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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00화 (395/1,794)

템빨 27권 - 16화

요새도시 파트리안.

“더 이상 적의 침공은 없는 거지?”

바이란에서부터 퇴각한 유라, 폰 일행과 함께 에트날군을 격퇴한 지슈카가 드디어 한 숨 돌렸다.

전쟁 개시 후 거의 열흘 만에 적의 침공이 멈춘 것이다.

“삭신이 쑤시네.”

주작궁을 쥔 지슈카의 스태미나는 무한에 가까웠지만 인간인 이상 정신적인 피로는 무시할 수 없는 법.

성벽 위에 그대로 누워버린 그녀가 휴식을 갈망하는 그때, 길드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라인하르트에…”

“대악마가 나타났다고?”

눈을 부릅 뜬 지슈카가 벌떡 일어났다.

이미 유라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은 라인하르트로 출격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자.”

***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모두 퇴각하시게.”

“……!”

절대지존.

‘지존에 가까운’ 태양급 강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그게 바로 피아로다.

그의 강함을 표현한답시고 굳이 많은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 그는 그냥 무적이다.

누구라도 피아로의 호미 앞에서는 평등했다. 피아로가 호미를 폭, 하고 찌르면 상대방은 억, 하고 죽었다.

한데 그 무적의 사나이가 ‘시간을 벌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강자와의 싸움이 기대 된다.

저자와 함께 밭일을 하면 좋겠군.

내가 해치우도록 하지 등등.

평소에 자주 하던 말들은 입 밖에 일절 꺼내지 않는다.

템빨단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적과의 싸움을 염원해 오신 피아로님이…’

‘즐기지 못하신다고?’

‘설마, 피아로님조차도 대악마의 적수가 되지는 못한단 건가?’

‘대악마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Satisfy 설정상 대악마는 강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바로 대악마다.

실제로 목격한 벨리알은 포스부터가 남달랐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불꽃과 마기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전설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전설을 개척한 초네임드급 NPC다.

전대 전설들이 대악마들과 대적하였듯이, 피아로 또한 대악마와 대적할 수 있어야 옳은 게 아닌가?

모두가 의문을 품는 그때, 이벨린이 실없이 웃었다.

“에이, 사부. 우리한테 퇴각하라고요?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대악마를 혼자서만 독식하려는 속셈인 거죠?”

상위 템빨단원 거의 대부분이 피아로를 사사했다. 피아로와의 대련을 통해서 컨트롤 솜씨를 극대화시켰다. 특히 검술을 사용하는 단원들은 피아로에게 많은 조언을 들었고 스킬 숙련도가 오르는 기적을 맛보기도 했다.

그중 한 명이 이벨린이다.

이벨린에게 있어서 피아로는 영원한 우상이자 스승이었다. 그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피아로가 약한 마음을 품었음을 이벨린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부한테는 대악마도 별거 아니야! 그럴 거야!’

현실을 철저히 부정한다.

피아로의 궁극기를 맞고 팔 하나가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력 게이지는 그대로인 대악마 벨리알.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이벨린이 몸을 날렸다.

파앗-!

자신 또한 강자.

대악마 퇴치에 힘을 보탤 수 있음을 피아로에게 증명하고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벨리알과의 거리를 좁힌 이벨린이 검을 내지르는 순간.

[벨리알의 불꽃이 너무 뜨겁습니다. 초당 2,500의 화상 데미지를 입습니다.]

[벨리알의 어둠이 당신의 마음을 잠식합니다.]

[정신착란을 일으킵니다. 벨리알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살인욕구가 발동합니다. 가까운 인간을 찾아서 공격합니다.]

알림창이 떠오르더니,

두근!

이벨린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정신이 아찔해진 그가 벨리알에게 찌르던 검을 회수, 그대로 뒤로 몸을 돌려서 가장 가까운 아군을 공격했다. 대상은 페이커였다.

챙강!

“이, 이런…!”

공격조차 할 수 없다고?

이벨린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진다.

그의 공격을 단검으로 막아낸 페이커가 중얼거렸다.

“혼란은 1회 단발성으로만 적용되는 건가.”

그나마 다행이다.

아군을 공격하게 만드는 벨리알의 혼란이 만약 일정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이었다면, 더욱 더 절망적이었을 테니까.

