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1권 - 14화
평균 시청자수가 1억 명에 불과한 ‘슈퍼볼’의 광고료가 올림픽과 월드컵 광고료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가 뭘까?
집중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월드컵과 달리 슈퍼볼은 오로지 ‘미국인’들의 축제인 바.
기업들의 입장에선 슈퍼볼 시청자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공략하기가 무척 수월했다.
단 한 편의 광고만으로 1억 명의 잠재적 소비자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슈퍼볼 광고의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2030년을 기점으로 초당 광고료가 2억 5천만 원을 돌파한 것, 지극히 당연한 순리였다.
반면 올림픽과 월드컵은?
단순 시청자수는 슈퍼볼을 압도할지 몰라도 집중력이 너무 떨어졌다.
각국의 정서에 맞게끔 여러 개의 광고를 제작해야하는 건 기본이고,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는 종목과 국가가 각기 다르다보니 광고효과 또한 한정적이었다.
최초, 각국의 기업들은 Satisfy 국가대항전 또한 올림픽과 비슷한 형국이 되리라 보았다.
역대 그 어떤 대회보다도 높은 시청자수를 자랑하게 될지언정, 시청자수에 비해 광고효과는 낮으리라 분석했다.
하여 광고료를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고 선수 개인에게 후원하는 금액도 올림픽 비인기 종목과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했다.
애초에, ‘고작 게이머’에 불과한 그들을 ‘선수’라고 지칭하며 후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Satisfy 국가대항전은 참가국이 무척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았고, 심지어 모든 종목이 다 인기가 높았다.
광고효과가 슈퍼볼을 아득히 초월하고도 남았다.
특히 무엇보다도 선수 개개인의 화제성과 파급력이 뛰어났다.
스포츠와 게임은 엄연히 다른 영역인 바.
스포츠 선수들을 바라볼 때는 ‘굉장하다.’로 그쳤던 시청자들의 의식이, 게이머들을 바라볼 때는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까지 확장되어버렸으니 아무래도 게이머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게이머의 가치를 폭등시켰다.
탑클래스 게이머를 후원할 수만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수백억을 투자한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회 국가대항전에 참가한 224명 게이머들이 후원 받는 금액이 평균 5억에 불과한 이유?
아직 제대로 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Satisfy 게이머들 본인이 스스로의 가치를 아직도 몰랐다.
아무래도 집에서 게임만하는 인물들답게 경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에 대한 기업들의 생각은?
가능할 때 선수들의 단물을 쪽쪽 빨아먹는 것이었다.
조만간 선수들을 관리하는 전문 매니지먼트들이 발족하게 되는 건 당연한 생리.
그때가 되면 선수들의 가치가 폭등할 터이니, 그날이 오기 전까지 기업들은 선수들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최대한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다.
선수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40억을 제시한 것이 그 증거다.
“의외로 세게 나오네.”
그리드의 답장을 확인한 혜성그룹 홍보팀장 육시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그리드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생각지 못했다.
‘이게 다 라디다스 때문이야.’
지발이 라디다스로부터 36억을 후원받은 게 기폭제가 된 것일 터다.
선수들이 스스로와 지발을 저울질해보면서 스스로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드는 자신의 가치가 지발의 가치보다 높다는 판단 하에 40억을 제시한 것일 테고.
“…뭐, 적절하지.”
솔직히 말하면 적절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최고다.
그리드에게 40억을 후원하는 대가로 혜성그룹은 수천 억, 아니 어쩌면 수조 원 가치의 기업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
그만큼 그리드가 지닌 파급력은 대단했다. 그의 세계적인 인기는 날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드 본인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씨익,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생각해본 육시현이 회장 직통 회선으로 전화연결을 시도했다.
그리고 잠시 후.
회장과 논의한 끝에 그녀는 최상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드에게 선심 쓰듯 100억을 건네주고, 2년 장기 모델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제3회 국가대항전부터는 선수들의 몸값이 폭등할 것이 분명한 시점에서 미리 그리드를 싼값에 묶어두는 건 엄청난 이득이었다.
40억을 달라는 사람한테 무려 그 2배 이상의 돈을 쥐어준다면 혹할 게 분명하다는 확신도 있었다.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저도 파리거든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드의 가치는 올라가고 있다. 다른 기업들 또한 그리드와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면서 다급히 그리드에게 답장을 보내는 육시현이었다.
그리드의 대답은 OK였다.
“좋아.”
육시현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거울 앞에 앉은 그녀가 최대한 본인의 미모를 가꿨다. 영업의 기본은 호감을 전달하는 것이었으니까.
***
“돈 벌러 다녀올게.”
이제 막 4강전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미국 대 일본.
러시아 대 아르헨티나.
구도부터가 무척 흥미로운 상황이었고 관람하면 필시 큰 공부가 될 터였다.
한데 이 중요한 대목에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극검이 당황했다.
“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방송으로 보죠, 뭐.”
어차피 관객석에서 봐도 모니터로 봐야하는 건 똑같다. TV로 봐도 별 차이 없었다. 특히 샹그X라 호텔 객실의 TV는 3D를 지원하는데다가 무려 120인치였다. 차라리 TV로 보는 게 나았다.
“저도 같이 갈게요.”
