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4권 - 22화
“…이제야 알겠군.”
보르네오군 포로를 모조리 처형해버린 라우엘을 보면서, 아슈르 백작은 깨달았다.
“욕심만 많고 멍청한 그리드가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저자의 공이었던 게야.”
라우엘은 보르네오군과의 동맹을 단지 파트리안 점령 용도로만 이용하지 않고 몇 개의 패로 활용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다 나은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이 특히 대단했다.
만약 그가 없었어도 그리드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테지.’
확신하는 아슈르 백작을 블란드가 조심스럽게 부정했다.
“아버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리드 공작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라우엘 백작의 공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만약에 그리드 공작이 무능했다면 라우엘 백작이 아무리 잘 보필해봤자 한계가 있었을 테죠.”
“…?”
아슈르 백작은 약 2년 만에 재회한 아들이 낯설었다.
나와 그리드의 관계를 알고 있고, 또한 그리드에게 붙잡혀 볼모가 되었던 신분이면서도 그리드를 인정하다니?
‘심지어 이 아이는 아이린을 그리드에게 빼앗기기까지 했다. 한데 이제는 원한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필시 세뇌를 당한 것 같다.
얼마나 모진 고문을 받아왔을까, 얼핏 상상이 된다. 참으로 끔찍하다.
가슴 아픈 표정을 짓더니 이내 분노하는 아슈르 백작에게 블란드가 밝게 웃어보였다.
“아버님께서 상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저는 레이단에서의 생활이 도리어 무척 즐거웠습니다.”
“블란드…?”
아슈르 백작이 깜짝 놀랐다.
내 아들 블란드가 모친과 형제를 잃은 후로 이토록 밝게 웃었던 적이 또 있던가?
아이린이 그리드와 혼인한 이후부터는 더욱 더 어두워져서 방구석 폐인까지 됐던 아이가 아닌가!
“레이단에서의 생활이 대체 어떠했기에 그토록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된 게냐?”
감격하면서도 의아해서 묻는 아슈르 백작에게 블란드가 사실대로 고했다.
“밭일을 하였습니다.”
“뭐, 뭐라!!”
“매일 새참으로 감자를 먹었지요.”
“뭣이라고!!!”
아슈르 백작이 진노하였다.
에트날 최고의 혈통인 내 귀한 아들이 농노처럼 밭일을 하였다니?
심지어 돼지들이나 먹는 사료인 감자를 새참으로 먹으면서!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왔다는 것밖에 더 되는가!
“아아! 블란드여! 네가 모진 생활 끝에 미쳐버린 게로구나!!”
통탄한 아슈르 백작이 블란드를 와락 껴안았다.
“미안하다! 이 못난 아비 탓에 네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고 말았구나!! 흑흑!!”
급기야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아슈르 백작에게 블란드가 삶은 감자를 건네주었다.
무지개색 감자였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 감자를 드셔보십시오. 한 입 맛보시는 순간 오해를 말끔히 해소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내 아들이 보통 미친 게 아니라 단단히 미쳤다.
하늘같은 부친에게 돼지 사료를 먹으라고 권유하는 아들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개탄하는 아슈르 백작.
이대로는 대화에 진전이 없겠다고 판단한 블란드가 실례를 무릅쓰고 행동했다.
아버지 입속에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기습적으로 쑤셔 넣는 것이었다.
“허억!”
돼지사료가 입으로 들어오자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아슈르 백작이 질색하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맛이지?’
신세계다.
새로운 경지의 마나서클을 개방했을 때와 비견되는 충격과 쾌락이 해일처럼 밀려오면서 뒤통수가 아찔해진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리는 포슬포슬한 식감과 달콤, 짭짤, 매콤, 고소, 담백, 상큼한 일곱 가지의 풍미가 조화롭게 얽힌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미가 이 감자 하나에 응집되어있는 것 같다.
신선한 충격을 받고 넋을 잃은 아슈르 백작에게 블란드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왔다.
“맛있지요?”
“맛있냐니! 무슨!”
아슈르 백작이 진저리쳤다.
