 뭐 입고 나오면 좋을지 고민하던 그녀를 떠올린 극검은 영우를 붙잡고 싶었지만…
“뭐, 됐나.”
상대는 하늘 위의 하늘마저 무너뜨린 갓리드다.
한국인 중 유일하게 세계 최고를 노려볼 수 있는 Satisfy플레이어였다.
극검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에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로 되돌아오리라 믿었다.
그 결과 유라만 우울해졌다.
“…영우씨는 안 오신다고요?”
“어, 으, 응…”
“…”
강남에 위치한 최고급 한식당.
국가대항전 참가자들과 함께 영우, 극검을 기다리고 있던 유라가 말없이 냉수를 들이키더니 옷을 갈아입고 왔다.
고혹적인 몸매를 드러냈던 원피스를 대신해서 청바지에 흰 티를 걸치고 온 것이다.
동석하고 있던 남성들은 영우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여성들은 자괴감으로부터 약간이나마 해방 될 수 있었다.
***
“그래, 이거야! 내가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었지?”
레이단의 초대형 대장간.
게임에 재접속하자마자 <아이템 제작 목록>을 펼쳐본 그리드가 환호했다.
그가 주시하는 아이템은 몇 달 전, 페이커에게 새롭게 제작해주었던 가죽 갑옷이었다.
<카멜리안 갑옷>
등급:에픽~레전드리
에픽 등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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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 등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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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리 등급 정보
내구력:390/390 방어력:539
*찌르기, 베기, 투척 공격으로 받는 피해 35퍼센트 경감
*적의 시선을 보통 확률로 교란
*스킬 <은신>의 효과 상승
*기후에 따라서 각종 저항력 상승
카멜리안 로드의 가죽으로 제작한 갑옷입니다.
뛰어난 탄성을 자랑하며 주변 물질이나 기후에 따라서 색상과 옵션이 변화합니다.
…
..
카멜리안.
크기 2미터에 육박하는 카멜레온에게 근육질 인간의 팔다리가 붙어있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놈들의 가죽은 탄성이 매우 강해서 물리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고, 색상과 특성이 시시각각 변하여 위험으로부터 쉽게 몸을 지킬 수 있었다.
란스티어의 망토가 노에의 할퀴기를 무력화시키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멀쩡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탄성이 높은 덕분에 다른 가죽과 덧댈 경우 시너지도 발생할 테고… 그렇다면 퓨리 미노타우르스의 가죽을 사용해봐도 좋지 않을까?’
회심의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스킬을 사용, 란스티어의 망토를 재현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란스티어의 망토>
등급:유니크~레전드리
유니크 등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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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리 등급 정보
내구력:153/153 방어력:206
*찌르기, 베기, 투척 공격으로 받는 피해 20퍼센트 경감
*10퍼센트 확률로 적의 공격을 튕겨냄
*기후에 따라서 각종 저항력 상승
겉감으로는 퓨리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을, 안감으로는 카멜리안 로드의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카멜리안 로드 가죽의 탄성이 퓨리 미노타우로스 가죽의 단단함을 다소 누그러뜨립니다.
망토라고는 믿기지 않는 방어력을 자랑하며, 특히 날붙이에 강하고 적에게 공격당할 경우 낮은 확률로 공격을 튕겨냅니다.
카멜리안 로드 가죽의 특성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아 시선 교란 효과와 은신 효과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320 이상.
무게:690
“좋았어!!”
이거, 템빨단의 탱커들 전원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해줘야 할 정도로 뛰어난 방어용 망토다.
프랑스로 출국하기 10시간 전.
그리드는 탱커로서 완전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가대항전에 앞서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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