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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21화 (416/1,794)

템빨 28권 - 12화

쏴아아아아아-

잿빛으로 산화하는 흑요의 분신을 사이에 둔 카심과 백요의 시선이 허공에 얽힌다.

백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림자의 왕 카심.

대륙 최강의 어쌔신 중 하나인 그가 왜 그리드를 섬기는 걸까? 뭐가 아쉬워서?

‘약점이라도 잡혔냐?’

백요는 내막이 궁금했지만 의문을 해소할 기회가 없었다.

뭐라고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카심의 살수가 날아든 까닭이었다.

까가강!!

“윽…!”

수백 명의 적에게 포위당했다고 인식함이 옳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림자를 활용해서 공수의 도구로 삼는 카심의 능력은 막말로 사기였다.

“……!”

사각에서부터 쏘아져 올라온 그림자 단도를 막아내고 자리를 벗어난 백요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림자를 타고 이동한 카심이 순식간에 등 뒤로 나타나서 칼을 찔러오고 있었다.

‘너무하네!’

쩌엉-!!

힘껏 휘두른 주먹으로 칼을 튕겨낸 백요가 동시에 발차기를 날렸다.

호쾌한 반격이었지만 카심에겐 닿지 못했다. 카심이 또 한 번 그림자를 타고 이동해서 공격을 회피해버렸다.

하지만 백요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거리를 벌려놓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잠시간의 안전을 확보한 백요가 기름기 좔좔 흐르는 고기를 꺼내 씹었다. 지방을 축적하기 위한 행위였다.

‘레이단은 뭐지?’

템빨단 주력이 전원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괴물천지다. 템빨단의 전력이라는 것, 어쩌면 상상이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칫, 흑요가 아이린 암살에 성공할 때까지 카심의 발을 묶어놔야 하는데.’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상대는 대륙 곳곳에 많은 비화를 만들어온 초네임드급 NPC.

승산을 점쳐보는 백요의 태도가 조심스럽다.

‘그림자술을 다루는 어쌔신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무렵에 내 레벨은 230대였지.’

카심이 3차 전직을 이뤘을 당시 백요는 2차 전직자에 불과했다는 뜻.

그리고 현재 백요의 레벨은 370이다.

레벨업 필요 경험치와 네임드 NPC의 성장속도 등을 고려해서 추정해봤을 때, 카심의 현재 레벨은 400초중반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레벨 차이가 100까지는 나지 않는단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60내외 정도의 레벨 차이는 칭호와 룬의 효과로 극복할 수 있어. 만약 카심이 4차 전직을 달성한 상태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벌써부터 4차 전직에 성공했을 거라고는 보기 어렵고.’

확실한 문제는 카심의 그림자술법이다.

그림자 어쌔신은 일반적인 어쌔신과 다르게 뛰어난 방어력과 유틸성을 지닌 바.

딱히 약점이 없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존재다.

단순히 무투술만을 주력으로 삼는 백요의 입장에서 카심을 상대하기에는 까다로운 면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이 있다.

‘그림자 어쌔신은 공격력이 약하지.’

일반적인 어쌔신은 종이몸인 대신 일격필살의 공격력을 발휘하는 반면, 그림자 어쌔신은 안정적인 대신 공격력이 무척 낮은 편이다.

흑요는 직업 특성상 레벨이 낮았고 분신도 마법사 계열로 소환했기 때문에 카심에게 쉽사리 당했다지만 백요는 입장이 달랐다.

‘흑요가 아이린을 암살할 때까지 버티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판단한 백요가 근육량을 줄이고 지방량을 늘렸다. 공격력과 민첩성을 낮추는 대가로 방어력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퍼펑!

퍼퍼퍼퍼퍼펑!!

쉬지 않고 쏟아지는 카심의 맹공 속에서도 백요는 쓰러지지 않았다. 비대한 살을 앞세워서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그림자 단도가 백요의 살집에 집어삼켜지는 모습을 확인한 카심이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물렁거리는군. 공격의 위력이 반감된다.’