“이 귀중한 진미를 고작 맛있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더냐! 이것은, 그래! 천상의 맛이다! 신들의 음식이야!!”
“…”
역시 피는 진하다.
블란드와 아슈르 백작은 입맛이 쏙 빼닮아 있었고 똑같이 표현력도 부족했다.
어찌됐든 새로운 감자 매니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그리드 공작각하를 섬기시겠습니까?”
상황을 정리한 라우엘이 아슈르 백작을 독대했다.
입가에 감자를 묻힌 아슈르 백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앞으로 어쩔 계획이지? 그리드 공작은 에트날과 가우스 양국을 동시에 적대하게 되었다. 제아무리 스테임 후작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리드 공작이라고는 하나 과연 두 개 국가의 협공을 견뎌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군.”
라우엘이 세 손가락을 펼쳤다.
“간과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는데,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가 적대하게 된 국가는 에트날과 가우스 왕국뿐만이 아니라 사하란 제국까지 포함됩니다.”
“제국?”
서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사하란 제국의 전력은 압도적이다.
거느린 병사의 숫자만 해도 100만이 넘었고 기사는 무려 3천 명에 육박한다. 아슈르 백작만큼 뛰어난 대마법사도 몇이나 있었다.
한 마디로 절대최강이다. 제국을 적대하게 된다는 것은 즉 파멸을 뜻한다.
“어째서 제국을 적대하게 되었다는 거지?”
굳은 얼굴로 질문하는 아슈르 백작에게 라우엘이 설명해주었다.
“아스란 국왕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세력이 바로 사하란 제국이거든요.”
수많은 정황들이 아스란 국왕과 사하란 제국의 협력관계를 증명해주고 있다.
라우엘은 아스란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그가 제국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확신했던 바 있다.
잠자코 생각해본 아슈르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제국과의 관계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정책상 제국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고 할까? 워낙 사소한 부분들인지라 간과하고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대신들이 너무 허술했군.”
암울하다.
“제국을 적대하게 된 그리드 공작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내가 그를 섬겨봤자 종국에는 개죽음만 당하게 되는 거 아닌가?”
“아뇨,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국은 현재 대륙 남부에서 발생한 반란 때문에 군사력이 분산 된 상태. 이곳 북부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하기에는 어려운 입장입니다. 앞으로 향후 2년 동안은 제국과 직접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죠. 애초에, 아스란 국왕이 제국에게 대놓고 지원 요청을 보내지도 않을 테고.”
에트날은 중립국으로서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제국에게 비록 공물을 바치고는 있다지만 완전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에트날 외에는 몇 개 없었으니까.
만약, 아스란 국왕이 즉위하기 위해서 제국의 힘을 빌렸고 이를 대가로 제국에게 유리한 정책들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대신들이 알게 된다면?
아스란 국왕의 입지는 한없이 약해질 것이며 렌 왕자를 시해하였던 전력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여, 아스란 국왕은 제국과의 관계를 공표할 수 없다는 게 라우엘의 분석이었다.
“…그대는 대륙 전체의 정세와 사람의 입장을 읽고 이용할 줄 아는군.”
“기본 아닙니까?”
“아무나 못 갖추는 기본이지.”
곰곰이 생각해본 아슈르 백작이 결심했다.
“좋다. 이미 에트날로 돌아갈 수도 없는 몸. 혼자 독립 된 세력을 구축하기엔 기반도 약하다. 하니 그리드 공작을 섬기겠다. 단, 높은 대우를 원한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대륙 10대 마법사를 홀대할 수는 없지요. 다만.”
친절한 미소를 그리고 말하던 라우엘이 한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사늘한 표정으로 아슈르 백작에게 주지시켰다.
“그리드 공작각하가 당신의 유일한 하늘임을 늘 명심하고 성심껏 섬기세요. 그분께 예의 없이 구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아슈르 백작은 궁금했다.
지금의 그리드, 과거보다 얼마나 더 성장한 상태이기에 이만한 인재를 완벽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어서 만나보고 싶군.’
블란드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생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그리드에 대한 원한은 눈 녹듯 사라졌다.
