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0권 - 13화
“뭐? 9시간?”
9시간.
한국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심지어 직항임에도 그렇다.
“배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 타고 가는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프랑스는 유럽 서쪽 끝에 있거든. 그나마 9시간 걸리는 것도 신형 여객기라서 가능한 거야. 구형 여객기로는 파리까지 12시간 가까이 걸린다더라.”
“킁.”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길.
기름 값 아낀답시고 극검의 차에 동승하고 있는 영우의 표정이 영 불편했다.
‘9시간이면 Satisfy 시간으로 27시간이잖아?’
27시간은 길다.
307레벨 기준으로, 27시간 내내 사냥만하면 경험치를 1.5프로 가까이 올릴 수 있었다.
만약 대장일을 한다면?
시간이 촉박하여 아직 제작하지 못했던 노에와 랜디의 아이템들을 완성시킬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아이린과 뜨거운 사랑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 천금 같은 시간을 비행기에 갇힌 채 허무하게 낭비하라니?
부족한 재능과 실력을 시간과 노력으로 충당하려는 심리가 강한 영우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 치가 떨릴 정도다.
“어차피 온라인 대횐데 그냥 집에서 참가할 수 있게 해주지, 뭘 굳이 파리까지 모이라는 건지 원.”
조수석에 앉은 채 연신 투덜거리는 신영우.
그 탓에 운전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된 극검이 차량에 탑재 된 자율주행기능을 실행시키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우리 갓리드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뭔지 어디 한 번 말해봐. 내가 다 해결해줄게! 아, 혹시 파리에는 김치가 없을까봐서? 걱정 말라고! 내가 한인마트랑 한식집 리스트를 쫙 뽑아놨으니까!! 네가 원한다면 에펠탑 앞에서 김치찌개를 끓여줄 수도 있다고!!”
“…”
지나가는 외국인들 붙잡고 ‘두 유 노우 김취찌궤?’ 거리는 극검의 모습이 연상되어 소름 돋는 영우였다.
“…아니, 제발 좀 그러지 말고. 나는 그냥 9시간 동안 게임도 못하고 비행기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그래요.”
“아, 그런 거였나.”
영우의 심정을 이해한 극검이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과연 갓리드 아니랄까봐 성실하구만. 그럼 우리, 유라의 전용기를 이용할까?”
“전용기?”
“안 그래도 어제 회의에서 나왔던 말이야. 유라의 전용기에 Satisfy용 캡슐이 구비되어 있으니까, 프랑스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Satisfy를 플레이하고 싶은 참가자는 유라의 전용기를 이용하면 돼.”
“헐.”
전용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건만, 그 안에 Satisfy용 캡슐까지 구비되어 있다니?
조만간 완공 될 100억짜리 건물의 주인인 영우에게도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대체 얼마나 부자인거지?’
유라의 천문학적인 재력이 충격적일 따름이다.
할 말을 잃고 있는 영우에게 극검이 재차 물었다.
“어때? 유라의 전용기를 타고 갈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럽시다.”
“좋아, 바로 연락 넣으마. 이거 참 유라가 기뻐하겠네.”
‘유라가 왜 기뻐한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영우의 머릿속은 국가대항전에 관한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만큼 국가대항전을 벼르고 있다는 뜻이다.
매번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비하해온 세계인들에게 영우는 어서 빨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
“어서 오세요.”
프랑스까지 장시간 비행이다.
본래는 편안한 옷차림을 하고 있던 유라이지만, 영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살랑거리는 짧은 치마가 영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쁘긴 진짜 예쁘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우 또한 유라를 만날 때마다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인종의 개념을 초월한 아름다움이 워낙에 독보적인지라, 그녀의 주변 풍경이 모조리 퇴색되어버릴 지경이다.
유라와 나란히 있으면서도 미모를 잃지 않는 여성은 그리드가 알기로 지슈카가 유일했다.
‘아니, 마리로즈도 있지.’
청초하고 이지적인 유라의 매력과 도발적이면서도 건강한 지슈카의 매력을 합쳐놓은 듯한 존재, 마리로즈.
아무리 NPC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그리도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건지 납득이 안 갈 정도다.
‘효과가 있어.’
자신을 바라보며 넋을 잃은 영우를 확인한 유라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영우의 취향을 저격해서 노출도 있는 의상을 선택한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캡슐은 어디에 있어?”
“…”
유라의 가슴부근을 잠시 쳐다보더니 시선을 돌린 영우의 질문이 유라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취향 한 번 확고한 영우였다.
***
Satisfy에 접속한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아, 긴장돼서 혼났네.”
유라가 예쁘다는 건 TV로 엿보던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하늘거리는 옷차림은 처음 보았다.
늘 청초하게만 보였던 유라로부터 새삼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말았다.
‘몸매가 너무 예뻐서 이상형이 바뀔 뻔했다.’
그렇다.
그리드가 유라와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곧장 캡슐로 달려온 이유, 유라한테 무관심해서가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의식한 게 문제였다.
너무 예뻐서 기가 죽었다. 시선조차 똑바로 마주칠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말았다.
‘현실 여성’에 대한 내성이 아직 많이 부족한 그리드에게 있어서 유라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쯧, 이게 뭐하는 짓이지. 유라는 나한테 관심도 없을 텐데.’
유라가 늘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협력관계로서 보이는 호의이다. 착각해선 안 된다.
