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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54화 (349/1,794)

템빨 25권 - 17화

‘쓴 물약을 마실 때마다 미각기능 OFF기능이 없는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일부 물약의 쓴 맛은 Satisfy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이다.

특히 극소수의 사람은 쓴맛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까닭에 미각 OFF기능을 업데이트해달라고 요구하는 운동까지 벌인 바 있다.

하지만 S.A그룹은 이들의 요청을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각 등의 감각은 Satisfy의 현실성을 높여주는 최고의 기능들이었으므로, 플레이어에게 이를 배제할 권한을 줌으로서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다르게 해석했다.

‘이단이 만든 음식을 먹고 고통 받으라는 의미에서 미각 off기능을 안 만들었던 거야… 한 마디로 엿 먹으라 이거지.’

Satisfy 제작진 중에는 분명히 변태가 있다.

재차 확신한 그리드가 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요구했다.

이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흙과, 혓바닥에 감겨있는 역겨운 비계를 흘러내릴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맹물… 아니, 그 정도론 안 될 것 같다. 여기서 제일 싼 허브티 한 잔.”

“제일 싼 허브티 말씀입니까?”

“어.”

“향이나 맛은 감안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단지 가격적인 측면만 보고 차를 주문하시는 거라면 둥굴레 차를 추천 드립니다. 그게 가장 싸요. 맛도 있고요.”

“호오?”

그리드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종업원의 행색을 뒤늦게 살폈다.

상당한 미인이지만 무표정하여 감정을 읽기가 어려운, A컵의 소녀였다.

그리드에게 여성으로 인식되지 않는 존재란 뜻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녀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엑스트라 NPC치고 상당한 눈치와 지능.’

손님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캐치하고 접객하는 NPC는 흔치 않다.

Satisfy의 인공지능이 완벽하다고는 하나 NPC 개체별로 큰 차이를 보였고, 상점 종업원A 정도 위치의 NPC들은 대게 쥬드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지능밖에 보유하지 못했다.

그러한 점을 감안했을 때, 이단 식당의 종업원 소녀 얀페이는 매우 흥미로운 NPC였다.

‘설마 진흙 속의 진주라던지?’

만약, 그리드가 보통의 플레이어였다면 얀페이의 특이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애초에 눈치 채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일반적인 플레이어와 다르게 NPC에게 크게 집중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행동할 수 있었다.

“응, 그러면 둥굴레 차 한 잔.”

“네.”

차를 주문함으로서 얀페이와 이단의 관심을 분산시킨 후.

철컥.

인벤토리로부터 <대영주의 검>을 꺼낸 그리드가 잽싸게 <캐릭터 관찰>스킬을 사용했다.

띠링~

이름:얀페이

나이:17 성별:여

직업:식당 종업원

칭호:눈치 백단

1남 14녀를 두고 있는 어느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4녀 중 7녀라는 어중간한 포지션을 지녔으므로 언니들에게는 눈칫밥을 먹는 한편 동생들을 챙겨야하는 신세입니다.

콩 한 쪽조차 나눠 먹어야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그녀가 습득한 생존 기술은 무척 뛰어난 것입니다.

레벨:53

근력:22/99 체력:92/510

민첩:65/250 지력:204/1,090

손재주:139/650 매력:53/150

스킬:접객(A), 가사노동(A), 적응력(S), 호구 감지(SS)

“…”

재능이 있어야만 된다는 기사들조차 S급 스킬을 갖는 경우가 드물다.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었다.

한데 얀페이는 S등급 스킬에다가 무려 SS등급의 스킬까지 갖고 있었다.

일개 종업원의 그릇이 아닌 것이다.

동대륙 NPC들은 전부 이럴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단지 얀페이가 특별한 거다.

‘서대륙으로 돌아갈 때 얘도 데려가야겠다.’

아이린과 로드를 보필하는 시녀로 둬도 최고겠지만, 단순한 시녀로 사용하기에는 지력 최댓값이 무척 높아 아깝다.

