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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90화 (385/1,794)

템빨 27권 - 7화

츠카카카카칵!!

작열하는 태양 아래 솟구치는 것은 선혈이오, 메아리치는 것은 비명이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기괴한 가면으로 얼굴 절반을 가린 그리드.

그가 대검으로 호쾌한 반월을 그릴 때마다 십 단위의 병사가 죽어나갔고, 가끔 만월을 그릴 때면 이십 단위의 병사가 죽어나갔다.

상어모양의 푸른 대검이 병사들을 갑옷 째 양단내고 있었다.

“소문대로 힘을 앞세우는 검술이군.”

뭐, 검술 실력이야 이미 정평이 나있었으니 새삼 놀랄 것도 없다.

하지만 저것의 정체는 알기 어렵다.

“저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백색 구체는 뭐지?”

두가 남작.

척슬리 이후 출현 빈도가 잦아지고 있는 에트날의 <검호> 중 하나다.

강력한 무력 덕분에 루실리브 공작의 총애를 받는 그, 이번 전쟁이 끝난 후에는 백작위를 받기로 약속되어 있다.

물론 충분한 활약이 동반되어야 이뤄질 약속이다. 만약 그리드의 목을 직접 벤다면 백작위가 아니라 후작위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드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두가 남작에게 부관이 말했다.

“마법사들의 분석에 따르면 매직 미사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플라이처럼 아티팩트를 통해서 사용한 마법 같다는 군요.”

“호오… 즉발되지 않는 매직 미사일이라?”

그리드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백색 구체의 숫자는 정확히 113개.

존재 이유는 뻔하다.

전투를 보좌하는 용도.

그리드는 검술을 구사하는 도중에 위기가 찾아올 경우 매직 미사일을 방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계획일 터였다.

‘거기에다가 갓 핸드라는 이름의 황금 손 4개.’

각자 망치를 거머쥔 채 그리드의 후방을 지키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갓 핸드의 망치질조차도 병사들을 일격에 죽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강해.’

준수한 검술실력과 압도적인 아티팩트의 조화가 완벽한 공방일체를 이룬다.

그리드는 과연 전설적인 존재답게 엄청난 실력자였다.

‘저자가 평범한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다면 또 모를까, 저 상태라면 나 혼자서는 덤빌 엄두가 안 나는군.’

하지만 두가 남작은 그리드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이쪽의 병력은 자그마치 10만.

그리드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병사들을 베고, 때리는 과정에서 체력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또한 쉬지 않고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다 막고, 피한다는 것은 그리드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당장만 해도 궁병들과 마법사들의 공격을 간간히 허용하면서 상처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 후면 제풀에 지쳐서 꺾일 터.’

그때 기사들을 이끌어 급습을 가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음?”

생각하며 음흉한 미소를 피어 올리던 두가 남작이 의아해했다.

뚜벅뚜벅.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중앙광장의 시계탑.

두가 남작은 전장을 한 눈에 내려 보고자 부관과 함께 이곳에 오르기 전, 부하들에게 아무나 올려 보내지 말라 명해놓은 바 있다.

한데 누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베라 후작이신가?’

부하들이 출입을 허가했다는 뜻은, 상대방의 신분이 나와 동급이거나 나 이상이라는 뜻.

두가 남작은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의 주인이 당연히 자신과 같은 귀족이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계탑 6층 꼭대기.

두가 남작과 그의 부관이 자리를 잡고 있는 그곳에 찾아온 인물은 다름 아닌 병사였다.

그것도 후줄근한 가죽갑옷을 무장한 병사.

신분이 미천한 비정규군 소속 이등병이다.

‘일개 병사가 어떻게 여기에 올라온 거지?’

의문을 느끼는 두가 남작을 대신해서 부관이 나섰다.

“전쟁 중에 멋대로 자리를 이탈하다니, 괘씸한 놈이로군. 어느 부대 소속이냐? 아니, 애초에 이곳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비정규군 소속 말단 병사, 아스.

후줄근한 갑옷차림의 그가 단창을 곧추세우며 답했다.

“나는 그리드님을 섬기는 병사이며,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두가 남작의 목을 따기 위함이다.”

“…?”

왈왈!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환청일까?

병사의 황당무계한 자기소개와 목적이 두가 남작과 부관의 넋을 나가게 만들었다.

“허허.”

이내 정신을 차린 두가 남작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다.

그의 진짜 심정을 그의 부관이 대행해주었다.

“네놈이 미쳤구나!”

얼굴에 노기를 띠운 부관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드의 첩자 놈! 내가 네놈의 목을 따주마!”

