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5화
펫 마라톤에 참가한 53명의 선수들 중 그리드를 제외한 52명은 펫과 관련한 스페셜리스트였다.
클래스부터가 몬스터 테이머 계열이었으므로 그들의 펫에 대한 이해도와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이 이번 국가대항전에 대비해서 멤피스의 공략법을 연구하고 성공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옥제일마수라는 어마무시한 이명을 지녔다고는 해도…’
‘결국 멤피스는 고양이과 몬스터에 불과하다.’
‘고양이과 몬스터의 약점은 수도 없이 많은 법이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비룡을 소환한 선수들이 거기에 추가로 또 새로운 펫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소환한 펫은 의외로 비룡처럼 강력한 펫이 아니라 자이언트 글로우웜, 골드 코크로치, 라이트 버터플라이 등의 곤충형 몬스터였다.
전투능력이 약하고 지능도 낮아서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놈들이었다.
“뭐지?”
“별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 없는 건가?”
펫 마라톤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펫의 전투능력과 민첩함, 그리고 지구력이 관건이 된다.
다른 펫들을 견제함과 동시에 가장 먼저 목적지까지 도달해야만 했으니까.
한데 약해빠진 곤충형 펫을 소환하다니?
예상치 못한 사태에 혼란을 느낀 시청자들이 술렁였다.
반면 전문가들은 선수들의 의도를 즉각 파악했다.
『선수들이 고양이과 몬스터의 약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군요.』
『시청자여러분께는 생소할 저 비주류 펫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빛을 생산한다는 점이죠.』
『그리고 고양이는 빛에 사족을 못 쓰는 생물이지요. 특히 움직이는 불빛만 보면 만사 제쳐두고 그걸 쫓아가려하는 습성을 지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이언트 글로우웜과 골드 코크로치, 그리고 라이트 버터플라이는 멤피스의 카운터로 작용할 수도 있겠죠.』
자이언트 글로우웜, 골드 코크로치, 라이트 버터플라이.
이 세 종류의 몬스터는 자체 발광하는 능력이 있었다.
실지렁이처럼 생긴 2미터 길이의 자이언트 글로우웜은 꼬랑지로부터 은은한 불빛을 깜빡거렸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골드 코크로치는 본인의 몸을 황금처럼 강렬하게 번쩍였으며, 유려한 날갯짓을 자랑하는 라이트 버터플라이는 이동경로에 빛의 가루를 뿌렸다.
하나 같이 아름다운 불빛이었고 이는 사냥감을 현혹시키는 용도로 사용됐다.
녀석들을 본 노에가 입 끝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뇽. 뇽뇽.”
안 그래도 커다란 눈동자를 더욱 더 크게 만든 노에.
이상한 소리로 울면서 바닥에 납작 엎드린 녀석이 통통한 엉덩이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몬스터들이 뿜어내는 불빛에 시선을 사로잡힌 채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면서 꼬랑지를 살랑였다.
마치 쥐를 사냥하려하는 고양이의 모습 같았다.
“뭐하는 거야?”
정신 나간 녀석처럼 눈동자를 휙, 휙, 돌리면서 곤충들이 흩뿌리는 빛을 쫓는 노에의 요상한 행동에 당황한 그리드가 다급히 노에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태:사명감
(나는 저 반짝이는 것들을 꼭 잡아야만 한다! 냥!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저것들을 사냥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냥냥!)
“이게 뭔…”
그리드가 알고 있는 노에의 약점은 꼬리다. 하여 철저히 대비하고자 꼬리보호대까지 만들어 입혔다.
한데 정작 약점으로 공략당한 부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그리드가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때였다.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시간을 재고 있던 심판이 소리치면서 펑! 마법의 구슬을 터뜨렸다.
폭발음이 신호가 되어 출발선상에 서있던 다른 선수들의 비룡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급기야 날아가기 시작하는 놈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리드에게 다가온 다른 선수들이 떠들어댔다.
“어떻습니까, 그리드?”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상대했던 사람들과 우리는 꽤나 다르죠?”
작년 국가대항전과 올해 국가대항전은 양상이 매우 달랐다.
간단히 말해서 올해가 훨씬 더 전문적이다.
작년의 참가자들은 단지 비룡이라는 최강 펫의 주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을 뿐, 펫 관련 종사자들은 아니었던 반면 올해의 참가자들은 완벽한 전문가들이었으니까.
이들은 작년의 참가자들과 달리 노에에게 위축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갖췄고 지금도 실제로 노에를 무력화시켜놓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리드에게 선수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뭐, 부끄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분야에서는 당신이 최고이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분야에서는 최고일 뿐이니까요.”
“그래, 그리드. 혹시라도 열 받아서 우리한테 악감정 품지 말고 좋게 생각하라고. 애초에 자네는 이 종목에서 우리를 이길 수가 없는 입장이야. 아무도 자네를 무력하다고 비난하지 않을 걸세.”
“…”
그리드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뇽뇽. 뇽.”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불빛들을 쫓아 살금살금 다가가는 노에를 그저 잠자코 지켜볼 따름이었다.
선수들이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라도 저항할 생각은 마세요. 조련 스킬이 없는 당신은 최대 3마리의 펫밖에 거느릴 수 없고 또한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펫은 2마리에 불과하잖아요?”
“반면 우리는 펫을 최대 5마리까지 동시에 소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설령 비룡급의 펫을 소환할지라도 우리가 또 새로운 펫을 소환해서 간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어요.”
“하하, 마음 같아서는 직접 검을 뽑아 쥐고 싸우고 싶을 테지만 어쩌겠는가? 펫 마라톤은 오로지 펫을 위한 무대. 자네는 직접 나설 수 없네. 그저 잠자코 지켜보시게.”
