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5권 - 8화
“자, 그럼.”
대장간에서 나온 그리드가 우선 알람부터 설정했다.
3일 후에 열릴 한속봉 배 대회에 맞춰서 귀환하기 위한 알람이었다.
“겁나 기대되는군…”
그리드는 한속봉 배 무구 제작 대회를 반드시 꼭 관람하고 싶었다.
화이트가 말하기를, 대회에 참가하는 대장장이들의 실력이 하나 같이 대단하다고 하였던 까닭이다.
‘검은 모루의 대장장이들은 무두질에 특화되었고, 붉은 집게의 대장장이들은 담금질에, 푸른 불꽃의 대장장이들은 풀무질에 일가견이 있다지?’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이 뛰어난 단조질을 자랑하던 것처럼 말이다.
‘좋은 공부가 될 거야.’
그리드가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하였다고는 하나, 전반적인 경험과 지식은 다소 부족한 경향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일개 고급 대장장이들과 기술을 논할 수준이겠느냐마는,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온 동대륙 대장장이들의 노하우는 대단한 것이다.
하얀 망치에서 그랬듯, 그리드는 한속봉 배 대회에서도 새로운 가르침을 엿볼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전설의 대장장이임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는 나!’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자신보다 실력이 부족한 대장장이들에게도 일일이 배움을 열망하는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그리드였다.
엣헴, 가슴을 당당히 펴고 대로를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마치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다.
“음?”
판게아 북쪽에 몬스터 군락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북문으로 이동하던 그리드.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기에.
“한 번 잡숴봐! 딱 한 입만 베어물면 육즙이 좌르르 흘러나오는 오크 크림파이! 오크의 구수한 지방과 상큼한 크림의 조화가 끝내준다고! 판게아의 작은 영웅 크라우젤님께서도 맛있다며 극찬하셨던 요리야!”
‘크라우젤? 판게아의 작은 영웅?’
저 배불뚝이 요리사 아저씨가 말하는 크라우젤이 내가 아는 크라우젤과 동일인물일까?
‘당연히 맞겠지.’
랭킹 1위 시절의 크라우젤은 언제, 어디에서나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존재이다.
그는 단지 강하고, 빠르게 레벨을 올릴 뿐만이 아니라 퀘스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로도 유명했다.
“크라우젤이 앞서 방문했던 마을이나 도시에는 온통 그의 이름이 울려 퍼진다라…”
플레이어들 사이에 괜히 이런 말이 떠도는 게 아니었구나.
직접 체험해보고 쓴 웃음을 흘린 그리드가 중년의 배나온 요리사에게 다가갔다.
“오크 크림파이 하나 주세요.”
크라우젤이 극찬했다는 요리는 과연 어떤 맛일지 순수하게 궁금하다. 또한, 이곳에서의 크라우젤은 어떤 활약을 했는지도 알고 싶다.
‘작은 영웅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뭘까?’
요리 앞에 붙은 ‘오크’라는 단어가 설마 몬스터 오크를 뜻할 리는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그리드.
당당하게 1실버를 지불하고 음료수 서비스까지 요구한 그가 잠시 후 눈앞에 나온 파이를 보고 기대감에 휩싸였다.
언뜻 오렌지 빛깔을 띠우는 새하얀 크림이 한가득 올려져있는 파이.
겉은 바삭해 보였고 속은 촉촉할 것 같다.
“오호.”
1실버가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크림파이를 크게 한 입 떠먹은 그리드. 그의 얼굴이 이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개도 안 먹겠다.’
과일의 상큼함은 없고 식초의 시큼함이 가득한 크림. 부드럽지 않고 질척질척한 것이 혀에 착착 들러붙는다. 속에 들어있는 고기는 너무 느끼하고 질기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할 것 같았던 파이? 겉은 파삭하고 속은 타서 사약처럼 쓰다.
‘이딴 걸 음식이라고 내오다니?’
사용 된 재료가 아깝기보다, 이 요리를 만든 요리사가 소비하는 산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노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요리사 이단이 다가와 물었다.
“어때? 맛있지?”
“…”
진심으로 묻는 말인가?
그리드는 말문을 닫아버렸고 이단은 당당하게 말했다.
“크라우젤님께서는 이 파이를 앉은 자리에서 무려 4개나 먹어치우셨다니까? 정말이지 얼마나 맛있으셨으면!”
“그 말이 진짭니까?”
“암, 실제로 본 사람도 수백일세.”
“미친…”
그리드는 크라우젤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대체 평소에 얼마나 맛없는 음식을 먹고 자랐으면 이딴 쓰레기 같은 파이조차도 맛있게 먹었단 말인가?
