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4권 - 8화
“아하, 그랬던 거구나.”
그리드의 광렙 비결은 명예상점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 버프 물약’에 있다.
이 물약을 전부 소진하는 순간, 그리드의 레벨링 속도는 정상수치로 회귀할 것이다.
또한, 그 시기는 무척 빠를 것으로 추정된다.
소위 말하는 ‘뽑기’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 버프 물약의 획득확률은 1퍼센트 미만으로, 대량으로 확보하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
그리드가 확보하고 있는 경험치 버프 물약의 수량은 무척 한정적일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그리드의 말도 안 되는 레벨링 속도에 대한 의문이 풀렸으니 속이 다 후련했다.
-버그 쓴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역시 버그 따윈 없는 갓겜. 그리고 앞서나가는 갓리드.
-앞서나가기는 무슨~ 결국에는 물약빨 세우고 있었다는 건데~
-직업빨, 템빨에 이어서 이젠 또 물약빨.-_-;; 정말이지 빨이란 빨은 다 써먹는구나.
기사 내용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데, 경험치 버프 물약이 없을 때의 그리드는 레벨링 속도가 굉장히 느린 편에 속했다.
국가대항전 당시에도 306이었던 레벨이,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시점까지도 그대로였었으니까.
-물약빨만 없었으면 그리드 랭킹 아직도 더 아래였을 텐데.
-그리드가 물약빨 세우는 동안 순위 뺏긴 랭커들만 불쌍함.
-당장은 억울할 수도 있지만 뭐, 다른 랭커들도 이제 슬슬 명예상점 이용할 수 있지 않으려나? 걔네도 경험치 버프 물약 뽑아 마시면 그리드한테 똑같이 되갚아줄 수 있겠지.
-그리드 랭킹 100위권 밖으로 밀릴 각ㅋㅋㅋ 허접ㅋㅋㅋ
-랭킹 10억 등에도 못들 놈이 그리드보고 허접이라네.ㅎㅎ 지보다 잘난 사람 흠잡을 건덕지만 생기면 곧장 까고 보는 열등감 덩어리. 수준 참 미개하다.
-애초에 그리드는 랭킹에 집착하지도 않을 걸? 어차피 자기가 거의 젤 센데 랭킹 따위에 무슨 의미를 두겠음?
-아닌데. 내가 그리드면 랭킹에 집착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강해봤자 랭킹이 낮으면 뽀대가 안 나잖아?
-그런 단순한 이유라기보다는, 랭킹 1위에 두는 의미가 각별할 듯. 국가대항전에서 그렇게 잘 싸워놓고도 결국엔 크라우젤한테 졌으니까. 랭킹으로라도 이겨보고 싶을 것 같음.
-만약 그렇다면 인성 쓰레기네ㅋㅋ 크라우젤 없는 동안 빈집털이나 하고ㅋㅋㅋ
-님들 소름 돋는 게 뭔지 암? 지금 그리드 욕하거나 비꼬는 사람들 대부분 한국인임.OTL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에서 활약해준 덕분에 경험치 버프 얻은 은혜를 또 그새 잊었나보네. 한국인들 참…
-켁? 누가 보면 그리드가 한국인들 위해서 싸운 줄 알겠네. 그리드는 순전히 자기 보상 얻으려고 노력했던 거고, 경험치 버프는 순전히 얻어 걸린 건데 뭘.ㅎㅎ
-말투 봐. 진짜로 역겹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한국인 전부가 저러는 게 아니라, 한국인 네티즌 중에서 극히 일부가 저러는 겁니다. 어떤 나라든지 병신은 있잖아요?
Satisfy관련 커뮤니티들이 그리드를 화두로 들끓었다.
인터넷을 쭉 살펴보고 분노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드 빠돌이 데미안?
아니다.
최근의 데미안은 레베카교 관련 행사로 무척 바빴다. 인터넷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그리드 빠돌이 라우엘?
아니다.
라우엘 역시 세이렌 관련 업무로 바쁜 탓에 인터넷에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분노하고 있단 말인가?
그건 바로 세희.
그리드의 여동생이었다.
“파렴치한 사람들…”
사람을 쉽게 흉보고 조롱하는 네티즌들의 습성은 세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에게까지도 꼭 이래야만 하는지, 그녀는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여줬다고 추켜세울 때는 또 언제고, 국가대항전이 끝나자마자 태도를 이렇게 싹 바꾸다니?
