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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59화 (354/1,794)

템빨 25권 - 21화

“…”

그리드가 놀라는 그때, 인파로 북적거리던 거리에 일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천 명의 사람이 오가는 대로.

심지어 축제를 앞두고 있는 대로가 일제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현상.

그것은 직접 체험하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파그마?’

갑작스러운 침묵의 원인!

대로 중앙에 등장한 일단의 무리를 주시하는 그리드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조아리며 좌우로 물러서는 인파를 고고하게 가로지르는 무리.

그들은 전원 푸른색 도포를 입었으며 긴 흑발을 뒤로 올려 묶고 있었다.

과거, 신비의 숲에서 랜디가 재현한 바 있는 파그마와 완전히 똑같은 행색들이었다.

‘저들은 뭐지?’

하나 같이 미인처럼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도포의 사내들.

그들은 어째서 파그마와 꼭 닮은 행색을 하고 있으며, 어째서 사람들은 저들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가?

의문에 휩싸여있는 그리드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그냥 평범한 NPC였다.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몸을 떨고 있었다.

보아하니 도포의 사내들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양반들께서 행차하셨는데 고개를 그리 빳빳이 들고 있다니, 자네 미친 겐가? 목숨이 한 열 개는 돼?”

“양반?”

“환국의 주민들 말일세!”

‘환국…’

백린목을 국목(國木)으로 삼은 국가라고 알고 있다.

분위기에 편승하여 허리를 굽힌 그리드가 NPC에게 질문했다.

“판게아가 환국의 영토였습니까?”

“에잇, 쯧쯧. 양반님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했는데, 이제 보니 바보였구먼.”

“…”

“판게아는 초국의 영토지.”

“근데 왜 환국의 양반들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거죠?”

“자네, 지금 무슨 말인가? 무릇 인간이라면 환국을 섬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바보라서 그도 모르는 게야?”

“…?”

환국은 일반적인 나라의 개념이 아닌가?

‘아무래도 파그마가 환국 태생인 것 같은데 말이지…’

차차 알아가게 될 부분.

그리드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정했고,

“흐음.”

때마침 그리드의 곁을 지나치던 푸른 도포의 양반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리드가 느낀 것은 경외.

끝을 알 수 없는 기운과 압도적인 위엄이 심장을 찌릿하게 만든다.

[굴복당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단지 눈을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설마…’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저것들 전원 전설이라고?’

그리드가 황당해하는 사이.

“후훗.”

은근한 웃음소리만을 남긴 양반들이 그리드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

이단의 식당.

“둥굴레 차를 미리 준비해놓으면 될까요?”

도도한 고양이를 연상하게 만드는 미모의 소녀.

종업원 얀페이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해왔다.

하지만 그리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전 거리에서 마주쳤던 양반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던 까닭이다.

‘확실해. 필시 전설급의 존재감이었어.’

브라함에게 처음 육체를 빌려주었을 당시.

그리드는 적해 상공에서 만물의 마나를 끌어 모으는 브라함을 목도하고 전율한 바 있다.

그리고 양반들의 존재감이 당시의 브라함과 맞먹었다.

‘하지만… 고서에 서술 된 전설 중에 동대륙 출신은 없다고 들었는데? 파그마도 단지 동대륙 출신일 수도 있다,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고.’

애초에 전대 전설은 아홉 명이다.

하지만 오늘 본 양반의 숫자는 열 명이 넘었다.

‘설마 전설이라는 건 동대륙에도 따로 존재하는 거였나?’

서대륙의 아홉 전설들과 별개로 말이다.

‘…아,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구나.’

서대륙과 동대륙은 교류가 없었고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전설을 공유하는 것이 도리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따로 구분되는 것이 맞았다.

‘로드만 봐도.’

서대륙을 대표할만한 천재라고 했지 동대륙까지 아우를 천재라고는 안 했다.

‘이야… 이것 참.’

세상이 더 넓어졌다.

서대륙과 지옥에만 해도 아직 넘보지 못할 강자들이 넘쳐났건만, 거기에 동대륙의 양반들까지 추가돼버렸다.

이에 그리드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리드는 도리어 즐거웠다.

‘앞으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강해져도 되겠군.’

지금보다 더욱 더 강해져도 밸런스 파괴라고 욕먹을 일 없게 됐다.

즉, 그리드에게는 강해질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전설이고.’

늘 노력하니까.

그래, 바로 지금처럼!

“자! 오래 기다리셨네!”

“…”

이단이 그리드의 조식으로 달걀 요리를 내왔다.

노른자는 아주 바싹 익히고 흰자는 익히지 않은 달걀 요리였다.

“미친. 일부러 만들기도 힘들겠네.”

저도 모르게 속내를 뱉는 그리드였다.

다행히도 이단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일반적인 달걀부침보다는 손이 많이 가긴 하지. 흰자와 노른자를 따로 분리한 후, 노른자만 익힌 뒤에 날 흰자를 소스의 개념으로 붓는 요리이니까.”

“…그냥 평범하게 부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이 사람아. 평범한 달걀부침은 노른자와 흰자가 둘 다 퍽퍽해서 먹으면 목이 메질 않나?”

“적당히 잘 익히면 안 그런…”

“난 내 손님이 달걀부침을 부드럽게 먹어주길 바라는 올바른 요리사의 마음으로 이 요리를 만든 걸세. 부드러운 흰자를 날것 그대로 사용하여 퍽퍽한 노른자를 촉촉이 적신다는 발상 자체가 새롭고 대단하지 않나?”

‘애초에 반숙을 하면 되잖아.’

악의로 만든 요리가 아니라는 게 놀랍다.