기대하던 아슈르 백작이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한데 그리드 공작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파트리안에서의 전쟁은 레이단의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 짓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한데 돌이켜보니 레이단의 수장인 그리드가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에 자리를 비운 걸까?
라우엘이 답변해주었다.
“그리드 공작각하께서는 현재 사냥 중이십니다.”
“…?”
잠시 귀를 의심하였던 아슈르 백작이 곧 납득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 그렇군. 영토를 위협하는 마물들로부터 영토를 수호하고자 홀로 고군분투 중인가.”
“뭐… 비슷합니다.”
그리드의 성장이 곧 절대적인 무기가 된다. 그리드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템빨단은 안전해졌으므로 아슈르 백작의 해석과 맥락이 통했다.
흐뭇한 표정을 지은 라우엘이 페이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드디어 북부로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정대로 스테임 후작을 찾아가 그리드님께서 독립하셨음을 전해주십시오.
스테임 후작이 그리드를 섬기겠노라고 다짐해주는 순간.
-우리는 그리드님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리드가 왕이 된다고 해서 어떤 큰 변화를 맞이할 수 없다.
그리드의 왕국은 에트날 왕국과 가우스 왕국, 그리고 사하란 제국에게 삼면이 둘러싸인 채 견제당하며 고통만 겪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금방 망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개의치 않고 일을 서둘렀다.
이유는 단 하나.
그리드에게 <최초의 왕>이라는 칭호를 바치고 싶어서였다.
‘아레스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장담컨대 레전드리 등급의 칭호다.
그 효과는 <구국의 영웅>을 가뿐히 상회할 것이라는 게 라우엘의 추측이었다.
***
“파트리안이 함락되었다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슈르 백작이 배반하여 그리드 공작의 휘하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 이럴 수가…”
에트날 왕국의 수도, 라인하르트.
설마 철옹성 파트리안이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아스란 국왕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대신들에게 물었다.
“짐이… 짐이 아슈르 백작에게 원군으로 보내주었던 기사의 행방은?”
“전쟁 도중에 사망하였답니다. 그것도 레이단의 이등병에게 패배해서.”
이등병보다 못한 기사 따위를 굳이 원군으로 보냈던 이유가 뭐지?
이와 같은 의문을 품은 대신들의 질타하는 눈빛이 아스란 왕에게 쇄도했다.
아스란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솔로 넘버 나이트가 이등병에게 패배해서 죽었다고?’
진실일 리가 없다. 왜곡 된 소식이다.
아스란이 확신했다.
‘그리드 공작은 노틸러스의 정체가 적기사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적기사의 죽음을 표면화하지 않기 위해서 이등병이라는 존재를 이용했음이 분명하다.
‘제국은 노틸러스가 솔로 넘버 나이트였음을 밝히지 못하게 됐다. 그리드를 상대로 이를 문제 삼을 수 없게 됐어.’
제국 입장에서, 제국이 자랑하는 솔로 넘버 나이트가 일개 이등병에게 죽었단 사실을 어디 공표할 수 있겠는가?
없다.
망신을 피하고자 노틸러스라는 인물 자체를 모르쇠로 일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드 공작…’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무서운 자다.
그렇다.
아스란 국왕은 상상조차 못했다.
이번 사건에 그리드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어쩌면 앞으로의 전쟁에도 그리드가 참전하는 일은 드물 것이란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다.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바라는 것은 무한한 성장인 바.
템빨단이 전쟁을 하든, 나라를 세우든.
그리드는 신경 쓰지 말고 솔로 플레이에만 전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라우엘의 바람이었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보일 계획이었다.
‘아그너스처럼 말이지요.’
네크로맨서 랭커가 속한 길드들에게 추대 받는 아그너스.
그는 세력전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솔로 플레이만 하면서도 영광이란 영광은 죄다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남이 하는 일을 나라고 못할까?
아그너스의 참모 베라딘에게 라이벌 의식을 품고 있는 라우엘이었다.
그는 그리드에게 아그너스 이상의 편의와 영광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다졌다.
이른 바 <그리드: 눈 떠보니 황제더라>프로젝트의 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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