늘 자신의 입맛대로, 기분대로 사람을 쉽게 대하는 네티즌들의 개념 없는 태도가 세희는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만 그렇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일부가 당사자에게 큰 상처를 주는 법이다.
실제로 지금 우리 오빠는…
“나는 왜 한우보다 삼겹살이 더 맛있는 거지?”
와구와구.
하루 내내 캡슐 안에 누운 채 사냥만하다가 드디어 밖으로 나온 그리드.
뜨겁게 달궈진 불판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을 쉬지 않고 입에 넣는 그를 보면서, 세희가 걱정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면 저렇게 폭식을 할까?’
두꺼비처럼 뺨을 부풀리고 음식을 가득 채워 넣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 걱정스럽다.
결국, 세희가 결심했다.
“오빠.”
“냠냠쩝쩝. 응?”
“내가 도와줄게.”
“꿀꺽. 뭘?”
“오빠의 사냥.”
“…?”
세희는 이제 수능을 코앞에 둔 수험생이었다.
공부에 열중해야할 시기에 갑자기 왜, 생뚱맞게 내 사냥을 돕는다는 걸까?
세희의 걱정과 달리, 인터넷 상황을 모르는 그리드였던 까닭에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공부 안 해?”
“난 똑똑하니까. 사실 공부 더 안 해도 원하는 대학은 어디든지 들어갈 자신이 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리드는 잘 알고 있다.
세희가 평생 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왔는지.
저 자신감의 근원은 타고난 두뇌에 대한 과신이 아니라, 그녀가 그간 해온 노력에 있었다. 그 노력이 수포가 되게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서라. 오빠 레벨 올린답시고 동생의 중요한 시기를 방해할 수는 없어.”
“…”
세희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금 누구보다도 가장 화나고 초조할 사람은 본인이면서, 내색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으려는 오빠의 성숙한 모습이 멋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여자 친구라도 있었다면 여자 친구한테 의지할 수 있었을 텐데…
‘가여워…’
기껏 노력해서 엄청난 재력과 지위를 쌓아놓고도 연애 한 번 못하는 오빠를 위해서라도, 여동생인 내가 힘내야한다.
세희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아니. 나한테 중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가족이고, 오빠야.”
오빠가 방구석폐인 백수였을 당시에는 오빠를 책임져야한다는 일념으로 좋은 대학을 최우선 과제로 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가 오빠의 둥지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오빠가 내 둥지이고, 나는 독립하기 전까지 그 둥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성녀의 힘을 보여줄게.”
“…?”
얘 왜 이래?
“꿀꺽.”
의욕으로 불타오르는 세희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덩달아 긴장하게 된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
그리드는 7번 도시 공략을 사실상 실패라고 자평하고 있었다.
간신히 도시 보스까지 처치하기는 했지만, 계획했던 시간을 무려 6시간이나 초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레벨링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려졌다.
물론, 전부 다 브라함 탓이었다.
“네가 건물만 안 부셨어도…”
‘…’
평소 성격 같았으면 그리드를 비웃거나 도리어 화를 냈을 브라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수천 마리의 뱀파이어 대군으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에서 그리드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 뻔히 알고도 당당할 정도로 그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러고도 남을 철면피였지만 최소한 그리드에겐 그러지 않았다.
호감이 있었으니까!
“에휴, 진심 트롤.”
국가대항전에서 크라우젤에게 패배한 것도 사실은 브라함 탓이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는 크라우젤의 어머니가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어 잘 됐다지만, 어찌됐든 브라함이 잘못했었단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트롤. 트롤. 트롤!”
특기인 남탓을 시전하기 시작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의문을 표출했다.
‘트롤? 내가 왜 트롤이지?’
인터넷 상에서 쓰이는 트롤링의 의미를 알리가 없는 브라함이다.
몬스터 트롤을 떠올리는 그를 그리드가 비웃었다.
“지공은 개뿔. 멍청이.”
‘적당히 해라!’
결국 브라함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육신만 있었으면 그리드의 머리끄댕이라도 잡아당겼을 기세로 버럭 화를 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어느덧 8번 도시 입구 앞에 도착했다.
그들을 반기는 인물들이 있었다.
<성녀> 세희(루비)와 <성녀의 기사> 예림(섹시여고생)이었다.
“영우 오빠!!”
저게 어딜 봐서 고등학생이란 말인가?
못 본 새 더욱 더 뇌쇄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된 예림이 달려오더니 그리드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으으음…”
작년만 해도 예림을 그저 ‘아이’로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그리드가 이제는 바뀌었다. 예림을 여자로 느끼면서 헬렐레 했다.
