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7화
-그리드님, 지금 바로 세이렌으로 와주십시오.
-세이렌은 왜?
아이린을 기쁘게 만들어주고 싶다!
부인을 이토록 지극히 생각하는 남편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마음을 품은 채 헐레벌떡 달려가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췄다.
라우엘이 사정을 설명했다.
-적이 침공해왔습니다. 숫자는 대략 1천. 그중 약 서른 명이 3차 전직자이고 한 명은 태양급… 즉, 당신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라고 합니다.
‘태양급?’
라우엘답게 표현 한 번 거창하다.
실소를 터뜨리는 그리드였으나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예정보다 한 달이나 빠른 침공이군. 알았어, 바로 갈게.
한시라도 빨리 아이린, 그리고 로드와의 상봉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뒤로 미뤄도 좋다.
동료들이 혹시라도 해를 입진 않을까, 걱정한 그리드가 곧바로 <브라함의 부츠>를 무장했다.
그에게 라우엘이 주의를 주었다.
-현재 세이렌 내부에서는 귓속말이 제약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선발대와의 교신이 간헐적으로 끊기고 있어요. 만약, 도중에 저와의 귓속말이 먹통이 되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곧장 세이렌으로 입장해주십시오. 저는 먼저 가서 당신께서 밟으실 길을 잘 닦아놓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래… 수인족들을 최대한 보호해주길 바라마.
-당신의 바람이 즉 현실이 될지니…
오글오글!
손발이 오그라진 그리드가 귓속말을 차단하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억눌렀다.
한데, 그리드와 템빨단은 유페미나의 개인적인 퀘스트를 왜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걸까?
평소 템빨단을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유페미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려고?
물론 그 또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리드와 템빨단이 유페미나의 퀘스트를 대대적으로 돕겠다고 결정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인족과 동맹관계를 구축함으로서 세력을 확장할 기틀을 또 하나 마련하고 수인족 왕의 눈물을 수시로 공급받는 것.
그것이 템빨단의 진정한 노림수였다.
그리고 최대한 유리한 입장에서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선 세이렌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고 큰 은인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둘러 날아오르는 그리드의 귓가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마마!!”
로드였다.
현실보다 시간 흐름이 몇 배나 빠른 Satisfy 속에서 무럭무럭 자란 흑발, 청안의 아기는 어느덧 돌이 훌쩍 지나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로드…!”
시간이 촉박하다만, 너무나도 반가운 것을 어쩌겠는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드가 로드를 와락 껴안았다.
풋풋한 채취가 너무나도 좋았다.
비록 가상의 존재일지언정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이다.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가요! 아빠마마가 매일 바빠서 로드는 걱정해요!”
로드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수 개월 만의 해후였다.
대륙급 천재인지라 배움이 빠르고 생각도 금방 성숙해지는 아이일지언정 마음을 숨기진 못했다.
“아빠마마랑 놀고 싶어요! 나두 이제 아빠처럼 칼 만들 수 있어요!!”
“하핫, 그래? 그것 참 기대되는구만.”
내가 돌아봐주지 않아도 홀로 꾸준히 노력해왔구나.
참으로 기특한 녀석이다.
뿌듯함을 느낀 그리드가 로드의 보송보송한 흑발을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아들이 만든 작품을 빨리 보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금방 다녀오마. 그때까지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로드.”
“…네.”
현자 스틱세이로부터 온갖 공부를 배우는 로드다.
공작이라는 지위에 있는 아버지의 입장을 로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바쁜 건 당연한 것임을 알았다.
하여 아쉬움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커다란 눈동자가 눈물로 촉촉이 젖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녀석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어주던 그리드가 문득 놀랐다.
‘뭐지?’
이제 보니 로드의 뒤편에는 수십 명의 미소녀들이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데미안이 데려다놓았던 ‘레베카의 딸 후보’출신 소녀들이었다.
‘피아로와 함께 밭일하며 수련하던 애들이 왜 로드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는 거야?’
의문을 품는 그리드.
그의 표정을 읽은 로드가 훌쩍이면서도 설명해주었다.
우선 가장 가까이 서있는 은발 미소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누나야는 에포나에요… 로드의 첫째 애인.”
“첫째?”
그럼 설마 둘째도 있나?
설마가 진짜였다.
어느새 눈물을 완전히 훔친 로드가 이어서 적발의 미소녀를 가리켜보였다.
“이 누나야는 아르나… 로드의 둘째 애인.”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드의 애인은 무려 스물 한 명이나 되었다!
“헉…”
아직 2살도 안 된 아기한테 애인이 스물 한 명이나 있다니?
나이 서른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겨본 애인 하나 없이 곧바로 아이린과 혼인한 그리드.
그의 상식으로는 로드의 입장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친구라는 말과 애인이라는 말을 혼동하는 건가?’
라고 생각해보지만 천재 중의 천재인 로드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문제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리드에게 에포나라는 이름의 소녀가 설명해주었다.
“공작각하께서 로드 도련님을 잘 보필하라고 하시기에…”
‘아차.’
뺨에 홍조를 띄우며 수줍게 고백하는 소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리드는 레베카의 딸 후보들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피아로가 있는 논밭에서, 그리드는 필시 이와 같이 말했었다.
