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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04화 (299/1,794)

템빨 23권 - 18화

그리드 일행과 맥스옹이 예기치 않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왕궁 바깥에서는 블러드 카니발의 잔당 소탕이 완료되었다.

템빨단원들과 수인족 군대가 협동하여 싸운 결과였다.

“제법 비싼 물건이 많네? 특히 PvP 추가 데미지나 방어력이 붙은 아이템들. 이런 건 쉽게 구하지도 못하는 건데.”

“아무래도 PvP라는 컨텐츠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대체적으로 레벨 제한이 낮아서 우리가 쓰기엔 무리가 있군.”

“은기사 길드 출신들은 아직 대부분 200레벨대 아닌가? 걔네들한테 싸게 넘기면 되겠다.”

“그전에 그리드한테 먼저 보여줘. 혹시 새로운 제작법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응, 당연하지.”

블러드 카니발의 잔당들은 대부분 악인 수치가 높았고 그 탓에 드롭한 아이템이 굉장히 많았다.

개중에는 무가치한 것들도 수두룩했지만 제법 값이 나가는 것도 적잖았다.

전리품을 확인하며 정비 중인 템빨단원들에게 1왕자 파옹과 3왕자 골옹이 다가왔다.

“고맙소. 정녕 고마워.”

“당신들이 우리 왕국을…! 백성들을 살렸어!! 저기 저 아이와 아이의 부모들, 그리고 연인들과 노인들까지도! 모두 당신들이 지켜준 거라고!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한다!!”

왕자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땅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다.

그들은 소중한 삶의 터전과 사람들을 지켜준 템빨단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우리 수인족은 기필코 당신들에게 은혜를 갚을 것이오.”

“맞다!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 거다!!”

은혜는 은혜로 갚으리라.

명예를 걸고 맹세하는 두 왕자였다.

살아남은 수인족 병사들과 백성들은 서로의 가족을 찾아 상봉하고 있었다.

부모를 찾아 목 놓아 우는 아이들.

잃은 줄 알았던 아이를 발견하고 달려가 와락 껴안는 부모들.

자식 대신 죽지 못하여 슬퍼하는 노인들.

포옹하는 연인들.

혼자가 되어 넋을 잃은 자들.

잔혹한 블러드 카니발의 살육으로부터 살아남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템빨단원들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저들을 우리가 살렸음에 뿌듯하다가도, 이미 죽은 이들은 지켜주지 못하여 슬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카츠가 혀를 내둘렀다.

‘고작 NPC들이 죽은 걸로 뭔…’

유난히 냉담한 게 아니다.

카츠의 반응이야말로 일반적이었다.

NPC는 결국 그래픽과 인공지능의 산물인 바.

그들 또한 감정을 지녔고 사람과 똑같은 붉은 피를 흘린다지만, 결국에는 가상의 현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들이다.

NPC들에게 하나하나 감정이입하는 사람은 사실 드물었다.

템빨단원들이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이건 그리드의 영향이었다.

좋은 점이라고 할 수도, 나쁜 점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가치관이다.

“폐하를 알현하러 가자! 당신들을 위해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줄 테니까!!”

“음, 지금쯤 주군께서 그대들의 국왕과 대담을 나누고 계실 터. 가보도록 하지.”

왕자들의 안내를 받은 템빨단원들이 왕궁으로 향했다.

선두에는 지슈카가 섰고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그녀를 수행했다.

잠시 후.

왕궁에 도착한 일행은 깜짝 놀랐다.

곳곳이 파괴 된 대전.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그곳 중앙에 수인족 왕 맥스옹이 쓰러져있었다.

피투성이였다. 누가 봐도 그리드 일행에게 당한 몰골이었다.

“국왕폐하!!”

“아바마마!!”

1왕자 파옹과 3왕자 골옹이 기겁하며 달려갔다.

맥스옹을 부축하는 그들의 눈빛에 처절한 분노와 배신감이 피어올랐다.

“네놈들…! 사악한 인간 놈들!! 겉으로는 우리를 돕는 척 하더니 사실은 국왕폐하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냐!!”

“제길…! 믿었는데! 너희만큼은 믿었고 진심으로 감사했는데!!”

“…”

템빨단원들은 섣불리 대응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도 작금의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야?”

옆구리를 찌르며 해명을 요구하는 지슈카.

그녀에게 설명하려던 그리드가 멈췄다.

의외의 인물이 먼저 입을 열었던 까닭이다.

다름 아닌 맥스옹이었다.

“나는 괜찮다.”

털썩!

아들들의 부축을 받아서 몸을 일으킨 맥스옹이 그리드 앞으로 다가와 무릎 꿇었다.