원인은 사이즈에 있었다.
자세한 설명 생략.
그리드가 헤벌쭉하고 있는 사이, 세희와 예림을 관찰한 브라함이 움찔했다.
‘뭐냐? 이 계집들의 신성력은?’
‘내 동생들이니까 호칭에 주의해줘.’
‘…이 여자들은 뭐냐? 레베카의 딸도 아니면서 어찌 이리도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것이지? 게다가 이 신성력의 형태는…’
드물게 긴장하며 재차 묻는 브라함에게 그리드가 답변해주었다.
‘성녀와 성녀의 기사니까 신성력이 나름 세겠지.’
‘성녀라고!’
브라함이 동요를 넘어서 경악했다.
그리드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뭐야, 왜 그래? 성녀라는 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성녀는…!’
브라함이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오빠에게 너무 들러붙는 예림을 간신히 떼어낸 세희가 재촉했다.
“어서 사냥하러 가자.”
“어? 아, 그래.”
곧바로 8번 도시에 입장한 그리드, 세희, 예림이 파티를 맺었다.
동생들의 레벨을 확인한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180레벨? 뭐야, 왜 이렇게 높아? 너희들 주말밖에 게임 안 했잖아?”
“응? 레벨이야 워낙 올리기 쉬운 거잖아? 물론 오빠 레벨쯤 되면 올리기 어려워지겠지만.”
“…?”
과거, 밥 먹고 게임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 동안 80레벨 정도밖에 못 올렸던 전력이 있는 그리드이다.
게임의 게자도 몰랐고, 심지어 게임 플레이 시간도 적은 루비와 섹시여고생의 레벨 업 속도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넋이 나가있는 그에게 예림이 팔짱을 끼워왔다.
“어서 가요! 우리가 쩔해 드림!”
쩔.
온라인 게임에서 고레벨 플레이어가 저레벨 플레이어를 키워준다는 의미로 쓰이는 은어다.
어째 상황이 역전된 것 같지만, 그리드는 쩔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드와 세희, 예림이 파티를 맺을 경우, 몬스터를 죽이고 획득하는 경험치를 순전히 그리드가 독식하게 되어있었으니까.
레벨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세희와 예림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들은 정말로 순전히 그리드를 돕기 위해서 이번 파티에 합류한 것이다.
***
판다따거의 분석을 토대로 그리드의 레벨 업 비결을 알게 된 사람들.
그들은 그리드의 레벨링 속도가 이제 슬슬 떨어질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드가 보유했을 명성수치와, 그를 이용해서 획득하게 된 경험치 버프 물약의 개수를 대략적으로 계산해본 결과였다.
“어제까지 이틀 동안, 하루 2개씩의 레벨을 올린 그리드라지만.”
“오늘부터는 1개 올리기도 힘들겠지.”
“곧 랭킹이 떨어지겠군.”
다들 그렇게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발생한 결과는 전혀 달랐다.
[<속보>그리드 오늘 레벨 3개 올라]
“…??”
최고의 사냥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판다따거의 명성이 바닥. 아니, 지하까지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 중국인들은 그를 중국의 망신이라며 협박편지까지 보냈다.
그 꼴을 본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그리드를 분석하는 건 관두라니까.”
그리드는 상식선에 두고 논할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서 깨닫지 않았던가.
***
“흥, 결국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드를 너 따위가 부정하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거지.”
이번 사태에 대해서 처음부터 흥미를 느끼고 주시하던 사내가 있다.
판다따거를 비웃는 그.
다름 아닌 동네북… 아니, 통합랭킹 2위 출신의 지발이다.
이론만 빠삭한 판다따거와는 비교가 불허한, 진정한 사냥의 전문가인 그가 봤을 때 그리드의 레벨링 속도는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단, 최고위 사제를 최소 2명 이상 고용하여 데리고 다닌다는 전제가 붙어야한다.’
하지만 레베카교에서 고위 사제를 고용한다는 게 어디 쉽던가?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할뿐더러, 엄청난 공적을 쌓아야지만 고용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지발조차 쌓지 못했던 공적이다.
‘하지만 그리드 너라면 가능했던 것이냐.’
지발은 그리드가 부러웠다. 하지만 딱히 질투하지는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에 집중했다.
그가 새롭게 얻은 강력한 힘은, 그에게 늘 확신을 주었다. 그러니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보다 먼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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