“앞으로 쭉 건강히,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내 아들 로드를 잘 보살펴다오.”
떠올린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때 그 한 마디가 로드에게 하렘을 선사했다고?’
레베카의 딸 후보가 정확히 200명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그리드가 자신의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아…! 아버님!! 당신은 왜 저처럼 하지 못하셨던 겁니까…!!’
아들한테 여자 좀 소개시켜주지!
“아빠마마?”
좌절하는 그리드를 로드가 걱정했다.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녀석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 평생 모태솔로인 것보다야 필시 바람둥이가 난 것 같다. 극검만 봐도 알겠어. 훌륭하다, 로드. 하지만 몸 조심하거라. 자칫하다간 뼈 삭는다.”
“웅? 뼈 삭아요? 그게 뭐에요?”
“그건… 나도 체험해보지 못해서 모르겠구나.”
하지만 로드 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겠지.
내 아들이지만 너무 부럽다. 역시 금 수저가 최고다.
주르륵.
닭똥 같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그리드가 로드와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눈 뒤 날아올랐다.
잠시 후.
로드의 그림자 속에 숨은 채 그리드를 관찰하던 카심이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드 공작… 몇 달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군.’
이전과 비교하면 표정과 말투가 온화해지고 몸짓에 여유가 넘쳤으나, 정작 기도는 빈틈이 없고 매섭다.
웃고 있는 눈매 속에 송곳처럼 박혀있는 눈동자를 엿보는 순간, 자칫하다간 기척을 읽히고 베일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몇 분이나 숨을 멈췄을 정도다.
‘도란, 네가 그리드 공작에게 반지를 맡긴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전부터 도란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아마도, 도란은 처음부터 그리드가 대성할 인물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드 공작, 당신의 소중한 이들을 위협하는 적들은 이 내가 모조리 처단하겠소. 그러니 당신은 안심하고 계속 성장하시기 바라오. 그리고 부디 그 손으로 제국을 멸해 내 일족의 원한을 갚아주길 바라오.’
***
“이젠 내가 기산지 농분지 모르겠어.”
“나도… 하지만 뭐, 강해지면 그만 아닐까?”
“맞는 말이긴 하지. 하지만 전쟁에서 농기구 들고 싸우고 싶지는 않다. 레인보우 포테이토도 지긋지긋하고…”
“헉. 방금 그 말, 블란드님 앞에선 절대로 하지 마. 그 감자중독자가 들었다간 분명히 화를 낼 거라고.”
연병장에서 ‘오전 훈련’을 끝낸 기사들과 병사들이 아스모펠의 인솔 아래 논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후 훈련’이라는 미명 하에 농사를 지어야했기 때문이다.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그들에게 측은지심이 깃든 눈빛을 보내던 아스모펠이 잠시 후 피아로와 마주보고 섰다.
일꾼… 아니, 훈련시킬 기사와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던 피아로가 씨익 웃어보였다.
“새벽부터 오전까지 고생이 많으셨네, 템빨마법기사단장.”
“이젠 자네가 고생하시게, 템빨기사단장.”
둘도 없는 친구.
한때는 간악한 무리의 간계에 빠져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살의까지 품었던 두 사내였으나, 여러 시련을 넘은 끝에 그들은 이제 과거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모두 그리드 공작 덕분이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한때 <사하란의 기둥>이라고 불리며 황제를 섬겼던 그들이 이제는 오직 그리드만을 존경하고 따른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성심이었다.
주군께서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려나?
두 사내가 동시에 그리드를 그리워하는 순간이었다.
“피아로오!!”
하늘 저 멀리서부터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낮지만 크고, 크지만 경박하지 않은 그런 목소리였다. 확실한 무게감이 있었고 귀에 또렷하게 박혀왔다.
그리드의 음성이었다.
“주군!!”
여전히 피아로만 찾으시는 건가?
오래간만에 그리드를 만나게 되었음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서운함을 느끼는 아스모펠이었다.
“안녕? 특히 아스모펠 오래간만이네. 두 사람의 노고에 항상 감사한다.”
하늘을 가로질러온 그리드가 두 사람 곁으로 내려앉았다.
순간, 수천 병사와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에트날의 구원자! 레이단의 태양! 위대하신 그리드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레이단의 영주가 된 이후로 꾸준히 들어온 태양이라는 표현.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가슴이 벅찰 지경이다.
한데 이제는 레이단의 신하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태양이라 불러주고 있다.
상기하고 기분 좋아진 그리드가 자신의 군세를 한 번 쭉 둘러보았다.
이제 숫자가 4천을 향해가고 있는 병력.
기사도 8명이나 있다.
그것도 피아로가 직접 선별하고 육성한 기사들이니만큼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된다.
‘정말 너무 행복하다.’
내 한 몸 건사하지도 못했던 한심한 찌질이가 수만 백성과 수천 병사를 거느린 군주가 되다니…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석 달 열흘을 밤새 떠들어봤자 믿어주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다.
‘나중에 자서전이라도 써볼까?’
제목은 템빨 성공신화가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