힐끗, 페이커가 후방의 라우엘에게 눈짓했다.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질문이 담긴 제스처였다.

그러자 잠자코 생각에 잠겨있던 라우엘이 입을 열었다.

“피아로님, 맥스옹 전하와 함께 병사들을 통솔하여 퇴각하십시오.”

대악마가 등장하는 순간, 라우엘은 왜? 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대악마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보기에는 사태가 너무 급박했던 까닭이다.

라우엘은 이 최악의 전개를 타개할 방법만을 모색했다.

그리고 피아로의 절기 <절구질>을 기습적으로 맞고도 멀쩡한 대악마를 보고 확신했다.

대악마 퇴치는 불가능하다.

라인하르트 점령도 당연히 물 건너갔다.

‘피아로님은 아직도 성장 중이시다.’

쉽게 말해서 레벨이 낮다.

피아로가 전설이 된 것은 불과 4~5년.

그가 전대 전설들처럼 대악마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라우엘의 생각이었다.

‘피아로님과 병사들을 잃어선 안 된다.’

미래를 기약해야한다.

라인하르트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상,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

피해를 최소화해서 퇴각하는 것이 급선무다.

템빨단의 기둥인 피아로와 맹우 맥스옹, 그리고 어렵게 키운 병사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야했다.

시간을 버는 것은 당연히 우리들 플레이어의 몫.

“라우엘 백작! 내가 시간을 벌겠다하지 않았는가!”

“…”

퇴각 명령을 수긍하지 못한 피아로가 소리쳐봤지만 라우엘은 가뿐히 무시했다. 그리고 데미안에게 부탁했다.

“데미안님, 템빨단원 전원에게 버프를 부탁드립니다.”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기에 앞서 확인이 필요하다.

교황 데미안의 신성한 버프는 대악마를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또한, 벨리알을 공격할 시 그녀의 정신착란을 저항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되는지 말이다.

“피아로님을 제외한 템빨단 전원 벨리알을 공격하세요.”

명령은 즉각 수행됐다.

페이커와 이벨린을 필두로 세운 약 200여 명의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벨리알을 덮쳤다.

은기사 출신의 템빨단원들이었다.

대부분 200중반레벨대인 그들의 공격이 벨리알을 덮치던 도중 동선을 바꿔서 아군을 공격했다.

페이커와 이벨린의 공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벨리알의 혼란에 빠져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이다.

라우엘을 비롯한 모두가 얼굴을 찌푸렸다.

‘저항 불가?’

벨리알은 근접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접근해서 공격하는 ‘모든 대상’에게 ‘무조건’ 혼란을 걸고 그들이 아군을 공격하게끔 유도했다.

‘그렇다면 마법과 원거리 공격은?’

캐스팅 속도 20퍼센트 저하의 페널티 때문에 뒤늦게 마법 주문을 완성한 라우엘이 마법사들과 함께 일제히 벨리알을 폭격했다.

마법사 중에는 당연히 대마법사 아슈르 백작도 있었다.

하지만…

[벨리알이 매직 미러 실드를 전개합니다.]

[당신의 마법 데미지가 30퍼센트만 적용됩니다.]

[나머지 70퍼센트의 데미지가 당신에게 되돌아옵니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크아아아악!!”

최악.

희망 따위 없다.

근접공격은 혼란을 유발하고, 마법공격은 대부분 무효화시키며 반사시키는 괴물. 그게 바로 벨리알이다. 그나마 화살 등의 원거리 물리 공격에는 취약한 듯 보였지만, 원체 방어력이 높아서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은 벨리알 레이드의 ‘최소 조건’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그건 바로 전설.

상태이상을 저항하는 그들만이 벨리알을 레이드하는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라우엘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단 하나였다.

“피아로님과 병사들이 퇴각할 때까지, 우리는 인간 방벽이 됩니다. 벨리알을 먼저 공격하지 말고 철저히 방어태세만 취하도록 하세요. 데미안님, 크리스님. 피아로님과 병사들의 퇴각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미안과 크리스는 템빨단이 아니다.

그들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라. 아이템 제작의뢰를 맡기기 위해서라도 템빨단의 병사들은 내가 철저히 지켜주겠다.”

