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4화
“그리드!!”
그리드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온 인물, 다름 아닌 블러드 워리어 카츠였다.
의외의 인물이었던 까닭에 그리드는 내심 놀랐다.
‘얘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리드는 카츠와 인연이 없었다.
아직 초보였던 시절.
+6까지 강화한 <이상적인 단검>을 자랑한답시고 시장에 뛰쳐나갔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된 카츠의 8강짜리 무기를 보고 패배감을 느꼈던 기억이 하나 있는 게 전부다.
“당신이 웬일이야?”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카츠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게 등급 성장형 아이템을 만들어줘라! 돈이라면 달라는 대로 주겠다!!”
“…”
과연 다이아몬드 수저다운 대사다.
카츠가 일본 굴지의 재벌가 핏줄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한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지만 제작 의뢰는 안 받아.”
정확하게 말하면 못 받는 거다.
등급 성장형 아이템을 뜻대로 만들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설령 만들게 된다고 해도 판매 우선 대상은 템빨단원들이었으니까.
“크으…!”
부정적인 답변을 받은 카츠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츠의 별명으로는 개차반, 쓰레기, 싸가지, 무개념 등이 있는 바.
그리드는 카츠가 어쩌면 위협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경계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제아무리 카츠가 남을 업신여기고 제멋대로인 성격에다가 공식석상에서조차 반말을 찍찍 뱉는 무개념일지언정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와의 관계에서 아쉬운 입장은 자신임을 잘 알았기에, 그는 성격을 억누르고 자세를 낮췄다.
“너의… 아니, 당신의 아이템을 구입할 자격을 얻기 위해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 녀석 보게.’
그리드는 카츠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할 각오가 된 인물 같았다.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성격을 차치할 경우 카츠라는 인물의 가치는 무척 높다.
그 점을 고려하고 생각해본 그리드가 판단했다.
“라우엘에게 가서 물어봐.”
“당신의 참모 말인가?”
“그래, 내가 만든 아이템을 갖고 싶다면 라우엘의 요구에 따라서 처신하도록 해. 라우엘의 판단에 따라서 당신을 위한 아이템을 제작해줄 수도 있으니까.”
라우엘이라면 카츠를 유용하게 써먹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리드였다.
“…알았다.”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던 카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드는 감회에 젖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인간이 이제는 내게 고개를 숙인다라…’
비단 카츠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장장이로서의 내 능력이 만천하에 과장되게 공개 된 이상, 앞으로 무수한 저명인사들이 내게 접근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 진짜 거물이네.’
이미 성공한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자부심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이 자부심이 오만으로 변질되어선 안 된다는 사실, 그리드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바 있다.
‘들떠서 좋을 거 없어. 이럴 때일수록 더욱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한다.’
주목도가 너무 높다.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조심해야만 했다. 자칫 빌미라도 잡혔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심호흡하며 마음을 달랜 그리드가 선수대기실로 이동했다.
“축하드려요.”
“갓리드! 난 네가 해낼 줄 알았다!!”
한국 대표팀 선수 대기실.
앞서 와있던 유라와 극검이 그리드를 반겼다.
그들은 그리드의 우승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금메달을 딴 덕분에 한국이 종합 순위 1등을 노려볼 수 있게 됐고, 이로 인해서 자신들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지게 생겼으므로 기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드에 대한 호감을 기반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늘 격려해줘서 고마워.”
안 어울리게도 예쁜 말투로 화답한 그리드가 소파에 앉았다.
극검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우리 갓리드가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아, 생각해보니.
기껏 만든 등급 성장형 아이템을 빼앗기고 멘탈이 터져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저런 상태로 잠시 후 있을 <펫 마라톤>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걱정한 극검이 그리드의 멘탈을 수습시킬 방안을 떠올려보는 그때였다.
“잠시 눈 좀 붙일게요.”
소파에 등을 깊숙이 뉘인 그리드가 눈을 감았다.
그리드의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 Satisfy에 접속해서 노에의 상태를 한 번 더 점검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눈을 감고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바로 호출이 들어왔다.
펫 마라톤 참가자로서 기자회견장에 출석해달라는 내용의 호출이었다.
“도통 쉴 틈을 안 주네.”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이래서 다른 선수들은 하루 2개 종목에 참가하는 일을 자제하는 것이다.
‘그리드의 집중력과 체력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을 감추지 못한 극검이 물었다.
“8시간 동안 망치질을 해댔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 내가 대신 회견장에 나갈 테니까 조금 더 쉴래?”
“후로이라면 또 몰라도, 당신을 내 대변인으로 세우기엔 좀…”
두 유 노우만 연발할까봐 불안하다.
‘그래도 후로이보단 차라리 극검이 낫겠구나.’
후로이가 기자들에게 패드립을 날리는 광경을 상상해본 그리드가 몸서리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
“호오… 그리드님과 그런 일이 있으셨다고요?”
펫 마라톤을 앞두고 시끄러워진 관중석의 한쪽.
카츠가 자신을 찾아온 경위를 듣게 된 라우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드가 사람을 다루는 능력까지 터득해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카츠의 입장을 이용해서 내게 그를 활용하게끔 유도하시다니… 정말이지 여러 방면으로 성장해나가시는군.’
본래 그리드는 배움이 느린 인물이었다.
남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똑같이 노력하고 경험할지라도 늘 뒤쳐졌다.
하지만 번헨 열도를 다녀온 순간을 기점으로 확 바뀌었다.
그의 성장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큭큭큭, 이것 참 흥미롭군요.”
