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1권 - 5화
그리드가 러시아를 기습하기 전.
그리드의 예측대로, 크라우젤은 한국을 표적으로 삼아서 이동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국가 중에서 한국의 점수가 가장 높았으므로 한국을 견제하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죽자 살자 싸울 생각은 없었다. 한국이 표적 처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견제만 할 계획이었다.
현재 크라우젤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 기름 없는 차와 같다.
피아로와 대결한 직후와 같은 상태였다.
이대로 그리드와 진검승부를 펼친다?
크라우젤이 장담하건데,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이 8할 이상이었다.
천외천 크라우젤이 누군가를 상대로 패배를 염두에 두다니, 혹자가 알게 된다면 기겁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크라우젤은 알고 있다.
자신은 무적이 아님을.
또한 그리드는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건?’
숲을 가로지르던 크라우젤이 자리에 멈췄다.
하늘 위.
각자 무기를 거머쥔 채 표적 처리에 열중하는 황금 손들이 보인다.
‘…갓 핸드라고 했던가.’
한국의 점수가 느리지만 꾸준히 오르고 있던 비결이 바로 갓 핸드의 활약 덕분이었음을 알게 된 크라우젤.
주변을 살펴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날아올랐다. 갓 핸드를 무력화시킬 심산이었다.
하지만.
쩌엉!!
‘역시, 파괴는 불가능한가.’
갓 핸드는 터무니없이 단단했다.
백아도를 힘껏 휘둘러서 타격해봤자 2~3초가량 경직시키는 게 한계였다.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던 갓 핸드들이 보호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크라우젤을 표적으로 삼아서 덤벼왔다.
‘소드 마스터리 스킬이 귀속되어 있었나?’
갓 핸드의 검술 솜씨, 레이단에서 상대했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더 강해졌고, 빨라졌으며 합격에는 묘리가 담겼다.
크라우젤이 보기에 200레벨 초반대 몬스터는 갓 핸드만으로도 사냥이 가능해보였다.
정말이지 황당무계할 정도로 대단한 아이템이다.
과연 <파그마의 후예>의 전용 아이템다웠다.
‘검성의 전용 아이템은 뭘까?’
상상해보면서 갓 핸드의 공격을 슬쩍, 슬쩍 회피하는 크라우젤의 움직임이 여유롭다.
마치 4명의 초등학생을 상대하는 프로 복서를 보는 듯하다.
“…?”
갓 핸드의 어그로가 자신에게 끌리자 완전히 멈춰버린 한국의 점수판.
그를 보고 흡족해하던 크라우젤이 흠칫 놀랐다.
한국과 점차 격차를 벌리고 있던 러시아의 점수판이 갑자기 멈춘 까닭이었다.
‘설마!’
크라우젤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누군가가 러시아를 기습한 게 분명했고, 그 누군가란 정황상 그리드일 가능성이 높았기에.
‘돌아가야 한다.’
그리드를 러시아의 대표들이 감당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크라우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하는 순간이었다.
타앙-!
약 120미터 후방.
거대한 바위 뒤로부터 저격수의 총탄이 쏘아진다.
마력으로 형성 된 탄환이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과 바람의 파장을 토대로 탄착지점을 예측한 크라우젤.
허리를 비튼 그가 마탄을 회피해버렸다.
퍼엉!!
크라우젤이 마주보고 있던 나무가 폭발하였고, 이때 발생한 충격파가 크라우젤의 올려 묶은 장발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 조각처럼 아름답다.
『과연 크라우젤!! 랭킹 1위의 컨트롤 솜씨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입니다!! 확정 공격이 아니면 거의 다 피한다고 봐도 무방하군요!!』
『지금 막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번 표적 맞추기에서 크라우젤이 회피한 평타와 논타켓 스킬은 총 537회 중 502회… 헉, 이 자료 잘못 된 거 아닙니까?』
『저 정도면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다고 보는 게 맞죠…』
통합랭킹 5위 출신의 유라.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것으로 추측되는 그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오로지 크라우젤만 집중 조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성으로 꼽히는 유라조차도, 20억 유저의 정점 크라우젤과 나란히 있으면 한낱 조연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라는 크라우젤의 발목을 얼마동안이나 붙잡을 수 있을까요?』
『현재 크라우젤은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통합 랭킹 5위 출신인 유라라면 최소 5분 이상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죠. 예전부터 유라는 대인전에 취약했었습니다. 1분을 버티기도 힘들 겁니다.』
해설진과 전문가들의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백아도를 꺼내 쥔 크라우젤은 유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유라가 총사라고 확신한 크라우젤이었기에 일단 거리를 좁히는 것을 중점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도망치면서 최대한 시간을 벌겠다는 계획을 세운 유라이지만,
‘빨라!’