안타까워하던 그리드가 이단에게 황급히 질문했다.
1실버를 허무하게 잃을 순 없는 노릇이었고, 그는 이 식당에 발을 들인 이상 뽕을 뽑을 작정이었다.
“크라우젤이 대체 누구기에 자꾸만 크라우젤, 크라우젤 하는 겁니까? 도대체 그가 무슨 활약을 하였기에 작은 영웅이라고 불리는 거죠?”
“아, 외지인이었구만. 어쩐지 내 파이의 맛을 잘 모르는 눈치더라니.”
‘잘 알아.’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억누르는 그리드에게 이단이 설명해주었다.
“이곳 판게아는 본래 수백 년도 더 전부터 풍요롭고 평화로운 도시였네. 하지만 2년 전, 갑자기 풍파가 닥쳐왔지. 위대한 우리의 영주 한속봉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에 걸리셨고, 그분의 측근이었던 아루베가 잠시 동안 영주대리직을 맡게 되었을 때였네.”
“그 아루베라는 놈이 탐관오리 짓을 했고, 때마침 나타난 크라우젤이 처단해줬다는 이야깁니까?”
“헛… 흠, 흠, 얼추 비슷하긴 하지만 다르네. 예끼, 이 사람아. 사람이 말을 하면 우선 좀 경청을 하게. 나도 말 좀 합세.”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나보다.
“뭐, 중반까지의 이야기는 자네의 예상과 비슷하네. 한속봉님을 닮아 행실이 바르기로 유명했던 아루베가 영주가 된 이후론 폭군이 되어버렸어. 수시로 시찰을 나와서 아녀자를 희롱하고 온갖 핑계로 농부들의 땅을 빼앗았으며, 급기야는 세금도 멋대로 팍팍 올리기 시작했지.”
너무 뻔한 이야기다.
흥미를 접은 그리드가 귀를 후비는 사이, 이단의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판게아 주변에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했네. 지난 수백 년 동안 몬스터들이 얼씬도 못했던 판게아에 말이야!”
“혹시 북쪽에 있다는 몬스터들의 군락도 그때 생긴 겁니까?”
“맞네, 맞아. 놈들은 정말로 두려운 존재였다네. 몬스터 주제에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행동하면서 판게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 백성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난 몬스터들을 원망하고, 증오할 뿐.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짓밟힐 따름이었어.”
“바로 그때 크라우젤이 나타난 거군요?”
“그렇지! 우리의 작은 영웅께서 나타나셨지! 마치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것처럼 한 순간에 훅하고 나타나더니만 몬스터들을 하나, 둘씩 천천히 해치워나가셨어.”
‘하나, 둘씩. 천천히?’
추풍낙엽처럼 베었다고 표현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소박하다.
‘보통 영웅담을 말할 때는 과장을 보태기 마련인데… 아.’
그리드가 깨달았다.
‘동대륙의 몬스터들, 정말 엄청나게 강하구나.’
판게아를 침략했던 몬스터들.
천외천 크라우젤조차도 한두 마리씩 간신히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을 터다.
그렇기에 요리사의 표현이 이런 것이고.
“하지만 크라우젤님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판게아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몬스터들은 강해도 너무 강했어. 판게아가 자랑하는 철갑기마대의 진형과 전략을 파악해서 카운터를 먹이지를 않나… 그래, 마치 판게아를 훤히 꿰뚫고 있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지.”
“그 누군가가 바로 아루베였나보죠?”
“허?”
이단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네, 내가 할 이야기를 어찌 그렇게 자꾸만 쉽고 정확하게 유추하는 거지? 혹시 자네, 명탐정인가? 집나간 우리 집 강아지도 좀 찾아줄 수 있는가?”
“…”
일일이 반응해주기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리드가 잠자코 있자, 이단이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 자네 말대로 몬스터들은 아루베가 조종했던 것이었어. 족히 2천이 넘는 몬스터가 한 사람에게 조종당했던 것이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심지어 아루베는 평범한 문관 출신이었는데 말이야!”
“와아, 놀랍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실로 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예상과 달리 너무 길어진다.
안 그래도 맛없는 음식을 먹고 불쾌하던 차인 그리드가 슬슬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초조해지는 그때였다.
“사실 여기엔 반전이 있지. 아루베는 아루베가 아니었어. 사악한 도사가 진즉에 그를 죽이고 아루베로 변장한 후에 판게아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게야.”
‘그놈의 도사 이야기는 참 많이 나오는군.’
