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3권 - 14화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블러드 카니발의 잔당들이 최소 500명은 살아남아 저항 중이었다.
격렬함을 넘어선, 실로 필사적인 수준의 저항이었다.
“우린 반드시 살아남는다…!”
죽고 싶을 리 있겠는가?
죽으면 아이템과 경험치를 잃게 되는데!
“물러서지마! 악착 같이 몰아붙여라!!”
“적의 숫자는 고작 20명도 안 된다! 체력을 소모시켜!!”
사기를 올린 블러드 카니발의 저항이 점차 거세졌다.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무는 형국이었고, 워낙에 숫자가 많았던 탓에 템빨단은 차츰 압박감을 느꼈다.
한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드는 차분했다. 조금의 긴장감도 엿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전장을 이탈하겠다는 판단까지 내렸다.
“라우엘, 유페미나와 함께 수인족 왕을 만나러 가자.”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말하는 그리드.
그에게 라우엘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꼭 지금 만나야하는 겁니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굳이 이때 자리를 비워서 아군의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수인족 왕 맥스옹은 3일에 단 한 번만 침실에서 나와요. 바로 지금 이 시간대에만 말이죠. 지금이 아니면 그를 만나기까지 또 꼬박 3일을 기다려야 해요. 아, 덧붙이자면 왕의 침실을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시스템적으로 막혀있고요.”
유페미나의 설명이 라우엘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왕이라는 작자가 온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있다고요? 심지어 지금 같은 전시에도?”
“공주를 잃은 후로 완전히 정신이 나갔거든요. 그는 벌써 몇 년째 국사를 돌보지 않고 시름하는 중이에요.”
“한심한… 왕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한 자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말아먹는군.”
3일이라는 시간은 크다.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았고 이게 바로 물질적인 손익으로 직결됐다.
결국, 라우엘은 그리드를 따라서 전장을 이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동료들이 위험해지진 않을까?
불안해하는 라우엘의 어깨를 그리드가 두드려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있으니까.”
“그 두 분의 강함은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피아로님은 일당천이고, 아스모펠님은 템빨단원들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실력자죠. 하지만 템빨단원들은 지친 상태입니다.”
반면 적의 숫자는 많다. 아직 생존해있는 3차 전직자도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다.
“피아로님께서 적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템빨단원들이 잘 버텨줄 수 있을지….”
라우엘이 근심했다. 합당한 근심이었다.
하지만, 본래 라우엘의 성격은 이렇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는 동료라도 버린다.
이와 같은 냉혹함을 지녔던 인물이 바로 라우엘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건가… 라우엘, 너 또한 나처럼 변해가는 거냐.’
피식.
기분 좋게 웃은 그리드가 라우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안심해도 좋아. 아스모펠의 실력은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니까.”
사실, ‘완전히 회복한 아스모펠’을 <대영주의 검>으로 관찰하기 전까진 그리드 또한 아스모펠을 과소평가했었다.
템빨단의 최상위 실력자들과 맞먹는 수준으로 보았다.
그래, 과소평가였다.
그리드가 알게 된 아스모펠의 진짜 실력은…
“그는 피아로 바로 다음이다.”
나보다 위다.
심지어 무한한 잠재력까지 내포하고 있다.
아스모펠의 고유특성 <대기만성>과 <2인자의 집념>을 떠올린 그리드가 다시 한 번 전율에 휩싸였다.
‘크라우젤이 언젠가는 피아로를 넘어설지언정.’
아스모펠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
“이럴 수가…! 일개 병사 따위가 이토록 강하다니!!”
“나는 일개 병사가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하신 그리드 공작각하 직할의 템빨마법기사단 단장…”
“크윽…! 일개 병사 따위에게 죽어야하다니…! 원통하다!”
“…”
한때 피아로 다음가는 검사였던 아스모펠.
사하란 제국의 ‘기둥’이라고까지 불렸던 그는 지금 답답해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백요라는 여성이 자신을 ‘일개 병사’라고 지칭한 이후부터, 적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일개 병사’취급 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블러드 카니발의 잔당들은 ‘일개 병사’의 말 따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당장 자기 살 길 찾느라 바빴다.
“으윽…! 일개 농부랑 일개 병사 따위가 너무 대단해서 어이가 없다…! 레이단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괴물이 득실거린다는 뜻이지?”
“아니, 나는 일개 병사가 아니다. 나는…”
“그, 그리드 그 자식은 당최 무슨 수로 이만큼 대단한 일개 병사를 육성한 거야? 빌어먹을…! 나는 앞으로 평생 레이단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거야!!”
“…”
그리드 공작각하를 섬기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게 활약할 기회가 있었던가?
없다.
애초에 솜씨를 발휘할 무대조차 밟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완벽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아스모펠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활약하여 주군께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용맹무쌍하게 적들을 학살해봤자 끝끝내 ‘일개 병사’취급을 받게 되자 근심이었다.
‘주군께서 내가 일개 병사만큼밖에 활약하지 못했다고 오해하시면 어쩌지?’
서걱!
푸욱!
불안해하면서도 적들을 쾌속으로 배어나가는 아스모펠이었다.
2차 전직자 플레이어들.
싸움에 나름 잔뼈가 굵고 컨트롤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들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보다 빠르게 회피하고 반격하여 치명상을 입힌다.
아스모펠의 신위는 템빨단원들의 감탄을 유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스모펠이 저렇게 강했다고?’
‘매일 병영에서 군사훈련만 시키기에 그쪽 분야에만 특화 된 NPC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강하다.
그 강함을 굳이 표현해보자면, 페이커의 신속을 탑재한 극검이 쿨타임 없이 발검술을 사용하는 것 같다고 할까?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찍어눌러버리는 신위,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넘어서 피아로와 비견된다.