‘호구 감지도 썩힐 수 없는 스킬이고.’

그리드가 결정했다.

‘그래, 라빗에게 부관으로 붙여주자.’

모래를 영약으로 바꿔서 팔아먹고, 피아로에게는 고작 73실버의 녹봉을 주는 등.

호구들 등쳐먹기에 여념인 라빗에게 있어서 호구 감지 스킬을 지닌 얀페이는 큰 힘이 될 인재였다.

‘날개를 다는 격!’

싱글벙글.

새로운 인재를 발견하게 된 그리드는 너무 기뻤다.

독극물에 가까운 음식을 먹은 기억 따위 씻은 듯이 날려버리고 활짝 웃었다.

그를 본 이단이 크게 오해했다.

‘이 친구…’

남들 모두가 비난하는 내 음식을 먹고도 미소지어주는가?

이런 사람은 작은 영웅 크라우젤 이후로 처음이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간다 싶었어.’

동대륙에서 그리드는 아무런 직위가 없다.

한낱 여행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높은 위엄과 매력 스탯이 있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어도 NPC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선사했다.

까칠하기로 유명한 이단이 그리드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수다스럽게 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본래 이단으로부터 퀘스트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리드가 알 리 없다.

동대륙은 불과 31명의 플레이어만이 발을 들일 수 있었던 영역.

정보가 있을 리 만무하였으니까.

“흐으으음… 자네.”

“네?”

얀페이가 내다준 둥굴레 차를 입안에 넣고 가글하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이단이 성을 낼 거라고 오해한 것이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은 직후에 왜 입을 행구는 거냐면서 욕할 셈인가?’

실수하고 말았다.

또 호감도가 떨어지게 생겼다.

‘제길, 난 섬세함이 부족하다니까.’

의외로 자신의 문제점 중 하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리드였다.

긴장하는 그에게 이단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내 음식을 먹은 후로 그리 행복한 미소를 그려주니 내 참 고맙네. 자네는 진정한 미식가이며 요리사에 대한 예절을 아는 사람이군.”

‘이게 뭔 헛소리야?’

당신은 요리사로서 손님에 대한 예절부터 갖춰라.

‘아예 음식을 안 만들면 돼.’

태클을 걸고 싶은 그리드였지만 꾹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오로지 이단의 호감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리고 노력은 통했다.

“이방인 같은데… 판게아에는 며칠 동안 머무를 계획인가? 자네만 괜찮다면 내 매일 세끼 식사를 자네에게 제공하고 싶군. 가보를 되찾아준 보답으로 말이야.”

“아…”

그것 참 바라던 일이다.

그리드는 이단과 지속적인 친분을 쌓음으로서 평생 그의 요리를 섭취하는 게 목표였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이단이 자처해서 그리드에게 교류와 요리를 약속하고 있었다.

원했던 것 이상으로 상황이 더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왜 안 기쁘지?’

삼시세끼를 이단의 음식만 먹어야한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게 된 그리드.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리고 다시금 억지웃음을 그리면서 말했다.

“그래주신다면야 저야 너무 영광이고 기쁘죠.”

“오오! 역시! 나와 식성이 비슷한 자네라면 필시 고마워할 줄 알았다네!”

“…아, 근데 저는 참고로 닭고기와 소고기, 그리고 계란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거지 같이 조리해도 맛없을 수가 없는 식재료들이다.

나름 머리를 굴려서 말한 그리드에게 이단이 흔쾌히 반응했다.

“음, 좋네. 내 그 3가지 재료를 위주로 조리해서 매일 식사를 제공하도록 하겠네.”

“그것 참 감사하군요!”

드디어 진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된 그리드였다.

***

이단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그리드는 얀페이와의 관계에도 꾸준히 신경을 썼다.

사소한 눈짓, 말투조차도 신경 써가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안녕히 가십시오.”

얀페이는 식당을 떠나는 그리드를 현관 바깥까지 친히 배웅해줬다.

그녀에게 그리드가 최대한 멋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응, 배웅해줘서 고마워. 저녁에 또 올 테니까 그때 보자.”