두가 남작의 부관 또한 검의 달인이었다. 일개 병사 따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다.

서걱!

흐트러짐 없는 검로가 아스의 목을 노리고 예리하게 뻗어져나간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아스의 목 지척까지 검이 꽂혔다.

부관은 생각한다.

스스로를 그리드의 부하라고 밝힌 눈앞의 병사 놈, 자신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거라고.

한데 이상하다.

‘어…?’

내 검에 베였어야할 병사 놈의 목이 어째 멀쩡하다? 그리고 내 시선은 왜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까?

툭.

부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서 나뒹군다.

그렇다.

부관은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머리와 목이 분리되어 죽은 것이다.

“…정체가 뭐지?”

신속의 창격으로 부관의 목을 따버린 그리드의 첩자.

피 묻은 창날을 털어내는 그의 모습을 흩어지는 잿빛 너머로 훔쳐보면서, 두가 남작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장검을 뽑아 쥐는 그에게 병사 아스가 대답했다.

“그리드님의 일개 병사다.”

“헛소리!”

검호마저 긴장시키는 창술의 달인이 일개 병사일 리가 없잖은가!

부리부리한 눈을 살기로 적신 두가 남작이 쩌정! 아스에게 검을 날렸다.

왼쪽과 오른쪽을 시간 차 없이 동시에 베는 놀라운 쾌검술이었다.

채챙!

단창을 비스듬하게 세우는 동작 단 한 번으로 두가 남작의 검격을 막아낸 아스가 비웃었다.

“검호라고 받들어지는 것에 비하면 형편없는 솜씨로군.”

갓 검호가 되었을 뿐인 두가 남작.

제국 검호 시절의 피아로와 비교해도 피라미다.

그리드를 섬기게 된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아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아스와의 실력차이를 깨달은 두가 남작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당신…! 키리누스인가!!”

대륙 제일 창이 그리드를 섬기고 있다고?

“레이단식 창술 3식 종장, 사해 가르기.”

퍼어어어어어어엉-!!

경악하는 두가 남작의 검을 위로 튕겨내었던 단창이 직선으로 뚝, 떨어지면서 황금빛의 오러가 일렬로 방출된다.

적기사단의 아홉 번째 기사 노틸러스마저 일격에 해치웠던 기술을 두가 남작이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크아아아아아악!!”

금빛 섬광에 휩쓸린 두가 남작이 끔찍한 단말마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성큼,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린 아스가 시계탑을 내려갔다. 그의 다음 표적은 카리온 백작. 두가 남작보다 한 발 앞서 검호가 된 인물이었다.

아스는 그리드에게 작은 위해라도 가할 수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배제할 심산인 것이다.

***

‘생각보다 쉽네. 아직 초반이라 그런가?’

게임에서의 죽음은 현실에서의 죽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완전한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은 게임 상의 죽음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힘들게 얻은 레벨과 아이템을 잃게 되었으니 두렵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그래, 그리드도 두려웠다.

10만 대군을 상대로 뛰어들면서, 내가 지금 미친 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싸우다보니 어느덧 두려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본인의 압도적인 힘을 절감하며 두려움이 아닌 쾌감을 느꼈다.

[크리티컬!]

[실패작의 옵션 효과로 5연격이 발동합니다!]

[대상에게 155,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49,54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일반 병사들의 레벨과 스탯, 그리고 아이템은 그리드와 비교해서 형편없는 것이다.

그리드가 휘두르는 평타가 마치 스킬데미지처럼 적용되었고 공격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 한 방에 죽어나갔다.

“매직 미사일.”

스태미나의 안배를 위해서 스킬 사용은 자제 중인 그리드.

그는 최하급 마법이기 때문에 스태미나 소모도 없는 매직 미사일 마법만큼은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나를 최대치로 유지해봤자 마나를 쓸데없이 놀리는 셈밖에 안 되었으니, 번헨 열도에서 습득했던 <매직 마스터리>의 레벨도 올릴 겸 신경 쓰는 것이다.

“이 괴물 같은 놈!”

“죽어라!!”

푹! 푸푹!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아니다.

랭커급의 컨트롤 실력을 갖췄다고는 하나 신컨까진 아니라는 뜻이다.

한 번에 다수를 사용하다보니 병사들의 공격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고 종종 허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2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5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잘 하고 있어. 더 때려줘.”

한 번에 많은 대상에게 피해를 입히고, 동시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음으로서 그리드가 얻는 이득은 상당했다.

[<웨폰 마스터리>의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티라멧의 허리띠(유니크)>의 경험치가 0.01퍼센트 올랐습니다.]