누구보다도 고귀한 일족의 왕이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그것도 플레이어에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파장은 컸다.

왕자들은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술렁였다. 템빨단원들 또한 당황했다. 차츰 소란이 커졌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리드만큼은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맥스옹의 진중한 눈빛을 묵묵히 응시한 채, 위엄이 넘치는 표정을 짓고서 맥스옹의 발언을 기다렸다.

그리고 맥스옹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인간. 그대가 어째서 내게 분노하였던 것인지, 그대와 싸우면서 나는 깨달았다. 부하 한 명의 목숨을 위해서도 희생하는 그대의 입장에서는 백성들과 병사들을 등한시하고, 그러면서도 오만하기는 짝이 없는 나를 왕이라 인정할 수 없었을 테지.”

“…”

“맞다. 내게는 왕의 자격이 없다. 무릇 왕이란 백성을 자식처럼 아껴야하건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딸아이를 잃고 겪은 슬픔을 핑계로, 딸아이만큼이나 소중하게 아껴줬어야 할 백성들을 등지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돌이켜보니 정녕 최악의 왕이었다.

백성들에게 미안했고, 왕자들에게는 본보기가 되지 못하여 부끄러웠다.

“먼저 심연의 바다로 떠난 딸아이 또한 이 한심한 아비를 보며 슬퍼했을 테지.”

그리드를 바라보는 맥스옹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간임에도 마물과 악마를 다스리는 자여. 왕의 자격을 갖췄음에도 부하 한 명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여.”

수인족 왕의 목소리에는 바다의 힘이 깃든다.

맥스옹이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주변의 마나가 푸른 물결로 변모하였다.

스르륵.

부드럽게 흐른 물결이 그리드의 몸 주변을 감쌌다.

그리드는 심신이 안정됨을 느꼈다.

“나는 그대에게 깊은 존경을 느낀다. 내 아들들이 그대를 보고 배워, 어리석은 아비와는 달리 훌륭한 왕이 되길 바란다. 오래토록 정체되어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 앞에 무력했던 세이렌이 보다 발전하고 또한 강해지길 바란다.”

하여 원한다.

“세이렌을. 세이렌의 왕실을 그대가 가르치고 인도해다오. 우리는 그대를 진정으로 따를지니.”

부르르.

템빨단원들과 피아로, 그리고 아스모펠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전율을 느꼈다.

우리의 주군에게 한 종족의 왕이 자처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

이 얼마나 영예로운가!

꾸욱!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전율에 휩싸인 그리드가 격양 된 마음을 진정시키고 노력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 몇 번이나 심호흡한 끝에서야 그가 행동에 나섰다.

우선,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맥스옹을 친히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악수를 건넸다.

“부끄럽지 않은 왕이 되겠다.”

단지 맥스옹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템빨단원들과 피아로, 아스모펠, 쥬드, 그리고 노에와 랜디에 이르기까지.

나를 믿고 따라주는 모두와 스스로에게 전하는 맹세였다.

‘나를 인정해준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간의 내 노력이 물거품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하겠다.’

물욕과 명예욕을 기반으로 하였으나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이기적이지만 떳떳한 ‘노력가’ 그리드만의 왕도가 시작됐다.

***

[템빨단이 수인족의 왕국 세이렌과 동맹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템빨단 소속의 영지들과 세이렌은 앞으로 군사, 문학, 마법, 상업, 종교 등의 모든 분야에서 상호 교류합니다.]

[향후 2년 동안, 템빨단은 세이렌의 발전을 위해서 매달 10만 골드씩을 세이렌에 지원합니다. 단, 2년 후부터는 세이렌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의 20퍼센트를 매달 템빨단이 가져갑니다.]

[세이렌의 방위를 위해서 템빨단은 언제라도 세이렌에 군사를 집결시킬 권리를 갖습니다. 단, 세이렌이 군사를 운용할 시에는 템빨단의 수장 그리드에게 허락을 받아야합니다.]

[그리드가 국왕의 지위를 획득하는 시점에서 세이렌은 그리드의 영토로 편입됩니다. 그때까지 세이렌 왕실은 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라우엘의 주도 하에 새로운 조약이 체결됐다.

그 내용은 레이단, 윈스톤, 바이란, 코크로 섬 등 대륙 각지에 흩어져있는 템빨단원들 전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이제는 300명에 육박하고 있는 템빨단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말이 좋아서 동맹조약이지, 그리드가 완전히 세이렌의 주인이 된 거네?”

“크으… 나날이 세력이 확장되는구나. 역시 갓리드 대박이다.”

“템빨단에 가입하길 잘했다니까!”

소위 말하는 7대 길드들조차도 하나의 영토를 갖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수십, 수백만 개 존재하는 일반적인 길드들은 대부분 영토 자체가 없었다.