세상에 만능은 없다.

백요는 몰랐지만 카심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기술을 사용할 때 소모하는 마나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즉, 카심은 한 방 파괴력이 부족할뿐더러 전투 지속력도 약하다는 뜻이다.

백요와 싸움을 오래 끌어봤자 좋을 게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카심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두르지 못했다.

백요의 물렁한 살 속 깊이 숨어있는 단단한 근육들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여자다. 내가 빈틈을 드러내는 순간 역공을 시도할 테지.’

상성이 나쁘니 신중해야한다.

애초에 조급해야할 이유도 없다.

이곳은 내 군주의 영토.

눈앞의 침입자 백요를 제외하면 모두가 아군이다.

마음을 다스린 카심이 공세를 늦추며 마나를 안배했다. 그리고 마치 거미처럼 서서히 백요를 압박해나갔다.

자신의 선택이 백요를 기쁘게 만드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카심, 네가 나를 경계해주는 덕분에 시간을 벌기 수월해졌구나.’

백요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버티는 동안 흑요로부터 기쁜 소식이 도착하리라, 그녀는 이상적인 결과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로드는 카심의 움직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스승님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배워서 더욱 더 강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는 진리를 깨우쳤으니까.

말똥말똥.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심과 백요의 전투를 지켜보는 로드.

그 앳된 아이의 옆모습을 레이단의 기간제 농부들이 주시한다.

‘저게 바로 그리드의 아들…’

‘완전 초네임드급 NPC 아니냐? 재능이 엄청나잖아?’

‘그치… 벌써부터 괴물인 걸 보면 나중에 커서 얼마나 대단해질지 상상도 안 된다.’

‘…우리 쟤한테 붙을까?’

‘어? 템빨단에는 인재가 너무 많아서 우리가 눈에 못 띄니까 안 들어갈 거라며?’

‘템빨단에 가입하자는 게 아니라 로드 개인을 섬기자고. 미래를 보자 이거야. 나중에 뻔히 큰 인물이 될 로드를 지금부터 우리가 미리 섬긴다면 나중에 우리도 유명해지지 않겠어?’

‘오, 그거 굿 아이디언데?’

대륙 최고 천재의 재능이라는 것은 유저의 마음마저도 사로잡는 것이었다.

훗날 템빨단 최대의 버팀목이 될 로드.

세상에 등장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다. 템빨 특무대의 탄생 비화다.

***

[망상현현의 효과로 소환되었던 분신이 피해를 입고 소멸하였습니다.]

[20퍼센트의 경험치를 추가로 손실하였습니다.]

“치잇.”

망상을 실체화시킬 수 있는 히든 클래스 <망상가> 의 성능은 OP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굉장한 것이다.

물론 그만큼 페널티는 감수해야했다.

망상가는 망상을 현현시킬 때마다 경험치를 소량 손실했고, 현현시킨 망상이 적의 손에 부셔질 때마다 대량의 경험치를 손실했다. 또한 망상가 본인의 능력치는 현격히 떨어졌다.

레벨링에 명백한 한계가 있는 클래스란 뜻이다.

‘이러다가 400레벨은 꿈에도 못 꾸는 거 아니야?’

급격히 떨어진 경험치 게이지를 확인하고 치를 떠는 흑요.

그녀는 현재 레이단 내성 잠입해 성공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출정한 레이단은 빈집이나 다름이 없었고 경비도 허술했다.

망상을 응용해서 은신술을 구사한 흑요를 소수의 경비병들이 발견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린의 침실은 어디지?’

살금살금.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성 곳곳을 뒤지는 흑요의 마음이 초조하다.

백요 언니 혼자서 카심이라는 괴물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어?’

한시라도 빨리 아이린을 찾아내고자 노력하던 흑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테라스 바깥으로 보이는 내성 안쪽의 정원에서 은발의 여성을 발견한 까닭이다.

“…엄청 예쁘네.”

은발 여성은 같은 여자가 봐도 넋을 잃게 만드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정원에 가득한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린.