그리드의 생에 첫 친구는 NPC다.

심지어 부인도, 아들도 NPC다.

NPC를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도가 튼 인물이란 뜻이다.

그는 자신이 얀페이와의 호감도를 빠르게 올렸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절반만 맞았다.

얀페이가 그리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얀페이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호구 감지 스킬을 지녔다.

그녀는 그리드를 호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는 손님이라니.’

그리드가 주문했던 것은 제일 싼 차.

하지만 메뉴판은 요구하지 않았다.

얀페이는 그를 속일 기회가 있었고, 그렇기에 속였다.

사실은 제일 싼 차가 아니라 두 번 째로 싼 둥굴레 차를 추천해서 팔아먹은 것이다.

‘당분간 매일 방문할 것 같으니까 그때마다 둥굴레 차를 팔면…’

이번 달 월급은 밀리지 않고 간신히 제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철없는 언니들과 등 돌리면 배고프다고 성화인 동생들을 굶기지 않아도 된다.

‘휴.’

속으로 안도하는 얀페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판단했다.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에는 임팩트가 부족해. 관계에 슬슬 쐐기를 박을 때다.’

NPC 공략의 달인 그리드가 손을 풀었다.

“얀페이, 이제 보니까 네 어깨가 살짝 뭉쳐있는 것 같아. 자, 이리 와봐.”

“…?”

갑자기 어깨가 뭉쳐있다니?

얀페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꾸욱. 꾸욱.

그리드가 전설의 손기술을 발휘했다.

얀페이에게 순식간에 접근하여 그녀의 뭉친 어깨를 정확히 조준, 손끝으로 경쾌하나 힘 있게 눌러주었다.

순간 얀페이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변화했다.

“아학…!”

그리드의 시각으로 봤을 때 얀페이는 아직 어린 소녀이지만, Satisfy 기준으로 봤을 때는 결혼 적령기의 숙녀다.

하지만 얀페이는 아직 결혼을 꿈꿀 수 없는 입장이었다.

철없는 언니들이 먼저 시집을 가야 그녀도 시집을 갈 수 있었고, 이 경우 혼기를 놓칠 확률이 무척 높았다.

하여 얀페이는 자신이 평생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해왔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아아, 이 기분이 바로 말로만 듣던…!’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연애조차 못해 본 얀페이.

남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론밖에 모르던 그녀가 드디어 현실적인 체험을 하게 됐다.

그리드의 손끝이 자신의 살결을 스쳐올 때마다 그녀는 책에서나 읽었던 감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 감각은…

이하 생략.

“하아… 하아…”

무표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볼에 홍조를 띄운 얀페이의 얼굴에 깃든 것은 오로지 환희뿐이었다.

촉촉이 젖은 채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한 그리드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어때? 피로가 쫙 풀리지?”

“…네에.”

“다행이네. 앞으로 만날 때마다 해줄게.”

“……!”

그리드가 해준다는 것은 안마였으나 얀페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이, 이런 남사스러운 행위를 만날 때마다 해주신다고…?’

부끄럽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아아, 나는 타락하고 마는 걸까.’

혼란 속에 두려워하는 얀페이였다.

한편, 그녀를 뒤로한 그리드는 하얀 망치 대장간으로 향했다.

숙소 따위 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대장간이야말로 최고의 일터이자 쉼터였으니까.

‘대장간 대회까지 15시간 남았나. 여왕 쥐 모피 손질해보다가 이단한테 밥 얻어먹고 자면 딱이겠네.’

***

“이틀 전에 뜬 시스템 메시지는 확인들 했겠지?”

“당연하지. 31번째 입장자가 있다는 메시지였지?”

“맞아. 드물게 혼자 왔어.”

“동대륙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을 텐데 용케 용기를 내서 혼자 방문했군.”

“미련한 게지. 큭큭,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어. 제대로 등쳐먹을 수 있겠군.”

판게아의 한 선술집.

구석에 앉은 플레이어들이 저들끼리 음침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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