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76화 (271/1,794)

템빨 22권 - 14화

『크리스의 네임벨류가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작년 국가대항전에서 레가스에게 패배한 전력이 있지요. 그리드의 적수는 아니라고 봅니다.』

『작년과 올해의 크리스는 엄연히 다릅니다만? 현재 시점에서는 크리스가 레가스보다 더 강하다고 보는 게 옳죠. 레가스는 수에론과 끝내 승부를 보지 못했던 반면 크리스는 수에론과 싸워서 이겼으니까요.』

『지난 1년 동안 크리스는 ‘공격력’이라는 본인의 최고 강점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것 같습니다. 그리드와 데미안의 막강한 방어력을 단순히 힘으로 파쇄시킬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크리스일 것입니다.』

『강점이 뚜렷하면 약점이 드러나는 법이죠. 크리스는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서 대부분의 스탯을 근력에 투자하였을 것이며 이로 인해서 생명력이 매우 낮을 겁니다. 그는 결코 그리드의 공격을 견딜 수 없어요. 그리드를 쓰러뜨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겁니다.』

『체력 스탯보다는 못하다지만 근력 스탯 또한 생명력을 상승시켜주지 않습니까? 크리스는 통합랭킹 3위입니다. 노하우와 지식을 살려서 적정선의 생존력을 확보해놨을 테니 문제될 것 없어요. 애초에 크리스의 대검술이 독보적이기도 하고요.』

그리드와 크리스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해설진과 전문가들은 쉽사리 승부를 예측하지 못했다.

각국 방송사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실시간 ARS를 진행, <그리드 대 크리스>의 승부예측 조사를 실시한 결과 또한 6대4.

그리드가 근소하게 앞서는 수준에 불과했다.

한편, 무대 위에 마주보고 선 그리드와 크리스는 은근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용케도 그 빌어먹을 무기를 +9까지 강화했네. 운도 좋아?”

“운이라기보다는 돈의 힘이지. 당신도 혜성그룹이라는 곳으로부터 상당한 거액을 받아 챙긴 듯한데, 번 돈 이런데 안 쓰고 뭐하는 거지? 경기 시작에 앞서서 무기 좀 강화해오지 그랬나?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손 검보다야 그리드의 대검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데.”

“…돈 쏟아 붓는 거로 해결 될 문제 같지가 않아서 말이지.”

악운에 지배당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그리드의 대검>은 저주받은 무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필이면 아이템에 자신의 이름을 갖다 붙여놔서 그런지 강화가 오지게도 안 됐다.

<그리드 셋트>만들기 프로젝트의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다짐한 그리드가 애써 마음을 달랬다.

‘그래도 뭐, 이야루그트는 9까지 강화했으니까 이걸로 만족하자.’

국가대항전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9강에 성공한 이야루그트는 흡족할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뽐내고 있었다.

레전드리 등급의 <그리드의 대검>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9그리드의 대검이라…’

기본 공격력이 1,440에 달하는 무기가 9강화까지 되어버렸으니 2,500에 육박하는 공격력을 발휘할 터였다.

일정 확률로 적의 공격 차단, 3연격 발동, 베기 공격력 30퍼센트 상승, 스킬 피해량 20퍼센트 상승, 어두운 곳에서 공격력 증가,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5회 적중 시킬 경우 무조건 크리티컬 발동, 3연격 발동 후 0.5초 내에 스킬을 연계시키면 추가 피해 발생.

화려하고 압도적인 온갖 옵션들까지 귀속 된 무기였다.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상상해본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삼겹갑으로도 못 버틴다.’

애초에 대검은 삼겹갑의 미늘에 맞물려 손상 될 확률이 거의 없다. 검날의 크기가 넓고 두꺼운 까닭에 미늘의 틈새들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엔 허리띠 작업을 포기하는 게 낫겠지.’

데미지를 최대한 피하고, 공격적으로 싸워서 이야루그트와 엘핀스톤의 반지 경험치 획득에 중점을 두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그리드.

진행자가 경기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그가 선공에 나섰다.

