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 7화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웅의 주먹을 맞아본 그리드는 철갑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몬스터임을 깨달았다.
놈들을 상대로 화이트를 지켜가면서 싸울 자신이 없었다.
이때 화이트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하자 그리드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최소한 민폐 캐릭터는 아니군.’
근육 우락부락한 중년의 흑인 남성 화이트.
그를 사랑스럽게. 아니,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리드에게 수애가 다가왔다.
“웅의 주먹을 맞고도 멀쩡하다니 대단하세요. 귀인께서 무장하고 계신 미늘 갑옷, 친히 제작하신 건가요?”
그리드가 웅의 공격력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
삼겹갑 뿐만이 아니라 높은 체력 스탯 덕분이기도 했다.
그리드의 체력 스탯은 무려 1,500을 초월하고 있는 바.
그리드의 최소 방어력은 200레벨 중반대 탱커들과 비견되는 수준으로 높은 것이다.
하지만 수애는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상식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그리드처럼 체력이 높은 대장장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수애는 그리드가 높은 방어력을 보유한 이유가 오로지 갑옷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만든 갑옷이 맞습니다.”
촤르르륵!
득의양양해진 그리드가 가슴을 활짝 펼치자 삼겹갑의 멋진 자태가 더욱 더 부각됐다.
반짝이는 칠흑의 미늘 수백 개가 그리드의 움직임에 맞춰서 촤르르, 유연하게 호응하는 모습은 장인이 빚어낸 극상의 예술이었다.
“좋아요. 더 이상 말리지 않을게요. 귀인께서는 성던전에 입장하실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단, 옥체를 보존하시려면 우리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셔야할 거예요.”
“네.”
지시에 따르라는 말을 딱히 괘념치 않는 그리드였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공손한 수애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을 뿐더러, 그녀가 그리드를 통제하려는 의도 또한 순전히 그리드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수애를 나쁘게 볼 이유가 하등 없었다.
‘뭐라고 해봤자 결국 내 마음대로 하면 그만이기도 하고.’
그리드가 보기에 수애와 주작단은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던전에 입장한 이후부터 그들은 철갑귀에 집중해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리드를 통제할 여력까진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밉보일 정도로 선을 넘지는 말자.’
동대륙이라는 배경과 철갑귀를 상대하는 특무대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주작단의 실력은 교황청에서 만났던 적기사보다 위일 것이 분명했다.
시기적으로 4차 전직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4차 전직자는 그리드보다 강할 가능성이 높았다.
괜히 척을 져서 좋을 상대들이 아닌 것이다.
‘기회가 오면 대영주의 검으로 한 명씩 관찰해보는 것도 재미있겠어. 탐나는 사람이 있으면 꼬셔서 레이단으로 데려가면 좋고.’
그리드가 욕심을 품는 사이, 원정 채비를 모두 끝낸 주작단은 하나둘씩 우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끝을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우물로 망설임 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하나 같이 베테랑들이었다.
“출발하죠.”
“네.”
그리드는 맨 마지막에, 수애와 함께 우물로 몸을 날렸다.
“조심하세요.”
수애는 그리드가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했다.
그리드를 감싸 보호하는 그녀의 행동이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책임감이 엄청 강하네.’
자꾸만 호감이 생긴다.
팔에 닿는 감촉이 크고 부드럽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
[판게아 성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 내벽이 빛을 빨아들입니다. 발광 도구와 마법의 사용이 무의미합니다.]
[시야가 협소해집니다.]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5미터 이내의 거리만 식별 가능합니다.]
‘뱀파이어의 던전보다 더하군.’
빛 한 점 없이 어둡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 불가할 것 같은, 완연한 어둠이다.
더듬더듬.
던전의 대략적인 형태와 크기를 가늠해야할 필요성을 느낀 그리드.
양팔을 쭉 펼치고 벽을 더듬어가는 그의 손끝에 누군가의 피부가 닿았다.
그 순간.
“하으윽!”
그리드의 손길을 느낀 주작단원 한 명이 맥 빠지는 신음을 토했다.
턱수염을 쇄골까지 기른 불혹의 사내가 홍조를 띄우더니 야릇한 소리를 토하는 모습.
보기에 썩 좋지 못했다.
부르르, 몸을 떨더니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는 그를 보고 주작단원들이 성을 냈다.
“이보게, 류하! 자네의 정력이 왕성하단 사실을 내 익히 알고는 있지만 때와 장소는 가려야할 게 아닌가!”
“전장에서 이 무슨 망측한…”
“심지어 수애 단장께서 함께 계시고 있는 이때…”
심각한 오해를 남발하는 주작단원들이었다.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류하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는 그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야! 자네들이 상상하는 망측한 짓은 내 결단코 하지 않았네!!”
