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2권 - 7화
“이런 빌어먹을!!”
우당탕탕!!
갱신 된 종합순위를 확인한 지발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탁자를 발로 차 날렸다.
평소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그런지 괴력이 엄청났다. 멀찍이 날아가 문짝에 처박힌 탁자가 산산이 조각났다.
“미국이…! 세계 최강인 우리 미국이 1등을 놓친다고!!”
미국은 지난 2세기 가까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스포츠만 예를 들어도 미국의 올림픽 종합순위 1위 횟수는 무려 25회다.
Satisfy국가대항전에서 또한 미국이 우승을 차지하는 건 지극히 당연해야하는 결과였고, 미국의 국민들과 선수들 모두가 그 결과를 의심한 바 없다.
한데 결과가 바뀌게 생겼다.
오로지 단 한 명!
그리드에 의해서 말이다!
“그 미친 괴물 새끼…!”
지발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리드의 실력을 폄하할 수가 없었으므로 실력을 인정해야만 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미친놈이 대단해도 너무 대단해서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순전히 운빨…”
이라고 우겨보려고 하지만 역시 무리가 있다.
납득이고 나발이고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지발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대체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놈은 그런 괴물이 된 거지?”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지목됐던 약점들을 모조리 극복하고 도리어 강점으로 부각시켜서 나타난 그리드다.
지발이 봤을 때 사람이 1년 만에 그렇게까지 성장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놈… 설마 원래는 천재 중의 천재였던 건가?”
작년까지는 그냥 대충대충 살았기 때문에 실력발휘를 제대로 못했던 거고?
진지한 의문을 품는 지발을 보면서 라우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리드님을 천재라고 오해하다니…’
엄밀히 따지면 노력의 천재가 맞았지만.
어찌됐든 그리드님에 대한 평가가 오르니 기분 좋다.
라우엘이 피식, 기뻐서 헛웃음을 흘리는 동안 지발의 분노는 판미르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다 저자 때문이다.’
판미르가 그리드를 도발하지만 않았어도.
그리드가 대장장이 제작 승부에 출전하지만 않았어도 미국은 지금쯤 종합 순위 1위를 공고히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미국이 최악의 국면에 놓이게 된 계기는 판미르에게 있는 게 맞았다.
지발의 마음 같아서야 당장 판미르에게 비난을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판미르는 같은 미국 대표이기에 앞서서 스네이크 길드의 대장장이였고 결코 잃으면 안 되는 전력이었으니까.
“…하.”
또 따지고 보면, 레이드에서 금메달을 빼앗긴 내 잘못도 크다.
깊이 한숨 쉰 지발이 결국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라우엘에게 물었다.
“우리가 마차 운반에서 금메달을 딸 가능성은 아예 없는 건가?”
“아시다시피 마차 운반은 마차를 호위하는 용병 NPC들이 끝까지 흑심을 품지 못하도록 언변을 잘 구사하거나 매력 스탯이 높아야 합니다. 제퍼님께서 현혹의 대가이기는 하지만 지속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현실적으로는 은메달을 차지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결국 마차 운반의 우승국은 웅변가와 상인을 대동한 국가가 될 공산이 컸다.
만약 그리드가 마차 운반에 출전했다면 상식 초월의 매력 스탯으로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을 테지만.
“크음… 그럼 PvP는?”
재차 묻는 지발에게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저는 스컬님의 강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공성전에서도 매번 스컬님께 별동대를 맡겼던 거고요. 하지만 역시 그리드님과 크라우젤님하고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
지발은 억울했다.
현재 메달 현황을 보라!
1위 한국은 금메달을 5개 가지고 있을 뿐이고 3위 러시아는 금4개, 은3개, 동2개밖에 없다.
반면 미국은 금4개와 은4개, 그리고 동메달까지 5개를 보유 중이다.
단순히 메달의 개수만 놓고 보면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한데 금메달 하나 때문에 1위를 목표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진심으로 열 받았다.
“금메달만 따면 장땡인가…”
국민들과 언론사들이 보내올 비난의 화살을 당최 무슨 수로 감당해야만 할까?
지발은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미국의 종합순위 1위를 이끌어놓고도 무시 못할 비난을 받았었다.
그리드에게 몇 개의 금메달을 빼앗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데 이번엔 아예 1위를 빼앗기게 생겼으니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난을 받을 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연신 한숨만 쉬는 지발을 잠자코 지켜보던 스컬이 입을 열었다.
“아직 PvP의 대진은 결정되지 않았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초반부터 맞붙을 수도 있는 거고 내가 그들 중 하나를 꺾을 수도 있는 일이다. 벌써부터 우승은 물 건너갔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 솔직히 나로선 불쾌하군.”
그래, 미국은 최강이다. 대표 전원 각 분야에서 최고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비록 스컬이 그리드와 크라우젤과 비교하면 포스가 떨어질지 몰라도, 그 또한 대인전에는 자신이 있었고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안하다, 스컬. 당신을 믿어보도록 하지.”
냉정을 되찾은 지발이 스컬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콧방귀 뀐 스컬이 악수를 거부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
통합랭킹 2위 지발의 별명은 동네북이었다.
***
『…이와 같은 이유로 마차 운반의 우승국은 스페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종합순위 1위국은 PvP에서 결정될 거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국가대항전은 이미 3달 전에 공개 된 일정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펫 마라톤 종료 후 국가대항전은 또 3일간의 휴식기를 갖게 되었다.
대회 중간마다 이렇듯 휴식기가 포함 된 이유?
