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10화
“히힛, 대체 아이템이 몇 개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질문하는 흑요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적어도 네 목숨의 개수보단 많지 않을까?”
사실, 그리드쯤 되면 흑요의 무한 부활과 클래스 변경 따위 문제될 거리도 아니었다.
죽이고, 또 죽이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이템 경험치도 올릴 수 있으므로 일석이조랄까!
“히… 히힛…”
위축 된 흑요의 얼굴이 경기를 일으켰다.
여태껏 만났던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무한 부활에 위축되기 마련이었건만, 그리드는 도리어 ‘과연 몇 번이나 부활할지 실험해보자’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덜컥 겁이 났다.
위압감만 놓고 보면 이성적인 크라우젤보다 무식한 그리드가 훨씬 더 대단했다.
“키힛!”
결국, 흑요가 퇴각을 선택했다.
그리드와의 상성이 너무 나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화르륵!
흑요가 소환한 불의 장벽이 그리드의 시야와 경로를 차단하였다.
동시에 플라이를 사용한 흑요가 허공으로 떠올랐으나 그를 놓칠 그리드가 아니었다.
마법 피해를 경감시켜주는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
찬란한 적색의 방어구를 무장한 채 불의 벽 따위 우습다는 듯이 꿰뚫고 날아오른 그리드가 흑요의 뒤를 바짝 쫓았다.
전력으로 허공을 질주하는 두 사람의 발치 아래로 폐허가 된 세이렌의 참혹한 전경이 펼쳐진다.
펑!
퍼퍼펑!!
“힛! 히히힛!”
따라잡힐 새라, 흑요는 연신 후방으로 불꽃을 발사하여 그리드를 견제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높은 생명력을 보유한 그리드였으므로 자잘한 상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마법의 폭격을 돌파했다.
굳이 피한답시고 동선을 낭비하지 않았다.
“라엘라의 불꽃하고 비교하면 하찮다.”
“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드는 높은 민첩성을 기반으로 속도를 높이는 반면 흑요의 속도는 급격히 뒤쳐졌다.
어쌔신 클래스일 때 선보였던 신속과 체력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클래스를 변경할 때마다 스탯도 변화하는 건가.’
역풍에 나부끼는 흑발 사이로 그리드는 <대장장이의 눈>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요의 완벽한 뒤태… 아니, 흑요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수준의 완드와 로브를 갖고 있다만…’
부활이나 클래스 변경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은 보이질 않는다.
말인 즉.
‘클래스 고유 능력이란 뜻이군.’
물론, 칭호의 효과로 생긴 스킬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가능성이 적었다.
고작 칭호의 효과로 <부활>과 <클래스 변경>이라는 사기적인 스킬들이 생긴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정황상 그리드는 흑요를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로 추측했다.
‘개사기니까.’
최소 4회 부활이 가능하며 클래스까지 변경할 수 있는 클래스라니, 사기성이 장난이 아니다.
‘합당한 페널티가 있다는 가정을 해봐도 완벽한 언밸런스다.’
그래, 마치 파그마의 후에처럼.
“극(極).”
검무를 펼치면서 흑요와의 거리를 완벽하게 좁힌 그리드가 궁극의 종베기를 선보였다.
마법을 난사하고, 실드까지 사용해가면서 발악하는 흑요였지만 그리드의 방어력을 꿰뚫거나 공격력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히힛!”
무척 큰 입.
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흑요의 가슴을 그리드의 극(極)이 베어버렸다. 그리고 연달아 공격을 연계하여 이야루그트의 콤보 효과까지 발생시키고 마무리 지었다.
잿빛으로 산화하는 흑요를 확인한 그리드가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반경 13미터 이내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감지하는 <마력 탐지(강화)>Lv.2였다.
마나 소모율이 무려 2천이었으므로 함부로 사용하기에 부담이 큰 마법이었지만, 일반적인 마력 탐지의 마스터급 위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그리드는 흑요가 분신일 가능성이 있다는 유페미나의 추측을 기반으로 흑요의 본체를 찾고자 시도했다.