반면 템빨단은 어떤가?

이미 3개의 영토를 보유 중이었고-아직 윈스톤은 아이린의 영지다-, 이제는 심지어 나라를. 그것도 이종족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켜버렸다.

그뿐이랴?

에트날 왕국 최고의 세도가인 스테임 백작가와 완전한 동맹관계까지 구축하고 있다.

창설한지 채 2년-현실 시간 기준-조차 되지 않은 길드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성장속도로 최고의 길드로 우뚝 선 것이다.

템빨단원들, 특히 은기사 길드 출신의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의 정치능력에 감탄했고 또한 찬양했다.

“아이린을 꼬셔갖고 최고 가문의 사위가 되어 기반을 다졌고.”

“체다카 길드를 손아귀에 넣더니.”

“개성 강한 소수민족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면서 영지를 특색 있게 발전시켰고.”

“이제는 또 수인족의 왕국을 발아래 두다니…”

역시 갓리드다.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현실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들 멋대로 그리드를 분석하고 찬양하는 은기사 출신 템빨단원들이었다.

덩실덩실.

대륙 각지의 템빨단원들이 껄껄 웃으며 춤을 췄다.

그들의 그 해괴망측한 행동거지를 목격한 일부 플레이어들이 ‘템빨단에 미친놈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머잖아 그 소문을 접하게 된 블러드 카니발은 템빨단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미친놈이 더 많아졌다고?”

“안 그래도 미친놈 많더만…”

“크음, 분하지만 템빨단과는 되도록 상종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블러드 워리어 카츠, 야수 인간 툰, 대머리 반트너, 패드리퍼 후로이 등등.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져있던 템빨단원들의 모습을 상기한 블러드 카니발이 공포에 몸서리쳤다.

악당들조차 겁을 먹게 만드는 템빨단원들의 개성은 특출한 것이었다.

물론, 모든 블러드 카니발이 위축된 것은 아니다.

특히 백요와 흑요 자매는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우리 둘이 함께 싸웠으면 결과는 달랐을 거야!”

“맞아!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를 줘! 힘을 빌려줘!!”

장막 너머 마스터에게 요청해본다.

하지만 마스터는 단칼에 거절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뭉친 관계일 뿐이다. 돕는다는 행동은 적합하지 않아.”

“제길! 돈을 지불하면 되잖아!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까 레이단을 박살낼 지원자를 모집해달라고!”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절대규칙을 잊은 거냐?”

“큭…!”

블러드 카니발의 마스터는 판단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래, 아직은.

성장은 무한하지 않다. 한계가 있는 법이다.

템빨단이 지금은 비록 대단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을지언정 머잖아 정체되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

예를 들자면, 현재로서는 독보적인 강함을 자랑하는 ‘전설의 농부’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는 시점이라던가.

‘피아로라… 그와 비견되는 네임드 NPC들을 발굴하고 영입하는 걸 당분간 목표로 삼아야겠군.’

주인을 위해서.

***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보고 싶습니다.”

피아로가 세이렌에 남기를 자처했다.

라우엘이 당황했다.

“흙이 아닌 모래로 이루어진 지면에 바닷물을 양분 삼아 키울 수 있는 농작물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요. 농사란 만물의 근원. 농사에 한계란 없습니다. 제가 반드시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세이렌에서만 키울 수 있는 농작물을 재배하여 결국 주군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나이다. 하니 허락해주소서.”

피아로의 황소고집은 누구보다 그리드가 잘 안다.

애초에 그리드는 피아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전설이니까. 그것도 나와는 다른 완벽에 가까운 전설.

최소한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피아로에게 불가능이란 없을 터였다.

“그래, 기대하며 기다리도록 하지.”

“주군! 피아로님께서 안 계시면 레이단은 누가 수호합니까!”

피아로라는 전력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가 없다. 그가 레이단을 비우게 될 경우, 라우엘은 레이단의 방위를 늘 직접 신경써야만했고 일거리가 늘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반발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힐끗, 시선으로 아스모펠을 가리켜보였다.

“피아로의 빈 자리는 우리의 일개 병사께서 채워주실 거다.”

“윽…!”

아스모펠의 성격은 진중하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드가 자신을 ‘피아로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극찬한 것을 모르고 ‘일개 병사’라는 표현에만 집착했다.

‘나는 주군께 일개 병사 수준의 신뢰밖에 얻지 못하였구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

정말로 일개 병사가 되겠다.

‘배우는 자의 입장이 되어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겠다!’

아스모펠의 특성 <2인자의 집념>이 제대로 발동했다.

훗날, 세상을 경악시키게 될 ‘일개 병사의 전설’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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