어쨌든 이로서 확실해진 게 있다.
동대륙인들이 말하는 도사란, 서대륙의 마법사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제아무리 전설의 대마법사라도 2천이나 되는 몬스터를 수족처럼 부릴 순 없는 법이니까. 그렇지?’
‘맞다. 테이밍 마스터조차도 그건 불가능하다. 도사라는 놈들이 전부 다 강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경계하는 편이 옳겠군.’
‘그래, 이만 가자.’
브라함의 대답을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리드를 이단이 가로막고 섰다.
“그래서 말인데. 작은 영웅 크라우젤님의 힘만으로는 해치울 수 없었던 그 사악한 도사를 해치워주신 큰 영웅의 흔적을 찾아봐주시게.”
퀘스트 의뢰라니?
갑자기 이야기가 생뚱맞게 돌아간다?
두서없는 결론에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시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큰 영웅의 흔적을 찾아라!>
난이도:A
사악한 도사가 정체를 드러냈을 당시.
병마와 싸우고 있던 한속봉과 아직 힘이 미약했던 작은 영웅 크라우젤은 절망을 맛봤습니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도사를 처단할 수 없었고 판게아는 그대로 멸망의 위기를 걷는 듯 보였습니다.
한데 그때 수수께끼의 영웅이 나타났습니다. 훗날, 판게아의 주민들에게 큰 영웅이라고 칭송받게 되는 존재.
그는 순식간에 사악한 도사를 처리하고 판게아를 위기로부터 구원한 영웅이지만 본인의 정체도 밝히지 않고 그대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판게아의 주민들은 여전히 아쉬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이들은 반드시 큰 영웅을 찾아내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은 바람을 지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요리사 이단은 꼭 큰 영웅을 찾아내야할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가문대대로 요리사였던 그의 집안에 내려오던 후라이팬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몬스터 군락 어딘가에 떨어져있을 후라이팬을 찾아라.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단의 식당 평생 무료 이용권. 캐릭터 경험치 30퍼센트.
퀘스트 실패 시:말 많기로 유명한 이단이 판게아 곳곳에서 당신의 흉을 보고 다닐 것입니다.
“영웅이 마지막으로 목격 된 장소가 바로 북쪽이라네! 하지만 그곳은 예전부터 사나운 맹수들이 출몰하기로 유명했고, 이후에는 몬스터들이 진을 치게 되어서 내가 직접 발을 들이기 어려워. 제발 부디 영웅의 흔적을 뒤쫓아 내 후라이팬을 되찾아 주시게!”
“…아.”
필시 나쁘지 않은 퀘스트다.
그리드는 어차피 북쪽 몬스터 군락에서 사냥할 계획이었고, 겸사겸사 후라이팬을 찾아볼 수 있는 입장이었다.
만약 후라이팬을 찾을 수만 있다면 공짜로 경험치를 30퍼센트나 획득하였으니 엄청난 이득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이단의 식당 평생 무료 이용권에 있었다.
‘…뭐, 줘도 안 먹으면 되려나.’거절할 이유는 없다.
판단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무척 힘들고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제가 당신을 위해서 굳이 수고를 해주도록 하죠. 하지만 한 가지 정말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영웅의 흔적이랑 당신의 후라이팬에 당최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거요?”
이단이 이를 갈았다.
“사악한 도사 놈이 나타났을 때…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나는 손에 후라이팬을 그대로 든 채로 거리에 뛰쳐나갔었지. 그리고 그 빌어먹을 영웅 놈이랑 딱 마주친 거야. 놈이 도사를 때려잡겠답시고 내 후라이팬을 멋대로 빼앗아 가지 뭔가?”
“…도사를 후라이팬으로 때려잡은 겁니까?”
“그래! 그 영웅 놈이 내 후라이팬으로 도사의 면상을 후려치는 것까진 아주 좋았어! 멋지고 통쾌했어! 하지만 뭐냐고! 빌린 물건을 썼으면 돌려주고 가야지! 그놈은 그대로 후라이팬을 가지고 떠나버리지 뭔가!”
“…”
“요리사에게 있어서 후라이팬이란 즉 영혼과도 같거늘! 그놈은 여정 길에 죽이나 끓여먹으려고 내 영혼을 훔쳐간 게야! 그리고 한 번 쓰곤 생각 없이 아무데나 휙 버려놨겠지!”
심정은 얼추 알겠지만, 말이 진짜 너무 많다. 목소리 톤도 높아서 듣고 있기가 피곤하다.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던 그리드가 서둘러 식당을 떠났다.
그리고 곧바로 북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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