크라우젤의 접근 속도가 상상이상이었다.
실질적인 이동속도는 유라와 비슷했으나, 숲의 지형 구조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동선을 최소화시킨 크라우젤의 이동방식이 워낙에 효율적이었다.
급기야 크라우젤이 유라의 뒤를 잡았다.
이때, 갓 핸드는 그리드의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크라우젤을 쫓지 않고 그리드의 인벤토리로 강제 송환됐다.
채앵!!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백아도를 휘두르는 크라우젤.
그를 라이플 모드의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으로 방어한 유라가 섬뜩함에 몸서리쳤다.
총신을 타고 올라온 크라우젤의 하얀 검이 자신의 심장으로 꽂혀왔기에.
푸욱!!
“읏…!”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크라우젤의 최대 강점은 컨트롤 솜씨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높은 레벨이다.
레벨의 격차에 따른 공격력, 방어력, 저항력, 명중률 보너스가 있는 바.
이제 막 260레벨대에 진입한 유라는 343레벨을 바라보고 있는 크라우젤과의 레벨 격차를 감당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에 놀란 건 의외로 크라우젤 쪽이었다.
“당신, 왜 그렇게 레벨이 낮아진 겁니까?”
유라는 통합 랭킹 5위였던 인물이다.
이미 반 년도 더 전에 300레벨을 넘었었다.
한데 유라에게 들어간 데미지를 보면, 유라의 스탯은 아직 3차 각성조차 못한 것 같았다. 무장한 방어구의 상태가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종이 몸이다.
어째서?
당최 무슨 이유로 레벨이 대폭 다운된 걸까?
당황하며 의아해하는 크라우젤의 귓가로 유라의 미성이 파고들었다.
“언젠가는 당신도 이유를 알게 되리라 믿어요.”
“……!”
크라우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유라의 마법 공학 총이 갑자기 검으로 변모한 까닭이었다.
기다란 총신이 네 갈래로 갈라지면서 청광의 검신이 솟구쳐 오른다.
핏-!
크라우젤의 얼굴이 크게 베였다.
왼쪽 눈가에 검흔이 아로새겨지며 핏줄기가 솟구쳤다.
“…”
두 번째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 유라.
꽃처럼 만개한 청광의 검을 겨눠오는 그녀의 눈빛으로부터 엿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크라우젤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고, 대회를 중계 중인 각국의 해설진은 극도로 흥분하였다.
『천하의 크라우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유라의 저력을 무시해선 안 되는 거였군요!』
『한데 유라의 저 무기는 대체 뭡니까? 어떻게 마법 총이 검으로 변하는 거죠?』
일반적인 마법 공학 총은 라이플 모드와 피스톨 모드만을 지원한다.
하지만 유라의 마법 공학 총은 검으로까지 모습을 바꿨으므로 해설진은 믿기지가 않았다.
전문가들이 추측했다.
『드워프가 제작한 마법 공학 총일 겁니다.』
『유라 정도의 플레이어라면 드워프의 도시 탈리마를 여행했을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뭐, 전황을 뒤엎을 정도의 카드는 아닙니다.』
유라는 총사계열 히든 클래스로 전직한 것으로 추정됐다. 소드 마스터리 스킬을 보유했을 리가 없다. 애초에 흑마법사 출신이니 검술에는 문외한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생각했지만,
채챙! 챙!!
의외로 유라의 검술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반격하는 크라우젤의 검을 맞받아친 것으로 모자라서 반격까지 시도했다.
두 사람의 검이 몇 번이고 교차하며 발생하는 화려한 이펙트가 시청자들을 현혹시켰다.
하지만 팽팽한 대결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유라의 검술은 크라우젤과 비견할 수준이 못 되었고, 무엇보다도 레벨과 스탯 차이가 너무 컸다.
퍽!
유라의 검을 튕겨낸 후, 수직으로 올라간 검을 그대로 내린 크라우젤.
유라의 가녀린 어깨를 검 손잡이로 찍어버린 그가 무릎을 세웠다.
지근거리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는 <자진모리>의 전조였다.
뻐엉-!
“……!”
발차기에 가슴을 크게 얻어맞은 유라가 차징 효과에 의해서 날아갔고, 크라우젤은 보조무기 비수를 던져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히고자 시도했다.
한데 그때 후방으로부터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유라가 크라우젤의 이목을 끄는 사이, 기척을 숨긴 채 접근하여 완벽한 기습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극검의 등장이었다.