그리드의 부인이 된 지금까지도 수많은 플레이어의 첫사랑이 되고 있는 청순미녀다.

‘밝게도 웃는구나.’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왔겠지.

누구에게나 늘 사랑을 받고 행복을 만끽했을 터.

‘마음에 한 점의 그늘도 없어 보이네.’

쏴아아아아-

테라스에 선 채 아이린을 내려 보는 흑요의 머리카락을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순간 드러나는 흑요의 비쩍 마른 얼굴은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

‘고작해야 NPC 주제에 인간인 나보다 행복한 건 말이 안 되잖아?’

꽈드득!

흑요는 언니 백요와 함께 고아원에 버려졌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조롱과 동정의 대상이 되어봤을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린을 증오한다.

빛나는 존재를 생리적으로 용납할 수가 없다.

행복 충만한 이들을 보면 박탈감이 느껴졌고, 그들이 자신이 느껴야할 행복마저도 뺏어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일 거야.”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아이린을 노려보는 흑요의 퀭한 눈빛이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린다.

실성한 사람처럼 큭큭, 크흐흐, 웃은 그녀가 실크처럼 반짝이는 은발을 기른 자신의 모습을 망상했다.

망상 현현의 전조였다.

순간.

“그녀에게 불행을 전염시키지 마라.”

흑요의 귓가로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남성의 목소리였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서늘함을 간직한.

“누, 누구야!”

화들짝 놀란 흑요가 어두운 복도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뚜벅. 뚜벅.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부터 다가오는 발소리가 차츰 가까워진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정체를 확인한 흑요가 사색이 되었다.

“페, 페이커? 라인하르트에 있어야할 네가 어떻게 이곳에…?”

페이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무척 높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이라는 광오한 이명을 지녔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물론 흑요와 백요 자매 또한 페이커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군더더기 없는 컨트롤 솜씨와 완벽한 직업 특성 활용 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문득 크라우젤이 떠오를 지경이었으니까.

뭐, 엄밀히 따지면 크라우젤의 열화판이다.

크라우젤의 모든 능력치를 S등급이라고 평가할 경우 페이커의 모든 능력치는 A+랄까.

그 차이, 페이커 본인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자신이 최상급 하이랭커는 될 수 있을지언정 독보적인 지존은 될 수 없다고 자평했다. 이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의 문제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페이커는 이제 그 믿음을 버리고 싶었다.

대악마 벨리알에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더 큰 욕심을 품지 않는 이상 자신은 이도저도 아닌 존재로 도태될 거란 사실을.

“흑요. 태양급 강자던가.”

그리드, 크라우젤과 동급의 강자.

그녀를 바라보는 페이커의 두 눈에 깃드는 것은 투지와 열망이었다.

“너를 꺾고 내 한계를 부수겠다.”

벼랑 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결국에는 하늘을 부쉈던 사내가 바로 내 곁에 있다.

그를 본받아야한다.

포기를 입에 담아선 안 된다.

그렇기에 선언한다.

“나 또한 하늘에 도달하겠다.”

촤르르륵!

페이커의 로브가 펼쳐지며 한 순간 흑요의 시선을 빼앗았다.

페이커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즉시 단도를 투척하고 동시에 흑요와의 거리를 좁혀서 태도를 휘둘렀다.

쩌엉!

‘빨라!’

황급히 소환한 전사형 분신으로 페이커의 공격을 막아낸 흑요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유명한 하이랭커들과 달리 노말 클래스 전직자에 불과한 페이커의 검 끝에 실린 위력이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던 까닭이다.

‘말도 안 돼! 스탯 노가다를 얼마나 무식하게 한 거야?’

사냥터에 있는 시간보다 동료들의 등 뒤를 지키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던 페이커.

그는 본인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림자 속에 대기하면서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몇 천 번이고 몇 만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채챙!

채채채채채채챙!!

빗발치는 은빛 검광이 어둠을 수십 개로 쪼갰고 흑요의 분신이 수세에 몰렸다.

태동한다.

평범한 노말 클래스 전직자가 써내려가는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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