대검의 한계-느린 속도-를 노리고 곧바로 연(聯)을 전개하여 한손 검 이야루그트의 빠른 공격속도를 극대화시켰다. 크리스가 대처할 도리가 없도록.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시간 차 없이 생성 된 수십 가닥의 검광이 크리스의 주변으로 아로새겨졌다.

그리드는 잠시 후 크리스의 몸 곳곳으로부터 선혈이 솟구치는 광경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후읍!”

언제 들어도 특이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대검을 호쾌하게 휘두르는 크리스의 일격에 연(聯)의 검광이 모조리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크리스의 검로는 완전하다.

최단 경로를 이용함과 동시에 효과범위 또한 커서 느린 속도를 손쉽게 커버했다.

‘역시 대단하군.’

이번 국가대항전 내내 그리드가 크리스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의외로 특별했다.

그건 바로 선망.

이야루그트를 얻기 전까지 대검을 주력무기로 다뤘던 그리드였기 때문에 크리스의 대검술을 각별히 여겼다.

‘나 또한 저렇게 되고 싶다.’

‘내가 저렇게 될 수만 있었다면.’

정말이지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쩌엉!!

만월의 검광으로 수십 줄기 연(聯)의 검광을 튕겨냈던 크리스가 그대로 대검을 찔러서 그리드에게 반격을 가했다.

이야루그트로 막아내었다가 힘에 밀려 뒷걸음친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식, 설마.’

나보다 근력 수치가 높은 건가?

늘, 누구를 상대하든 근력에서 우위를 점해왔던 그리드에게 있어서 힘에서 밀린다는 것은 낯설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쩌정!

쩌저저저정!!

크리스가 기세를 이어갔다.

허리를 좌우로 반복하여 비틀면서 그리드에게 2격, 3격, 4격, 5격을 연속적으로 날렸다.

검과 검이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반발력이 그의 공격속도를 조금씩 상승시켰고, 좌우로부터 연달아 날아오는 공격을 방어할 때마다 충격을 전달 받은 그리드의 몸은 연신 들썩이며 뒤로 밀렸다.

[<이야루그트>의 내구력이 4 손상되었습니다!]

[<이야루그트>의 경험치가 0.1퍼센트 올랐습니다!]

반가운 알림창이 나타났으나 그리드는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의 연속공격에 언제까지고 정면으로 대항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까닭이다.

쩌정!

결국, 크리스의 공격에 실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야루그트와 함께 통째로 몸이 튕겨나간 그리드가 허공에 살짝 떠올랐다.

어느새 지면에 닿을 듯이 내려간 크리스의 대검이 그를 노리고 직각으로 솟구쳤다.

서걱!

그리드의 가슴이 아래서부터 위로 크게 베였다.

그리드가 경악했다.

[4,977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예상보다 더 센데?’

크리스의 공격력이 하오보다 한 수 위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평타 한 방에 5,000가량의 데미지를 입다니, 이건 거의 보스 몬스터에게 얻어맞는 기분이다.

“매직 미사일.”

평정심을 유지한 그리드가 4개의 갓 핸드를 소환, 동시에 4줄기 매직 미사일을 발사했다.

쿠콰콰콰쾅!!

크리스의 몸이 폭음에 휩싸이는 틈을 노린 그리드가 자세를 수습하고 보법을 밟아 살(殺)을 찌른다.

크리스는 이를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못했다.

크리스의 선택지는 맞으면서 때리는 것밖에 없었다.

“100톤 검!!”

‘별 무식한 스킬명…!’

쿠콰콰콰콰쾅!!

푸욱-!

크리스의 내려찍기가 그리드의 어깻죽지를, 그리드의 살(殺)이 크리스의 가슴에 닿는다.

그리드는 1만의 피해를, 크리스는 1만 7천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드의 스킬 데미지가 더 높은 대신 크리스의 무기가 더 강력했지만 방어력의 차이로 발생한 결과였다. 심지어 그리드는 엘핀스톤의 반지 덕분에 생명력을 소폭 회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위축되지 않았다.