스킬 숙련도와 아이템 경험치가 엄청난 속도로 오르고 있었다.

그리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거 잘하면 오늘 안에 웨폰 마스터리의 레벨이 하나 더 오르고 티라멧의 허리띠는 경험치가 30퍼센트까지 누적될 수도 있겠는데?’

어떤 무기를 착용하든지 공격력과 공격 속도를 상승시켜주는 패시브 스킬 웨폰 마스터리.

마법의 위력을 상승시켜주는 패시브 스킬 매직 마스터리.

받는 피해를 경감시키고 등급이 레전드리로 상승할 경우 뱀파이어 자작 티라멧을 소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티라멧의 허리띠.

이것들의 성장은 그리드를 기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상승하는 악마력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전쟁터를 숙련도 작업장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감이 없었다.

왜?

‘맞수가 없어.’

10만 대군.

진짜 말 그대로 숫자만 많을 뿐이다.

그리드를 위협할만한 적수가 없었다.

‘기사단 같은 것도 없나?’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적들은 네가 지치길 기다리고 있는 거다. 진짜 전력은 후반에야 투입시키겠지.’

“알고 있다고.”

방심하지 말자.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앞에서 방패를 내세우고 돌진해오는 병사들을 보고 멈칫했다.

‘이제 전술적으로 나온다 이건가?’

선두의 방패병으로 그리드의 공격을 막아내고 후위의 창병으로 그리드를 공격한다.

루실리브 공작은 이처럼 지극히 기본적이나 효율적인 용병술을 구사하여 그리드를 전방위 압박했다.

병력 소모를 줄이고 그리드의 체력 소모는 가속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통하겠는가?

“그딴 싸구려 방패로 내 검을 어떻게 막을 건데?”

서걱!

그리드는 방패병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일반인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무척 튼튼해 보이는 대형 방패를 무장한 병사들을 실패작으로 망설임 없이 베었다.

그러자.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칵!!

“크아아아악!!”

방패병들이 방패와 갑옷 째 통째로 베여서 잿빛으로 산화하였고,

“헉.”

방패병들만 믿고 그리드에게 창을 꽂아 넣던 창병들이 당황했다.

고스란히 맨몸을 드러낸 그들에게, 방패병들을 베는 방향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한 그리드가 회전력 실린 검격을 선사했다.

서걱!

“……!”

방패병과 창병의 조합마저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공격력!

이를 목격한 에트날군의 사기가 빠르게 저하됐다.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깁니다. 병사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20퍼센트 하락하고 체력 회복 속도가 저하됩니다.]

“헐.”

에트날 소속 플레이어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보고 질색했다.

그들은 그리드를 공격할 타이밍을 좀처럼 못 잡고 있었다.

<반란군 수괴 퇴치>퀘스트의 보상이 엄청나게 탐나기는 했으나, 이 보상을 과연 얻을 수 있을까?

보상은 고사하고 그리드한테 맞아죽기만 할 것 같다.

그리드의 기세가 승천하는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중앙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2층짜리 가옥의 옥상들로부터 그리드를 향한 마법 폭격이 일제히 개시됐다.

방패병으로 그리드의 시선을 끈 루실리브 공작이 그 틈에 대규모 마법사단을 투입한 것이다.

[2,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9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66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490의…]

..

“윽.”

그리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고통에 물들었다.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가 아니라 삼겹갑 등을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 피해가 상당히 부담됐다.

심지어 전방위로부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폭격이다. 피하거나 막는 건 사실상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이템을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로 교체한다?

의미 없다. 마법보다 더 많이 쏟아지고 있는 화살들에 입는 데미지가 늘어날 뿐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실시간으로 갱신됐다.

-미친;; 무슨 마법이 수백 개가 계속 쏟아지냐;; 물량빨 진짜 대박이다.

-템빨도 물량빨한텐 안 되네ㅡㅡ; 저건 정말로 위험한 듯.

-전세 바뀜… 그리드 이제 끝남.

-5천 명은 개뿔ㅋㅋ 2천명도 못 죽이고 뒤지냐ㅋㅋ 크라우젤이었으면 만 명도 죽였을 텐데ㅋㅋ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쏟아지는 마법의 폭발 속에서,

“아이템 변신.”

그리드를 보호하고자 가까이 접근해있던 갓 핸드들 중 두 개가 모습을 바꾼다.

그 모습, 활이다.

주작궁.

한 자루의 주작궁은 2개의 갓 핸드가, 또 다른 한 자루의 주작궁은 그리드가 쥐어서 시위를 당긴다.

“날아오르라!”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바이란 상공.

태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주작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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