“발검, 폭(暴).”
피잉-!
극검이 검을 뽑은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폭발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크라우젤의 지척으로 사나운 검광이 휘몰아쳤다.
빠르다.
애초에, 발검술은 피하라고 있는 스킬이 아니다.
예리한 감각과 혜안을 지닌 크라우젤조차도 타이밍을 완벽하게 노리고 발동시킨 발검술은 피하기 어려웠다.
서걱!!
“쿨럭!”
검광에 가슴을 관통당한 크라우젤의 입으로부터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위험하다.’
이와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크라우젤의 눈가에 어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버틴다.’
이를 악 문 크라우젤.
어느새 무기를 피스톨 모드로 전환한 유라가 그에게 마구 마탄을 쏘았다.
퍼펑! 퍼퍼퍼퍼펑!!
크라우젤의 몸에 마탄이 연속적으로 충돌, 폭발했다.
극검은 방심하지 않고 검을 회수, 다음 발검술을 준비했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청운진>을 전개하였다.
푸른 구름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전장을 뒤엎어버렸다.
‘보이질 않아.’
구름에 가리어 사라진 크라우젤을 포착할 수 없게 된 유라와 극검이 긴장했다. 크라우젤이 언제, 어디서부터 튀어나와 자신들을 공격할지 그들은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한데 20초 후, 구름이 완전히 걷힐 때까지도 크라우젤은 두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도망친 것이다.
연속되는 전투로 인해서 스태미나와 마나가 고갈 직전까지 몰리게 된 크라우젤.
무리해서 유라와 극검을 해치우기보다는 살아남아 러시아의 점수를 유지, 은메달이라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20분 후.
한국이 점수 400점을 달성하면서 표적 처리는 자동으로 종료됐다.
***
<제2회 Satisfy 국가대항전, 개막전부터 이변의 연속!>
<미국의 충격적인 탈락과 한국, 러시아, 일본의 대두.>
<지발은 약했고, 크라우젤은 강했다. 2인자와 1인자의 격차는 하늘과 땅?>
<러시아의 유일한 생존자 크라우젤의 눈물겨운 분투… 단신으로 캐나다를 견제한 끝에 은메달을 지켜내다.>
<그리드, 너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공격력과 그를 초월하는 방어력을 선보여.>
<(리뷰)그리드의 아이템들을 심층 분석해보자.>
<(칼럼)진정한 최강자는 데미안이 아닐까?>
<레베카교의 교황이 그리드를 신격화… 레베카 여신의 질투가 그리드에게 향하지 않기를 바랄 뿐.>
<데미안은 정말로 재일한국인인가?>
<아시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중국의 몰락.>
<그리스와 영국, 1시간 내내 싸우면서 표적은 1개도 처리하지 않아 파장… 수에론과 레가스에게 양국 국민들의 비난이 쇄도하는 중.>
<캐나다의 반트너, 크리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어 결국 은메달을 놓치다.>
<봉드레와 부바트는 과거의 사람에 불과했다.>
<타르마 존재감 제로. 그에 대한 소문들이 과장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리드가 너무 강했던 것일까?>
<(칼럼)3차 전직자와 2차 전직자의 격차는 예상보다 더 컸다.>
개막전 종료 후.
간단한 기자회견을 마친 선수들이 각자의 숙소로 되돌아갔다.
샹그X라 호텔.
한국의 대표들이 전원 그리드의 방에 모였다.
“대박! 대박이라고!! 우리 한국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다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야!!!”
잔뜩 흥분한 극검이 소리쳤고,
“이게 다 그리드님과 유라님, 그리고 극검님 덕분이죠.”
“우리는 아무런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할 따름이에요.”
“하아, 우리 참 쓸모없네요. 완전히 민폐만 끼쳤어요…”
경훈, 수민, 진희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존심 강한 종와는 본인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들을 격려하는 건 의외로 유라도, 극검도 아니었다.
바로 그리드였다.
“아니, 이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이뤄낸 결과다. 너희들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거야.”
평생을 무능하다고 멸시 당해왔던 그리드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어. 누구에게나 각자의 개성과 재능이 있으니까. 늘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라.”
스스로를 불필요한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위태로워진다.
붕괴되는 자존감과 이에 따라 비뚤어지는 성격으로 인해서 걷잡을 수 없는 불행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그리드처럼 말이다.
환히 웃는 그리드.
금메달의 주역인 그가 자만하지 않고 모두와 공적을 나누는 모습, 유라는 성숙하다고 느꼈다.
하루가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남성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건 무척이나 흥미롭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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