벌써부터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그리드의 피투성이 상체를 양단 낼 기세로 재차 대검을 휘둘렀다.

정면으로 맞서는 건 최선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리드가 갓 핸드를 투입, 크리스의 공격을 방어한 후 그 틈에 자신은 극(極)의 보법을 밟았다.

이게 실수였다.

크리스의 세컨드 클래스 <폭군>이 근력 스탯을 상승시켜주는 방법은 다양했고, 그중 하나는 반경 5미터 내에 있는 ‘모든 존재’의 근력 수치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스킬이었으니까!

“흐으으읍!”

유니크 클래스의 갓 핸드는 주인의 근력과 손재주 스탯 30퍼센트를 적용받는 바!

그리드의 근력 뿐 아니라 갓 핸드들의 근력까지 일부 빼앗아온 크리스가 숨 넘어가는 듯한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쩌저저저저정!!

크리스와 맞서고 있던 네 개의 갓 핸드가 대검질 한 방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 경직되었다.

이어서, 때마침 극(極)의 보법을 완성하기 직전이던 그리드의 안면을 노리고 크리스의 대검이 꽂혀들어갔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스킬 극(極)의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8,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친!’

더 아파졌다!

크리스의 미친 듯한 공격력에 또 한 번 놀란 그리드가 마무리 일격이라는 기세로 재차 공격해 들어오는 크리스의 타이밍에 맞춰서 회(回)를 전개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크리스가 평타를 쳤기 때문이다.

회(回)로 반사 된 피해에 직격당한 크리스는 치명상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게 평타였다고?’

그리드는 어이가 없었다.

‘기세만 보면 필살기를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씨익.

크리스는 웃고 있었다.

그를 본 그리드가 깨달았다.

‘페이크였나!’

쩌정! 쩡!

쾅!!

계속되는 크리스의 맹공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고 그리드는 이야루그트를 들고 방어에 급급했다.

적색 검광과 흑청색 검광이 맞물릴 때마다 폭발하는 이팩트가 어찌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시청자들에게 황홀경마저 선사했다.

“그리드가 밀리는데…?”

“그나마 그리드라서 계속 버틸 수 있는 듯하군. 크리스의 공격력이 너무 세서 보통 플레이어였다면 방어할 때마다 경직에 걸렸을 거야.”

“그러면 지금 크리스는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공격을 구사하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진짜 세다… 원래부터 셌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세.”

“여태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크리스를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뒤늦게 깨달은 관중과 시청자들이 어쩌면 그리드가 패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그만 좀 까불어.”

근력과 무기 공격력의 차이 때문에 힘싸움에서 계속 밀리던 그리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가 판도를 뒤집을 수단을 꺼냈다.

흑화?

그걸 쓸 정도까지는 아니다.

터엉!

크리스의 대검과 충돌하면서 뒤로 젖혀진 이야루그트를 그대로 인벤토리에 회수한 그리드가 <+9실패작>을 꺼냈다.

전광석화처럼 진행 된 아이템 스왑 과정이었다.

“뭐냐, 그리드! 그건 작년 국가대항전에서도 사용했던 구형 무기가 아니더냐! 설마 승부를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

멋대로 오해하고 떠들면서도 그리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크리스였다.

공격횟수가 누적됨에 따라서 <폭군의 희열> 패시브 스킬이 발동 된 크리스가 그리드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순간이었다.

날아오는 크리스의 검격을 그리드가 정면으로 막아냈다.

콰쾅!

상어를 닮은 그리드의 +9실패작과 실패작을 모태로 만들어진 +9그리드의 대검이 맞부딪친 결과.

“……!”

크리스가 힘 싸움에서 밀렸다!

그리드는 제자리에 꿋꿋하게 버티고 선 반면 크리스의 신형은 살짝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역전 된 상황이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크리스에게 그리드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한텐 안 된 일이다만, 깡뎀 최강은 실패작이거든.”

+9실패작의 최대 공격력은 3,682.

+9그리드의 대검보다 무려 1,000이상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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