오글오글!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림으로서 카츠의 손발을 오그라지게 만든 라우엘이 생각해보았다.
‘카츠라…’
무력, 재력, 일본에서의 입지 등을 고려해봤을 때 카츠는 필시 S급 인재였다. 이용할 수 있는 구석이 무궁무진했다.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템빨단원 대부분이 이미 성격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에 딱히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얻을 수 있을 때 얻어놓는 게 좋겠지.’
판단한 라우엘이 카츠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길드에 가입한 전력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왜입니까?”
“남에게 간섭받는 게 싫으니까. 규칙이라는 건 혐오하고.”
“와, 당신.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기절했겠네요. 군대 다녀와야 했을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뺐을 거다. 아니, 근데 그런 질문은 갑자기 왜 하는 거지?”
“템빨단에 가입하시라고요.”
“내가 템빨단에?”
생뚱맞은 헛소리에 카츠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싫다.”
일고의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카츠였지만 예상했다는 듯, 당황하지 않은 라우엘이 싱글벙글 웃었다.
“싫으면 말고요. 그리드님의 제작 아이템은 영영 얻지 못하게 되겠지만.”
“…”
카츠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지간히도 그리드의 아이템이 탐나는 눈치였다.
‘뭐, 당연할 테지.’
카츠 또한 지존을 목표로 하는 자다.
그는 벌써 2년도 더 전부터 랭킹 1위를 차지하겠노라고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기에 템빨을 원하는 것이다.
‘어차피 패는 이쪽에 있다.’
라우엘은 여유가 넘쳤다. 그리드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카츠에게 다시 제안했다.
“템빨단에 가입하세요.”
그리드님의 노예가 되십시오, 라는 말은 애써 삼킨 라우엘이 충격적인 조건을 덧붙였다.
“단, 템빨단에 가입하시려면 PvP에서 그리드님을 꺾으셔야만 합니다.”
“그리드를 꺾으라고?”
“네, 사정상 그분은 반드시 패배하셔야만 하거든요. 당신의 전투 스타일을 고려해봤을 때 그리드님의 대항마로 삼기에 무척이나 적합해 보이고… 어떻습니까? 제가 그리드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까 한 번 도전해보시죠?”
“…”
라우엘은 그리드의 최측근이 아니었던가? 한데 어째서 그리드의 탈락을 바라는 걸까?
이와 같은 의문을 카츠는 품지 않았다.
인간의 의리 따위, 욕심 앞에서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미약한 것임을 어려서부터 지켜보며 자랐던 덕분이다.
지금 카츠가 느끼는 감정은 오로지 하나였다.
분노!
“그리드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개소리 작작해라! 네가 방법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리드를 꺾을 수 있으니까!”
카츠는 블러드 워리어로 막 전직했던 수년 전 시점과 비교해서 성격이 많이 변했다.
세상만사가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에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고 그때부터 오만을 버렸다.
즉, 지금 그가 그리드를 이길 수 있다고 외친 것은 오기에서가 아니라 합당한 근거 하에 내린 판단이었다.
“좋아, 그리드를 꺾어주겠다. 또한 너희들이 날 어떤 식으로 이용하든지 상관 않겠다. 뭐가 됐든 난 그리드의 제작템을 얻을 수만 있으면 그걸로 되니까. 단, 만약 날 이용만 해먹다가 뒤통수를 친다면 그땐 각오해야할 거다. 우리 가문의 총력을 쏟아서라도 처단할 테니까.”
“후후훗… 이로서 우리의 계약은 성립되었군요.”
“…”
카츠의 피부 위로 닭살이 돋았다.
***
펫 마라톤에 참가한 선수는 총 53명.
각국에서 1.5명씩 참가한 격이다.
그들이 수백 명의 기자들을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리드 선수는 지옥제일마수 멤피스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멤피스는 홀로 수십 마리의 비룡을 압도하는 위용을 뽐냈고요.”
“펫 마라톤의 우승자는 올해도 그리드 선수가 될 것이라는 게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입니다만, 선수 여러분께서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선수들에게 과연 그리드에게 대항할만한 저력이 있을까?
전 세계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었다.
이에 선수들은 쉽게 대답했다.
“Satisfy에 완벽한 존재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노에의 약점을 파악했고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노에는 그리드에게 금메달을 안겨주지 못할 겁니다!”
“…지겹지도 않냐.”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그리드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드래곤 X도 아니고 매번 레퍼토리가 똑같아?’
경기 시작 전에는 자신만만하게 굴다가 결국 패배하고 울상짓는 패턴 말이다.
***
기자회견이 끝나고 30분 후 펫 마라톤이 시작됐다.
“냥!”
그리드의 곁으로 노에가 사지를 大자로 펼치면서 등장했다.
녀석은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잘 먹고 잘 지낸 건지, 검은 털에는 윤기가 좔좔 흘렀고 촉촉한 코끝과 짧은 혓바닥은 선명한 핑크색을 띄우고 있었다. 발바닥은 더욱 더 말랑말랑해 보였다.
“지옥제일마수님 등장이시다! 냥!”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내밀고 외치는 노에!
ㅅ모양의 입 끝을 말아 올리며 엣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무시무시한 놈… 귀여움 수치가 더욱 더 상승한 걸 보니 레벨이 엄청나게 올랐나보군!”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야.”
비룡을 소환한 다른 선수들이 노에의 강력한 포스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긴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그들은 지난 1년 동안 어렵사리 습득한 정보들을 통해서 멤피스의 약점을 완벽하게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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