‘저런 여자는 어떤 남자하고 연애하려나.’
똑똑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돈 많고, 집안 좋고, 권위까지 있는 완벽한 남자쯤 되어야 유라와 급이 맞을 것이다.
생각해보면서, 유라를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그리드에게 극검의 귓속말이 날아왔다.
-한 달 전에 발표 됐던 기사는 너도 알고 있지?
-기사?
-이번 국가대항전, 각국의 참가자 숫자를 줄이는 대신 메달 획득 기회를 늘렸다고 했잖아.
-번헨 열도의 공략에 열중하고 있던 때라 기사를 못 본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요?
-1회 국가대항전은 개인전과 단체전 상관없이, 한 사람이 참가할 수 있는 종목이 최대 3개로 한정되어 있었던 반면 2회 국가대항전은 단체전 참가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하더라.
-단체전?
-보스 레이드, 표적 맞추기, 그리고 공성전. 이 3개 종목은 각국의 참가자 전원이 참가가 가능하게끔 규칙이 변경됐어. 어제, 참가자들끼리 모여서 작전회의를 하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고.
-호오.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내가 개인으로 금메달 3개를 따고, 단체전 3개에서도 모조리 금메달을 딴다면 우리나라가 국가대항전에서 우승할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
-가능하다면 말이지.
하지만 역시 현실적이지는 않다.
그리드, 유라, 극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약체로 분류되는 이유는 다른 참가자들의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니까.
또한, 그리드와 달리 극검은 이번 패치로 인해서 크게 약화 된 상태였다.
단체전에서 한국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공성전과 표적 맞추기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메달권에 들지 못하리라고 본다. 하지만 보스 레이드는 경우가 다르지.
극검은 그리드를 쭉 지켜봐왔다.
그리드의 고난이도 레이드 경험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레이드는 우리들이 너를 잘만 서포트한다면 금메달을 노려볼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어.
그리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공성전 룰은 내가 잘 모르니까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표적 맞추기는 왜요? 표적 맞추기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금메달을 노려볼 수 있지 않나?
갓 핸드를 통해서 매직 미사일을 방출할 수 있는 자신과 마법총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원거리 딜러 유라.
두 사람의 힘이 합쳐진다면 표적 맞추기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게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극검의 생각은 달랐다.
-나와 다른 참가자들에게 너와 유라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게 문제지.
-흐음.
-발목을 붙잡아 미안할 따름이다.
“…”
기운 없이 말하는 극검의 태도가 그리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극검이 누군가?
황당할 정도로 마이페이스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부심이 엄청난 인물이다.
그가 위축되어 있는 모습은 어울리지도 않았고 한국인으로서 다소 심란했다.
-당신이 이번 패치로 인해서 입게 된 피해가 그렇게나 큰 겁니까?
오래간만에 진지한 음성의 그리드였다.
극검이 솔직하게 밝혔다.
-내 클래스의 컨셉 자체가 일도양단이야. 기본 공격력이 다른 전투 클래스와 비교해서 매우 높은 대신 공격 후 딜레이가 커. 적에게 일격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할 경우 반격에 당하고 이게 패배로 직결되는데, 국가대항전에서 데미지가 50퍼센트밖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뭐… 말 다했지.
“으음…”
한참을 말없이 생각해본 그리드가 질문했다.
-혹시, 공격 후 생기는 딜레이가 공격 속도의 영향을 받나?
-아무래도 공격 속도가 높으면 딜레이가 줄어들지. 하지만 내가 착용할 수 있는 무기는 최소 길이 1미터 50센티미터의 장검이고, 장검의 공격속도에는 한계가 있잖아?
‘그건 편견이지.’
과거, 유페미나와 처음 만나 대장장이 승부를 펼쳤을 때 제작한 <이상적인 단검>.
민첩성과 공격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이것을 그리드는 여전히 버프용 아이템으로 활용하면서 생각해본 바 있다.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을 장검이나 대검으로 재현시킬 수 있다면, 내 주력무기 중 하나로 사용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무거운 대검에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을 부여시킨다고 해봤자 효과가 극대화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장검이었다만.’
그 제작 시기를 그리드는 급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번 국가대항전을 앞두고 그리드가 방어구의 제작에만 신경 썼던 이유,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무기들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특히 이야루그트의 경우 경험치가 83퍼센트를 돌파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어쩌면 국가대항전 도중에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다.
PvP를 통한 무기 경험치 획득량이 PvE를 통한 무기 경험치 획득량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말이다.
‘여차하면 아이템 합체도 있으니까 공격력이 부족할 거란 생각은 안 했었다.’
하지만 기왕지사, 만반의 준비를 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이상적인 장검>의 제작 시기를 앞당기는 게 좋을 듯하다.
-파리에 도착할 때까지 검 한 자루 만듭시다.
-검? 서, 설마 나를 위해서?
-딱히 당신만을 위해선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요.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재료들을 구해오도록 하세요.
-그래, 알았다! 냉큼 구해오도록 하마!!
국가대항전을 앞두고 아이템을 업그레이드시킨 그리드처럼, 템빨단원들 또한 아이템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드에게 아이템 제작을 부탁하지 않은 이유는 국가대항전에서 적으로 만나게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그리드 또한 알고 있었지만 극검은 경우가 달랐다.
최소한 단체전에서만큼은 확실한 아군이었으니까.
“같은 편은 세야지.”
게임 해본 사람들은 이 심정 알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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