‘수인족. 수인족. 수인족. 수인족. 수인족. 수인족…’
바람 앞의 등불처럼 꺼져가는 생명들만이 감지된다.
죄 없이 살해당한 이들의 원통함이 얼마나 클까?
생각해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가 이내 새로운 존재를 포착했다.
흑요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이동하는 플레이어의 기척이었다.
이름:???
레벨:???
직업:???
종족:인간
상태:플레이어
“너구나!”
마력 탐지의 레벨이 아직 2에 불과했기 때문에, 감지한 대상의 상세정보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로선 대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고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신속한 몸놀림.”
하늘이 되어주고 있는 심해의 바다와 그 안을 구름처럼 노니는 물고기들.
신비로운 광경을 등진 채 허공에 떠있던 그리드가 민첩성과 이동속도를 극단적으로 높였다. 그리고 어마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흑요의 본체로 추정되는 인물을 목표로 삼은 이동이었다.
잠시 후.
그리드는 폐허의 잔재들을 엄폐물삼아서 살금살금 이동 중인 비쩍 마른 여자 한 명을 목격했다.
‘앞뒤가 똑같다니…’
볼륨감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절벽인 여성이었다.
너무 마른 탓에 얼굴은 해골 같았고 앞니가 툭 돌출되어 있다. 팔과 다리는 겨울철의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스스로도 마른 몸이 콤플렉스인지, 펑퍼짐한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러한 차림이 오히려 그녀의 마른 몸을 부각시켰다.
‘흑요다.’
몸매는 완전히 달랐으나 그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른 여성의 키와 얼굴의 생김새가 흑요와 비슷했던 까닭이다. 애초에 아이디도 흑요였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죽인거지?’
완전히 시뻘건 흑요의 아이디를 보고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빠르게 하강했다.
“히익!”
갑자기 뚝하고 떨어진 그리드에게 앞길을 가로막힌 흑요가 질색했다.
“어, 어떻게 내 위치를…!”
흑요의 클래스는 망상가다.
망상을 현실로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녀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 혹은 물건이나 장소를 창조할 수 있었고 자신이 창조한 존재에게 불사에 가까운 부활 능력까지 부여했다. 마치 신처럼 말이다.
유페미나가 싸운 흑요가 바로 흑요의 망상을 토대로 창조 된 존재였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듯한데, 설명 좀 해줄 수 없을까?”
흥미를 띈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리드로부터 흑요가 뒷걸음질 쳤다.
“개, 개처럼 발정이나 하는 남자 따위랑 말을 섞을까 보냐!”
소리치며 본인의 가슴을 앙상한 두 팔로 가리는 흑요였다.
그리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개? 아니야. 난 가슴이라고 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취향이 명백한 그리드!
흑요가 얼굴을 붉혔다.
“내, 내 몸매를 조롱하지 마!”
“…허.”
그리드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흑요가 뼛속 깊은 곳까지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치 예전의 나처럼.’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숨에 죽이기보다, 그리드는 대화를 시도했다.
동정심으로 그녀를 살려줄 생각이라서?
아니다.
그리드는 적에게 아량을 베풀 정도로 자비롭지 않았다.
특히 흑요는 그리드가 소중하게 여기는 동료 유페미나를 죽이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존재다.
그리드는 흑요가 두 번 다시는 템빨단을 넘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처벌할 생각이었다. 결코 만만하게 보일 생각이 없었다. 템빨단에 범접하려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줄 계획이었다.
다만, 궁금했다.
흑요의 클래스와 능력이.
그래서 입을 열었다.
“클래스가 뭐야? 일단 레전드리 등급은 맞지?”
“…”
살살 달래거나 잔꾀를 부려서 흑요가 본인의 정체를 밝히게끔 만들 생각은 않고 대놓고 묻는 그리드였다.
흑요는 황당했다.
“마, 말해줄 리가 없잖아!”
“그럴 줄 알았어. 뭐, 치고 박고 싸우다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이잇…!”
저항도 못하고 죽을 순 없다.
이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치 하락이 두려운 것도 아니다.
악명 수치가 최고조에 오른 지금, 만약 죽게 된다면?