“단지 걷기만 했는데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니, 갑자기 누가 내 손목을 어루만지는 바람에 그만…!”
“…”
단지 손목을 어루만져졌다고 느끼다니?
류하의 항변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고 수애를 살포시 미소 짓게 만들었다.
“무척 민감한 몸이네요.”
할짝.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류하에게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수애.
마치 생선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을 혀로 핥는 그녀를 보면서 그리드는 확신했다.
‘저거 변태야.’
그녀가 자칫 내 손맛(?)을 봤다가는 감당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한 아이린도 맹수가 되어가고 있는 판국인데…’
태생적으로 맹수인 수애는 얼마나 더할까?
‘손 조심하자.’
한 달에 한 번 빼고는 고자인 그리드가 꿀꺽, 긴장하면서 손을 뒤로 감추는 그때였다.
번쩍!
높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 어둠 속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포착됐다.
‘실?’
중무장한 병사 다섯이 일렬로 걸을 수 있는 넓이의 통로를 지닌 던전.
사방팔방으로 뻗은 길목 중 하나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실이 문득문득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설마… 저게 은사?’
그리드가 생각하는 순간.
“철갑귀다!”
그리드보다 약 1초 늦게 은사를 발견한 주작단원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췄다.
활을 꺼내들더니 은사로 봉쇄 된 통로를 제외한 다른 쪽 통로들을 겨눴다.
저벅저벅.
활을 겨눈 통로들로부터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온다!”
픽!
피피피피피피피픽!
주작단원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활쏘기 솜씨였다.
푹!
푸푸푸푸푸푹!!
“쿠워어어어…!”
어둠에 잠식당한 통로들로부터 철갑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주작단원들이 쏜 화살이 표적을 놓치지 않고 꿰뚫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대단한데?”
보이지 않는 대상의 위치를 단지 소리만으로 가늠하고 활을 쏴서 정확히 맞추다니?
‘보우 마스터리 레벨이 대체 몇이지?’
감탄하는 그리드에게 수애가 노란색 부적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전투 중에는 귀인의 경호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어요. 부디 이 부적을 지니고 계세요.”
[<수호의 부적>을 획득하였습니다.]
[지니고 있을 때 적의 공격을 받으면 무효화시킵니다. 이 효과는 1회만 발휘됩니다.]
[적의 공격을 무효화시킨 후 2분 동안 방어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효과 종료 후 소멸하는 아이템입니다.]
‘1회 무적 버프 아이템이라고?’
소멸성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굉장한 효력을 지닌 아이템이다. 특히 PvP와 레이드에서 신의 한수로 작용할 여지가 높았다.
만약 플레이어간에 거래가 가능하다면 엄청난 시세가 붙을 것이었다.
‘당연히 주작단원들에게도 귀중한 아이템일 텐데…’
수애의 호의에 그리드는 큰 감사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실망했다.
‘거래불가 아이템이잖아?’
심지어 펫 인벤토리로도 옮겨지질 않는다.
잘 간수했다가 나중에 팔아먹어야겠다는 계획은 실천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번 던전에서 소모되겠군.’
칫, 그리드가 아쉬움에 혀를 차는 그때.
“쿠워어어어어!!”
몸 곳곳에 화살이 박힌 철갑귀 다섯 마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닳아 떨어진 삿갓을 깊이 눌러 쓴 좀비들이었다.
하나 같이 넝마가 된 은색 갑주를 무장하고 있었고, 그 갑주의 파편들은 좀비들의 썩은 혈관 곳곳에 박힌 채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그리드는 우선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냈다.
‘철갑귀의 피는 은을 녹일 정도로 뜨거운 건가.’
철갑귀를 공격할 때, 피를 뒤집어쓰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 같았다.
‘갓 핸드에게 의지해야할 부분이군.’
채챙!
채채채채챙!!
주작단원들은 각자 다섯씩 조를 짜서 철갑귀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앞서 선보인 활솜씨보다 더욱 더 뛰어난 검술을 적극적으로 활용, 합을 맞춰서 철갑귀의 몸 곳곳을 베었다.
하지만 철갑귀는 언데드였다.
고통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작단의 칼에 베이고, 찔리면서도 언월도를 휘둘러서 맹렬한 반격을 가했다.
쩌어어어어엉-!!
철갑귀의 검술은 힘과 속도를 겸비하고 있었다.
매우 빠르고 강력해서, 주작단원들은 피하지 못하고 방어하였고 이때마다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누군가는 그대로 고꾸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보기에 철갑귀는 주작단원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주작단원들 모두가 전투에 능숙했고 능력치가 굉장히 뛰어났다. 의외로 4차 전직자는 없는 것 같았지만 수적 우위를 살려서 철갑귀를 철저히 마크하였으므로 철갑귀가 그들에게 해를 입힌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철갑귀의 진짜 실력은 지금부터였다.