“…근데도 일개 병사 취급.”
든든한 아스모펠을 보고 한 시름 놓은 템빨단원들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어느덧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
수인족의 왕국 세이렌을 유페미나는 ‘우물’이라고 표현했다.
인구 20만에 불과한 국가.
심해 깊은 곳에 위치하여 타국과의 교류가 전무하고, 단지 본인들의 문화만을 가꿔왔을 뿐인 왕국.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편협하고 나태해요. 무척이나 협소한 사고관을 지녔고 딱히 열정이 없죠. 그들에게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이니까요.”
그만큼 순박한 면이 있어서 호감은 간다.
“발전이나 변화를 갈망하는 자가 드물고, 그건 국왕 맥스옹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왕이 국사를 돌보든, 말든, 수인족 대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아요.”
“고립 된 환경이 정체 된 국민을 만들었고, 정체 된 국민이 무능한 왕을 낳은 거군요. 세상에 뭐 이딴 나라가… 완전 개노답이네요.”
“…?”
혀를 내두르는 라우엘의 ‘개노답’이라는 말을 유페미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Satisfy 공용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당황했다.
“라우엘, 그런 말은 또 언제 배운 거야?”
“당신을 제대로 보필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 중이거든요. 굉장히 과학적인 언어인지라 이해하기가 쉽고, 거기에 전생으로부터 계승 된 저의 찬란한 지식이 결합된 결과 저는 단 나흘 만에 한국어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껏 배운 말이 개노답이냐…”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말을 익히는 편이 뜻을 전달하기에 효율적이니까요. 엄근진이란 말도 압니다. 현재 제 상태가 바로 엄근진이죠. 엄격, 근엄, 진지.”
“…”
라우엘은 한국 이민 예정자가 아니다.
제1회 국가대항전 당시 템빨단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드의 빌딩 근처에 땅을 살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가장 먼저 마스터하였다니, 그리드는 새삼 놀라웠다.
여전히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유페미나에게 라우엘이 질문했다.
“맥스옹 슬하에는 죽은 공주 외에도 세 명의 왕자가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습니까?”
“2왕자 뉴옹은 무척 게을러요. 최소한의 자기발전조차 등한시한 채 그저 먹고, 자고, 싸면서 살 뿐이죠. 반면 1왕자 파옹과 3왕자 골옹은 부지런합니다. 일반적인 수인족과는 달리 급진적인 사상까지 지녔죠. 하지만 그래봤자 수인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들의 바람은 세이렌을 다시 인간들로부터 고립시킴으로서 위험요소를 차단하는 정도에 불과하죠. 세이렌의 개혁을 꿈꾸지는 못합니다.”
“뭐, 그래도 그들이 둘째나 아비보단 낫군요. 마음이 이해도 되고요. 순박하기 짝이 없는 수인족들의 입장에선 욕심 많은 인간들과 교류하는 게 꺼려질 만도 하니까.”
복도를 걸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라우엘의 눈동자가 먼 곳을 응시한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는 뜻이다.
또 무슨 계획을 세우려는 걸까?
그리드와 유페미나가 흥미와 의문을 품는 순간.
“왕을 바꿉시다.”
라우엘이 흉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표출했다.
***
세이렌 제35대 국왕 맥스옹.
선대 국왕으로부터 단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여태까지 대부분의 국왕들이 그랬듯, 그 또한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은 딱히 없다.
그저 왕이라는 이유로 보장받게 된 권위를 이용하여 스스로의 안위만을 살펴왔을 뿐이다.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썩은 생선처럼 죽은 눈깔을 지닌 그가 왕좌 위에 앉은 채 그리드 일행을 맞이했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세이렌이 쑥대밭이 되었을 거라지? 국민들을 대신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겠소. 보상은 예언가 미옹을 찾아가면 받을 수 있을 테니 이만 물러들 가시오.”
구국의 영웅들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담백하다.
맥스옹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전에 이미 설명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리드 일행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조언해주려는 순간이었다.
“우선, 그 진주 의자에서부터 그 펑퍼짐한 엉덩이를 떼라. 다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까지 걸어 와.”
라우엘이 채 입을 열기도 전.
도끼눈을 뜬 그리드가 맥스옹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려라. 백성과 왕실을 구원해줘서 감사하다고.”
“…?”
맥스옹이 두 귀를 의심했다.
태어나서부터 왕자였고, 또한 왕이었던 그에게 이토록 함부로 말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던 까닭이다.
그의 좌우로 도열하고 선 병사들조차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워낙에 현실감이 없어서 즉각적으로 대처하질 못했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그리드가 다시 말했다.
“내려오라고.”
본래 그리드가 바랐던 것은 세이렌과의 동맹관계였다.
군사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상호 교류 하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길 원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작금의 세이렌과 동맹관계를 구축해봤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이렌을 내 발 아래 둔다.”
왕이 될 경우, 최소 중견기업 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리드는 국왕이 되기를 꿈꿨다.
그렇다. 처음에는 단지 부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지존.
각 분야의 최강자가 집결한 템빨단의 수장으로서, 그들을 거느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어졌다.
이는 당연한 욕구였다.
특히 PvP기능이 부각되는 게임의 경우,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지존을 꿈꾸기 마련이다.
하물며 자격을 갖춘 그리드가 그와 같은 꿈을 품지 않을 리 없다.
“세이렌 왕실은 앞으로 나를 섬겨라. 응하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 탄압하마.”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맥스옹에게 그리드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라우엘은 싱글벙글이었다.
‘이젠 스스로도 알아서 잘 하시는군요.’
국민성과 지리적 특징을 봤을 때, 세이렌은 한 마디로 ‘관리하기 편한’ 나라다.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확실하게 손에 넣어두는 편이 좋다.
라우엘은 그리드의 혜안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