인벤토리에 보관 중인 아이템 중 하나를 반드시 떨어뜨릴 것이다.
망상을 무장시키기 위해서 어렵사리 공수해온 온갖 종류의 명품 중 하나가 말이다!
‘망상 현현!’
남은 마나를 쥐어짠 흑요가 새로운 망상을 구상한 뒤 소환했다.
[금일 현현시킨 망상의 숫자가 5개를 초과하였습니다.]
[희생의 대가가 커집니다. 레벨이 1 하락합니다.]
레벨 하나를 잃는 끔찍한 페널티.
그렇다.
흑요는 망상을 구현하고 소환할 때마다 그 대가로서 경험치를 손실해왔다. 당일 소환 횟수가 많아질 경우 이렇듯 레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레벨을 잃을 정도로 망상을 사용해본 경험은 오늘이 두 번째에 불과했다.
첫 번째는 크라우젤을 만났을 때였다.
‘백요 언니급의 괴물이 둘이나…’
그것도 하필이면 남자 따위가!
꽈드득!
여러모로 분노하고 이를 가는 흑요의 눈앞으로 요염한 여인이 나타났다.
흑요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외견을 지닌 여성이었다.
스탯 총합은 소환자 흑요와 동일.
단, 스탯의 분배는 그때그때 부여되는 클래스에 따라서 틀리다.
그리고 이번에 현현한 흑요의 망상은 근력과 지력 스탯이 극단적으로 높았다.
마검사.
흑요가 그리드를 제압할 수단을 강구한 끝에 꺼내든 패였다.
“히, 히힛! 어때! 공격력과 마법력 모두 센 적을 상대로는 너의 템빨도 무용지물일 거라고!”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착용할 것인지, 삼겹갑 세트를 착용할 것인지.
흑요는 그리드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리드는 가소로웠다.
“바보냐?”
콧방귀 뀐 그리드가 성스러운 빛의 갑옷을 삼겹갑으로 교체했다.
단, 성스러운 빛의 장갑과 왕관은 그대로 착용한 상태로 말이다.
어중간한 공격력과 마법력 따위, 마찬가지로 어중간한 방어력과 마법저항력으로 응수해주겠다는 태도였다.
“……”
흑요가 할 말을 잃었다.
상성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절망하는 그녀와 그녀의 망상을 연살파(聯殺波)와 극살(極殺)이 차례대로 깨부쉈다.
물론, 흑요의 저항이 만만치는 않았다.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던 최상위 랭커들보다 더 강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빨까지 세우고 있는 그리드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끼야아아악!”
결국.
수백의 수인족을 해치우며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에 군림하듯이 행동했던 흑요가 자신보다 더 위에 있는 맹수에게 잡아먹혔다.
그 맹수란 물론 그리드였다.
[플레이어 흑요를 해치웠습니다!]
[최악의 악인을 징벌하여 명성이 2,000올랐습니다!]
[<이야루그트>의 등급이 유니크에서 레전드리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야루그트>의 정보가 갱신됩니다!]
“좋았어!!”
PvP 결승전 당시.
99.98퍼센트에서 성장이 멈췄던 이야루그트가 드디어 격변을 맞이했다.
부르르, 경련하더니 이내 떠오르는 이야루그트.
질풍처럼 휘몰아치는 혈빛의 마기를 내뿜는 녀석의 자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고 강렬했다.
“…응?”
이야루그트에 시선을 빼앗겨있던 그리드가 문득 땅바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요가 잿빛으로 산화한 자리에 자그마한 반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플레이어가 떨어뜨리는 아이템 줍는 건 오랜만이네.”
과연,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로 추정되는 흑요는 얼마나 대단한 아이템을 떨어뜨렸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던 그리드가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기에 앞서서 심호흡했다.
‘아니, 기대하지 말자.’
여태까지 내가 기대해서 잘 된 일이 있던가?
‘어차피 쓰레기 템이겠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킨 그리드가 반지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개… 개…!”
역시.
“…이득!! 개이득이다!!!”
게임의 묘미는 득템하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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