촤르르르르륵!!
“조심해!!”
검술만으로는 주작단을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인지, 철갑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투방식을 바꿨다.
불끈 힘을 줘서 근육을 팽창시킨 후 몸 곳곳 썩은 혈관에 박혀있는 은사를 힘차게 뽑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수족처럼 움직여서 주작단원들을 위협했다.
“크윽!”
주작단원들이 바빠졌다.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부터 뻗어져오는 은사.
그것에 베이지 않기 위해 집중해서 검으로 몸을 보호하는 그들의 붉은 도포가 금세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어째 힘들어 보이는데?’
혈관에 파고든 은갑옷의 파편을 썩은 피로 녹여 실로 만들고,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철갑귀들.
놈들이 은사를 무기로 활용하는 순간부터 전황이 급변했다.
주작단원들은 철갑귀로부터 몸을 지키기 급급할 뿐 도통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확실히… 저건 굉장히 까다롭군.’
철갑귀 한 마리가 뽑아내는 은사는 대략 8~15가닥이었고 길이는 10미터 내외였다.
그걸 전부 동시에, 자유자재로 휘둘러서 적을 위협하는 철갑귀들의 기술은 필시 대단한 것이었다.
‘저건 나도 못 피해. 갓 핸드로 막으면서 싸워야 된다.’
최소 레가스나 페이커급의 실력자라면 또 모를까, 철갑귀의 은사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쩌저정!!
퍼퍼퍼퍼퍼퍼펑!!
은사는 위력도 강했다.
주작단원의 칼과 맞부딪칠 때면 주작단원의 몸을 통째로 붕 띄워버렸고, 지면이나 벽면에 부딪칠 때면 마치 총탄처럼 꿰뚫었다.
‘거기에 때로는 칼날처럼 베어버리면서 채찍처럼 휘기까지…’
주작단원들의 칼, 갑옷과 맞부딪치면서도 손상되지 않는 것을 보아 내구력도 상당한 것 같다.
동대륙 대장장이들이 은사를 괜히 최고의 제작재료로 손꼽는 게 아니었다.
‘파브라늄을 실처럼 가늘게 뽑은 것의 열화판…쯤으로 생각하면 되려나?’
은사를 이용해서 어떤 아이템을 만들 수 있을까?
대장장이로써 그리드의 상상력이 무한히 들끓기 시작하는 그때, 주작단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벌써 나타났다!”
철갑귀가 던전의 통로를 은사로 봉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침입자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
둘째는 철갑귀간의 융합 시간을 버는 것.
그리고 철갑귀의 융합이란 끔찍한 것이었다.
최소 두 마리의 철갑귀가 서로의 신체를 은사로 연결하여 한 마리가 된다.
물론 움직임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는 형태로 연결하기 때문에 융합 철갑귀는 본래의 철갑귀보다 팔다리가 최소 2개씩 더 붙은, 전투 최적화의 괴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
은사로 봉쇄되었던 통로 너머로부터 괴물의 포효소리가 폭발했고,
“모두 후퇴하도록 해요!”
다섯 마리의 철갑귀를 동시에 상대해본 경험은 또 처음인지라 여유가 없었던 수애는 주작단에게 곧바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순순히 놓아줄 철갑귀들이 아니었다.
일제히 은사를 쏘아서 거미줄을 형성, 주작단의 퇴로를 봉쇄해버렸다.
그 퇴로란 주작단의 가장 후위에 있는 그리드가 등지고 선 통로였다.
“이런…!”
퇴로를 잃은 주작단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팔다리가 4개씩 달린 융합 철갑귀와 다섯 마리 철갑귀가 키이이이! 듣기 싫은 기성을 토하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수애는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주작단의 단장으로써, 한속봉의 후계자로써.
판게아 방위에 꼭 필요한 주작단원들과 판게아의 은인 그리드가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둘 순 없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하여, 망설임 없이 홀로 철갑귀들에게 몸을 날렸다.
“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귀인을 모시고 도망치세요!”
“단장…!”
“아가씨!!”
주작단원들이 말릴 틈도 없었다.
주작단원 중에서도 가장 날쌘 수애는 이미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곁에는 그리드가 따라붙고 있었다.
“당신…!”
아니, 이 대장장이가 왜 이러지?
기껏 도망치라고 희생하였더니 어찌 제 발로 죽으러 왔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수애는 황당할 따름이었고,
“파그마의 검무.”
이동하는 과정에서 파도처럼 격렬한 검무를 완성시킨 그리드가 수애의 허리를 감싸 안음과 동시에 <+9실패작>을 휘둘렀다.
“파(派).”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어둠 속에서 더욱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실패작이 토해낸 청백색의 검기가 미쳐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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