유라가 그리드를 따라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기업과의 거래를 하러가는 자리에 그리드 혼자 보내려니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리드가 거절했다.
“혼자 할 수 있어.”
여태까지, 돈이 오가는 자리엔 항상 유라가 함께해줬었다.
그간 그녀를 보고 배운 게 있었으므로 그리드는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네게 의지했다가는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가 될 것 같고. 애초에, 네가 언제까지고 나와 함께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언제까지고 함께할 수 있다. 라는 말을 유라는 하고 싶었지만,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그리드가 자리를 떠나버렸다.
***
에펠탑 주변은 늘 번잡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대항전이 한창인 시기.
국가대항전의 압도적인 시청률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거리가 한산했다.
늘 호황을 누리던 길가의 카페들도 손님이 몇 없었다.
덕분에 그리드는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홀로 앉아있는 동양인 여성이라고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육시현 팀장님?”
“안녕하세요, 신영우님. 세계적인 스타를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드의 부름에 응답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공손히 인사했다. 화사한 미소를 피어올린 그녀가 그리드에게 명함을 건넸다.
확인한 그리드가 그녀 건너편에 앉았다.
육시현이 내심 당황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와 얼굴을 보고도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는 남성, 그녀로선 생소했기 때문이다.
‘유라, 지슈카와 동시에 사귄다기에 여성편력이 심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네.’
멋대로 해석한 육시현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혜성 그룹의 사회적 입지와, 혜성 그룹의 후원을 받을 경우 그리드가 누릴 수 있게 될 혜택 등을 온갖 미사어구로 치장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도중에 말을 잘랐다.
“결론만.”
내가 요구한 40억을 줄 수 있는지만 말하라 이거다.
이에 육시현이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100억을 드리겠습니다. 단, 단발성이 아닌 2년 계약을 조건으로요.”
“…”
그리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눈동자조차 미동하지 않았다.
육시현의 예상과 달랐다.
‘개인이 100억이라는 단위를 듣고도 침착해?’
게임 속 그리드의 모습은 야수에 가까웠다. 늘 난폭하게 적을 짓밟았고 감정적이었다.
한데 실제로 보니 굉장히 스마트한 인물이었다.
그리드의 현재 입지와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한 육시현이 입맛을 다셨다.
소유욕을 느낀 것이다.
한편, 그리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크게 놀라고 있었다.
‘100억?’
2년의 계약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리드가 바랐던 것 이상의 대우다.
100억!
어떤 금수저들에게는 ‘부모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상가건물보다 훨씬 낮은 액수.’로 하찮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서민 출신인 그리드에게 있어선 무척 큰 개념이었다.
어지간한 레전드리 아이템 4~5개의 가치에 해당하는 금액이 아닌가?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지금까지 만든 레전드리 아이템은 총 12개에 불과하고 말이다.
‘이게 웬 횡재야?’
라고 생각하면서 헤벌쭉 해지려던 그리드가 문득, 얼굴을 다시 굳혔다.
라우엘을 1년 이상 곁에 두고 배웠던 온갖 지식과 처세술, 그리고 확장 된 사고력을 기반으로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나의 가치가 내 생각보다 높았던 거다.’
세상에 괜한 호의는 드물다. 특히 비즈니스로 얽힌 관계라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40억을 제시했는데 100억을 준다고 한다?
‘2년 계약… 어쩌면 내년, 내후년 내 몸값은 100억을 아득히 초월할 수도 있다는 뜻.’
눈앞의 욕심을 쫓아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시간을 가지고 침착하게 생각해본 그리드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군요.”
당연히 당황스럽겠지!
자신의 가치를 이토록 높이 쳐주는 회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이제 처음 알았을 테니까!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는 육시현 팀장에게 그리드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종목 당 40억의 후원을 바란다고 했더니만 2년 계약을 조건으로 100억을 주겠다니… 혜성 그룹은 도둑놈입니까?”
“…?”
육시현 팀장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깨닫고는 당혹하였다.
‘도둑놈은 당신이잖아!’
뭐, 엄밀히 말하면 그리드가 합당했고 혜성 그룹이 도둑놈이 맞기는 했지만.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속에.
띠링~
그리드의 핸드폰으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아니, 한 통이 아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연속적으로 신호음을 보내는 그리드의 핸드폰!
불안한 표정을 짓는 육시현 앞에서 문자 내용을 확인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목 당 35억으로 합의 보자던 회사 하나가 결국 제 요구에 응해 40억을 제시했군요.”
물론 뻥이다.
하지만 현실가능한 수준일 거라고 그리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육시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41억! 41억으로 회사에 건의해보겠습니다!”
“…핫.”
돈이라는 거, 없는 사람들에게만 지독히도 애틋한 것이었구나.
돈의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실소를 흘렸다.
‘하긴, 스포츠 선수 중에는 연봉이 천 억 단위인 사람들도 있는 세상이니까.’
그들보다 내 가치가 낮을까?
지금 시대에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가상현실게임의 인기가 높은 시대이니까!
정확하게 판단한 그리드가 커피를 주문하더니 말했다.
“42억. 제가 이 커피를 다 마시기 전까지 확답해주시길.”
“…”
하필이면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그딴 말을!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에 불과한 커피 잔을 바라보면서, 육시현은 다급히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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