“한 번에 5마리라…”
가만히 듣고만 있는가 싶던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데? 5마리를 소환할 수 있다면서 왜 당신들은 고작 2마리씩의 펫밖에 소환하지 않은 거지?”
마치 암묵적인 룰이 있다는 듯이, 선수들은 노에 견제용 펫 1마리와 비룡 1마리씩만을 소환한 후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비룡들을 쫓고자 이동을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그리드가 추측해보였다.
“한 번에 여러 마리의 펫을 소환하게 되면 통제하기가 좀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비룡과의 거리가 이 이상 벌어지면 통제력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이야.”
“…”
선수들이 내심 당황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을 마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리드의 뻔뻔한 태도가 놀라웠던 까닭이다.
“뭐 그런 당연한 얘기를 새삼스레 스스로 알아낸 양…”
어이없어하며 혀를 내두른 선수들이 더 이상 그리드를 상종하지 않고 신속히 이동했다.
노에가 무력화 된 지금.
그들은 더 이상 그리드를 적수로 인식하지 않았고 자신들만의 리그를 펼칠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캬옹!”
자이언트 글로우웜의 깜빡이는 꼬랑지를 향해서 달려들었던 노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자이언트 글로우웜이 자신의 몸 주변으로 요새처럼 펼쳐놓은 보이지 않는 실에 몸을 베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심지어 중독 상태까지 보이는 노에를 확인한 선수들이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됐다. 이걸로 그리드는 견제대상에서 완전히 벗어났어.’
‘이제부터 우리들만의 진정한 승부가 시작된다!’
유일한 변수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기뻐하는 선수들.
안타깝게도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드에게는 숨겨둔 패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나와라, 랜디.”
주르륵.
그리드가 명령하자 허공으로 떠오른 그리드의 펫 인벤토리로부터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슬라임?’
새로운 펫을 꺼내는 그리드를 순간적으로 경계하였던 선수들이 콧방귀를 이내 뀌고 말았다.
“고작 슬라임 따위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마지막 발악치고는 너무 초라한 것 같은데요.”
그리드는 펫 분야의 비전문가다.
멤피스야 운 좋게 레이드나 퀘스트를 통해서 얻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후 또 새로운 펫을 길들인다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을 터였다.
그래서 기껏 키운다는 펫이 슬라임인 것이고.
귀엽고 가상하여 선수들이 미소 짓는 그때였다.
“나로 변해라.”
그리드가 검은 액체에게 괴상한 명령을 내렸고, 그와 동시에 액체가 꿈틀거리더니 급기야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액체가 그리드와 꼭 닮은 모습으로 변신한 것이다!
“슬라임이 아니라 도플갱어였다고?”
“검정색 도플갱어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선수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러모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도플갱어의 길들이기 난이도는 무려 A급으로서 수준 높은 펫 조련사가 아닌 이상 길들이기가 무척 힘든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리드의 도플갱어는 일반적인 도플갱어와 달라보였으므로 경계심도 느꼈다.
“거참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군.”
“과연 갓리드라고 칭송받을만 하네요. 아주 다재다능하세요.”
선수들이 손뼉까지 쳤다. 경계심을 품고는 있었지만 크게 긴장하진 않았다.
도플갱어의 전투능력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몬스터 시절의 도플갱어라면 또 모를까, 펫으로 길들여진 도플갱어의 복제능력은 매우 미약했다.
주인의 모습을 복제해봤자 능력치는 최대 10퍼센트밖에 복제되지 않는 수준.
만약 그리드의 도플갱어가 네임드급이라고 가정할지언정 최대 15퍼센트 정도의 능력치밖에 복제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경계할 가치도 없어.’
앞서 소환해둔 곤충형 몬스터들만으로도 도플갱어 따윈 쉽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선수들에게 랜디가 절망을 선사했다.
“파그마의 검무.”
“…뭣이!”
도플갱어가 스킬을 복제해? 그것도 레전드리 등급의 스킬을?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급히 새로운 펫을 소환하려던 선수들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파(派).”
쿠콰콰콰콰콰콰쾅!!
굽이굽이 물결치면서 뻗어져나간 검기의 파도가 수십 마리의 자이언트 글로우웜과 골드 코크로치, 그리고 라이트 버터플라이를 일거에 휩쓸어버렸고…
“노에 대책용으로 급히 길들였을 놈들의 레벨이 높을 리 없겠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수십 줄기의 잿빛 기둥을 등지고 선 그리드가 선언했다.
“미안하지만 금메달은 내가 가져가겠다.”
그리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템빨단의 수장이자 레이단의 영주로서 위신을 잃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뱉은 말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웬만해선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았다.
그렇다.
국가대항전 개막식을 앞두고 진행되었던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은 최소 다섯 개의 금메달을 딸 것이다.’라고 선언했던 시점부터 그리드는 이미 펫 마라톤에서의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잡아라, 노에.”
“냥!”
빛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정신을 차린 노에가 힘차게 대답한 뒤 날아올랐다.
앞서 비룡들이 이용했던 경로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녀석의 속도는 비룡들의 속도를 완벽하게 상회하고 있었다.
“제길! 막아야 된다!”
조급해진 선수들이 일제히 전투용 펫을 소환, 노에의 발목을 붙잡고자 시도했다.
어느 순간부터 완전한 동맹을 맺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 모습에 괘씸함을 그리드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맡긴다, 렌디.”
“나만 믿어.”
철컥!
파그마의 모습을 복제한 상태로 그리드에게 82회의 패배를 안겼던 존재.
레벨이 240을 넘은 시점부터 <복제>스킬이 마스터를 넘어 강화되고 과거의 힘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는 ‘최강의 도플갱어’가 쇄도해오는 수십 마리의 펫들에게 홀로 맞선다.
그 신위, 세상을 전율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드의 신화가 써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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