그리드는 정말로 먹고 싶지 않았으나,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고 달걀 요리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물컹물컹.

씹을 때마다 흰자의 진득거리는 느낌이 치아를 기분 나쁘게 감싼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걀의 비린내가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고, 특유의 고소한 맛이 사라질 정도로 바짝 익힌 노른자는 퍼석퍼석하여 스펀지를 씹는 느낌을 줬다.

꿀꺽!

뱉으려다가 참고 간신히 삼킨 그리드가 쓰디 쓴 인내 끝에 달콤한 과실을 맛봤다.

[제대로 조리되지 않은 음식을 먹어 식중독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체력이 영구적으로 1 상승하였습니다.]

‘제대로 조리되지 않은 음식이라는 판정을 받을 정도라니…’

하지만 이단은 진지하게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

이단은 의심의 여지없이 요리에 재능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아.”

한숨 쉰 그리드가 이단에게 질문했다.

“소금을 안 쓰시는 이유는 뭡니까?”

간이라도 짭짤하면 조금이나마 먹기 편해질 텐데 말이다.

한탄하는 그리드에게 이단이 당당히 답했다.

“염분은 건강에 나쁘니까!”

‘라면 먹으면 죽는 줄 알겠네.’

“여기요.”

속이 느글거려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리드에게 얀페이가 둥굴레 차를 건네주었다.

눈치껏 미리 준비해놓은 것이다.

어서 입을 행구고 싶었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한 줄기 광명과도 같은 차였다. 그리드는 얀페이가 천사처럼 보였다.

“고마워.”

벌컥벌컥.

구수한 둥굴레 차의 향으로 비릿한 달걀 향을 날려버리고자 시도하는 그리드.

얼굴색을 차츰 되찾아가는 그에게 얀페이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저… 오늘은 다리가 결려요.”

슬쩍.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얀페이가 하얗고 가는 종아리를 노출시켰다.

제법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20세 미만의 여성. 그것도 D컵 이하의 여성은 이성으로 인식되지 않았으니까!

“응, 오늘도 성심성의껏 주물러줄게.”

“…”

그리드는 사심 없이 말하는 반면 얀페이의 얼굴은 당근처럼 달아올랐다.

그녀는 이미 그리드의 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

“와주셨군요!!”

판게아 영주성의 북쪽에 마련 된 대규모 경기장.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곳의 선수대기실을 그리드가 방문하자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이 반겨주었다.

빈틈없이 새카만 피부를 자랑하는 흑인 화이트가 그리드의 두 손을 맞잡았다.

“나무꾼님 덕택에 얻은 백린목으로 원하는 온도의 불길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올해 대회에서 우리 하얀 망치가 우승하게 된다면 모두 당신의 공입니다.”

‘나무꾼?’

그리드는 황당했으나 딱히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대회의 주제가 뭡니까?”

대장장이의 관점으로 흥미를 보이는 그리드에게 화이트가 대답해주었다.

“작년과 똑같습니다. 재작년 전쟁 통에 소실 된 판게아의 보물을 재현하는 것이죠.”

“그 보물이 뭔데요?”

“주작궁. 바로 활입니다.”

“주작…궁!”

그리드가 강한 흥미를 느꼈다.

주작궁.

이름부터가 주작… 그러니까 강력한 화염 속성이 깃들어있을 것 같은 활.

지슈카와 찰떡궁합일 가능성이 높다.

‘무려 동대륙의 보물이니만큼 기본 공격력부터가 장난 아닐 거야. 제작과정을 엿보고 도안의 획득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겠군.’

아이템의 제작과정을 단지 보기만하고 도안을 얻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10,000명의 대장장이 중 채 1명도 못해낼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일반적인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설의 대장장이이다.

그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었다.

‘물론 성공확률은 낮겠지만.’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스스로를 격려하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그런데 대회의 주제가 작년과 같은 이유가 뭡니까?”

“작년에는 우리 대장장이들이 완벽한 주작궁을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한속봉 영주님께서는 완벽한 주작궁이 재현될 때까지 대회 주제를 유지하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본래 주작궁은 어떤 활이었죠? 혹시 주작궁의 도안은 있습니까?”

“청룡, 주작, 백호, 현무 4대 수호신 중 하나인 주작을 숭상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활입니다. 일발, 일발에 강력한 파괴력과 화염이 깃드는 위력을 발휘하는 활이었죠. 원본 도안은 당연히 없습니다. 먼 옛날에 소실되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저 상상하고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흐음…”

화염속성이 깃든 활이라면 재료로 당연히 화석(火石)을 사용했을까?

‘활대에 화석을 녹여내려면 활대가 철제여야 했을 테고… 철궁은 본래 뛰어난 파괴력을 자랑… 아니, 가만.’

여긴 동대륙이다.

서대륙 대장장이의 관점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동대륙에는 불속성에 특화 된 또 다른 제작재료가 존재할 수도 있… 아!’

그리드의 뇌리로 한 가지 재료가 스쳐지나갔다.

‘백린목!’

그리드는 확신했다.

‘주작궁은 나밖에 못 만드는 활이다.’

왜냐?

백린목을 자르고, 다룰 수 있는 건 전 세계 대장장이 중에서 내가 유일할 테니까!

눈을 번쩍인 그리드가 화이트에게 질문했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어떤 혜택을 얻습니까?”

반짝이는 그리드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탐욕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기세의 강력한 탐욕!

하지만 화이트는 그리드에게 콩깍지가 씐 상태였다.

‘오오, 이 순수한 열정의 눈빛을 보라!’

멋대로 오해하더니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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