선수들에게 정비할 시간을 주겠다는 취지였지만, 그 말을 누가 믿겠는가?
제2회 국가대항전의 개최국인 프랑스 정부가 관광객을 더 오래토록 유치하고 각국 방송사들은 더 많은 광고료를 뽑아내기 위해서 담합하여 대회일정을 조절했다는 사실, 바보가 아닌 이상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시대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가 낳은 괴물 그리드는 최근 혜성그룹 홍보팀장 육시현과 통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면 다음 대회에서도 잘 부탁드릴게요.
“입금만 잘 해준다면야.”
-후훗, 저희가 또 계산은 철저하답니다. 그럼 이만…
매력적인 웃음소리를 흘린 육시현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젊고, 영향력 있고, 거기에 돈까지 많은 그리드를 매료하여 연인이 되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여 매번 별 것 없는 이유로 그리드에게 전화를 걸고 만남을 요구하는 등 물밑작업 중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상당한 매력이 있고 능력도 좋은 미녀’정도의 스펙으로는 그리드의 관심을 살 수 없었으니까!
그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능력도 좋은 미녀가 그리드의 지천에는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유라, 지슈카, 아이린 말이다.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그리드가 여성을 보는 눈은 무척이나 높아졌고, 지금의 그리드를 현혹하려면 최소 D… 이하 생략.
Satisfy에 접속한 그리드가 우선 <동화>의 상태부터 살폈다.
<동화>
당신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브라함의 의식을 일깨우고 하나가 됩니다.
이때 클래스가 <대마법사>로 전환되며 육체의 주도권이 브라함에게 넘어갑니다.
스킬 지속 시간:3분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9일 13시간 7분 5초
본래 동화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10일이다.
하지만 브라함이 지옥으로의 출입구를 닫는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었던 탓에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80일 이상 늘어났었다.
그 탓에 국가대항전 내내 동화를 사용하지 못했던 그리드였으나…
‘마차 운반이나 PvP의 진행 속도가 좀 느려진다면 결승전쯤에는 동화를 사용할 수도 있겠어.’
부디 결승전 전까지는 크라우젤을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해보지면 과연 바라는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또한 설령 결승까지 올라가더라도 그때에 맞춰서 동화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날지도 확신할 수 없다.
망치를 꺼내 자신의 장비를 완벽히 수리한 그리드가 그대로 대장간을 떠났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아이린, 로드를 찾아가지 않고 곧장 논밭으로 향했다.
피아로와 수천 명의 농부들이 보였다.
“너희가 밭에 콩을 심으면 뭐가 나지?”
“콩입니다!”
“이런 한심한! 아직도 농술의 극의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 콩 심은 곳에 콩과 팥이 동시에 자라나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진정한 농민이라고 내 몇 번을 말하지 않았느냐!”
“아니… 저희가 피아로님도 아니고 농술의 극의를 어떻게 봅니까?”
“콩 심고 팥까지 바라면 날강도 아닙니까?”
“허허, 하루 10만 번의 호미질을 하고도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둔함이로다.”
“…”
대화 내용을 애써 무시한 그리드가 농부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하나 같이 날렵한 근육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고 피부는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눈빛 또한 매서웠다.
손에 쥐고 있는 농기구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전사의 풍모가 엿보였다.
특히 피아로가 알테르 산맥에서 주워왔다는 화전민 출신-사실은 렌 왕자의 병사 출신들- 8백여 명은 기사급으로 성장할 여지까지 보이고 있었다.
‘미쳤다.’
농부들을 대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혹사시켰기에 상태가 저렇단 말인가?
제국의 정예 병사들보다 훨씬 더 강력해 보이는 레이단의 농부들을 확인하고 감탄하며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이내 피아로에게 다가갔다.
그리드의 기척을 이미 읽고 있던 피아로가 공손히 인사했다.
“누구보다 바쁘실 주군께서 이곳까진 어인 일로 행차하셨나이까?”
그리드가 곧장 질문을 던졌다.
“나는 여전히 크라우젤보다 약하지?”
“네.”
피아로는 일고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매정한 인간 같으니라고.’
주종의 관계를 맺었어도 피아로는 바뀐 게 없다.
격식을 차리고 충성을 다 한다고는 하나 늘 솔직했다.
주인의 기분을 헤아린답시고 사탕발림이나 하는 건 주인을 조롱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는 미명 하에 말이다!
“빌어먹을… 그래, 알았다.”
PvP를 앞두고 그리드가 피아로를 방문했던 이유는 본래 용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봤다.
용기를 얻기는커녕 뼈아픈 현실만 상기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논밭을 떠났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피아로가 이내 중얼거렸다.
“그래도 둘이 싸우면 주군께서 이길 수도 있겠지요.”
크라우젤이 강한 이유는 비상한 머리와 혜안, 그리고 감각에 있다.
전투 중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늘 염두에 둔 채 적의 행동을 예측하고 한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서 전투를 조율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그리드까지 예측할 수 있을까?
점차 많은 아이템을 보유하고 활용하기 시작한 그리드의 전투방식은 피아로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한데 피아로는 왜 이 사실을 그리드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
이유야 간단했다.
그리드가 자신과 크라우젤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냐고 물어보지 않고 단지 강함만을 논했기 때문이다.
아이템 빼고 개인의 강함만 놓고 보면 그리드보다 크라우젤이 강한 게 맞았으니까!
“논이나 갈자.”
주섬주섬 농기구를 챙긴 피아로가 다시 농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젠 대놓고 농부짓만 하는 피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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