반면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남아서 같이 싸울 겁니다. 피아로님의 호위는 이사벨 쨩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여기서 예기치 못한 전개가 발생한다.

“제가 남아서 싸울 건데요.”

레베카의 딸, 이사벨.

레베카교의 삼신기 중 하나인 <리파엘의 창>을 꺼내 무장한 그녀가 성큼, 벨리알에게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이, 이사벨 쨩! 멈춰!”

안색이 파랗게 질린 데미안이 소리쳤다. 혹시라도 이사벨이 다칠까봐 염려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사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레베카교의 존재 이유란 야탄교를 멸하고 마족의 지상 강림을 억제하는 것.

그중에서도 레베카의 딸은 마족 처단의 선봉에 서는 존재다.

이사벨은 대악마 강림을 간과할 수 없었다.

“백화.”

쿠화하하하하하하항!!

봉인 된 힘을 개방하는 이사벨의 찬란한 금발이 눈서리를 맞은 듯 하얗게 물든다.

성스러운 금빛기운에 휩싸인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는 데미안에게 미소 지었다.

“그리드님께 은혜를 갚아야죠. 교황성하, 이곳은 제게 맡기고 템빨단 여러분과 함께 피하세요.”

“이, 이사벨 쨩! 안 돼! 안 돼에!!”

말릴 틈조차 없었다.

수명을 대가로 백화를 사용한 이사벨의 능력치는 초월적이다.

드레비고 에피소드와 파스칼 에피소드 이후로 시간도 훌쩍 지난 상태.

과거와 비교해서 훨씬 더 강력해진 현재의 이사벨은 교황 데미안조차도 손쉽게 제압하는 수준이었다.

데미안의 손을 우습게 뿌리친 그녀가 벨리알에게 몸을 날렸고,

“가소롭구나!”

상처를 입은 후부터 내내 분노하고 있던 벨리알의 시선이 이사벨에게 꽂혔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벨리알이 내뿜는 불꽃과 이사벨의 몸을 감싼 성스러운 금빛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강력한 기파가 일대에 충격을 선사한다.

지면이 뒤흔들리면서 우뚝 솟아있던 궁전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템빨단 병사들이 엉덩방아를 찧었으며, 정원의 꽃들이 한 줌 재로 산화했다.

“이사벨 쨔아아아아앙!!”

오로지 이사벨을 구원하고자 교황이 됐던 데미안이다.

한데 이제와서 이사벨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데미안의 슬픈 절규가 메아리 치면서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의 가슴을 비수(悲愁)로 적셨다.

“이익!”

피아로가 분노했다.

라우엘은 주군의 대리인 바.

그의 명령을 차마 어길 수 없어서 벨리알에게 덤비지 못했지만,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가 없다.

젊은 여성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목숨을 부지할 생각 따위 그는 추호도 없었다.

당장에 이사벨을 돕고자 뛰쳐나가려던 그가 멈췄다.

라우엘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온 까닭이다.

“멈추세요.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당신은 더 이상 주군의 신하가 아닙니다. 주군께 입었던 무수한 은혜를 잊은 건 아닐 테죠?”

“…”

“다시 한 번 명령하죠. 템빨단은 퇴각합니다.”

데미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결국에는 레베카 교단의 전력인 이사벨보다야 이쪽의 전력이 훨씬 더 소중했다.

‘데미안, 이 빚은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군대를 통솔하는 라우엘.

오열하는 데미안을 애써 외면한 그에게 귓속말이 날아왔다.

-지금 가는 중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다, 당신…!

라우엘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에게 귓속말을 보낸 인물?

-피아로님과 데미안님, 거기에 저까지 힘을 합치면 대악마를 봉인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크라우젤!!

천외천.

히든 클래스를 얻기 전부터 그리드 이상의 실력을 발휘했던 플레이어 최강자.

이제는 <검성>이라는 최강의 레전드리 클래스까지 획득한 그가 라인하르트로 달려오고 있었다.

라우엘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같은 시각, 대한민국 서울.

“…”

잠에서 깬 신영우가 TV를 노려보고 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초조함을 간신히 떨쳐내면서, 대악마 벨리알을 철저하게 관찰했다.

마침 세희가 달려왔다.

“오빠! 지금 난리가…!”

“진정하고 앉아.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세희의 손목을 붙잡아 곁에 앉히는 영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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