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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22화 (417/1,794)

템빨 28권 - 13화

‘저 날다람쥐 같은 놈!!’

어쌔신의 카운터 클래스는 단연코 딜탱 전사다.

확정 돌진기로 어쌔신의 빠른 발을 묶을 수 있고, 높은 방어력으로 어쌔신의 막강한 화력을 절감시킬 수 있으며, 적절한 공격력으로 어쌔신의 종이몸을 찢어버릴 수도 있는 밸런스형 전사 말이다.

흑요는 확신했었다.

페이커쯤이야, 자신의 전사형 분신으로 쉽사리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컨트롤 솜씨로 직업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페이커의 몸놀림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났다. 공격을 명중시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부웅!

부우웅!!

흑요의 분신이 휘두르는 검이 연신 허공만 벤다.

퍼엉-!

대상과의 거리를 즉각적으로 좁히고 대상을 제압하는 전사 고유의 돌진기 또한 무용지물이었다.

페이커는 분신이 돌진기를 사용하기 전, 아주 찰나 동안 취하는 준비 동작만 보고 돌진기의 발동 타이밍과 도달 지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리 피해버리니까 도통 붙잡을 수가 없다.

‘지가 무슨 크라우젤이야?’

언니와 함께 2대1로 싸워도 제압할 수 없었던 빌어먹을 천외천의 몸놀림을 떠올리게 만들다니…

치를 떤 흑요가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장소가 문제야.’

레이단 성 3층 복도.

지는 해를 등지고 그늘 진 이 어둡고 협소한 공간은 전사에게 감옥과도 같았다. 검을 힘껏 휘두르지 못하여 위력과 속도가 반감 됐고, 어둠에 동화되는 어쌔신의 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쫓지 못하여 명중률이 하락했다.

페이커에게 돌진기의 궤도를 읽히는 이유도 장소의 협소함 때문이었다.

반면 페이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중이다.

복도의 벽과 천장을 연신 발로 박차면서 이동, 모든 속도를 극대화시키고 움직임에 현란함을 배가시켰다.

아주 그냥 자기 세상인양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비교적 둔한 전사의 공격을 지금의 그에게 적중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였다.

‘이대로는 안 돼.’

결단을 내린 흑요가 등지고 서있던 테라스를 향해서 내달렸다.

자신의 분신이 페이커의 발을 묶고 있는 사이, 자신은 정원으로 뛰어내려서 아이린을 제압하고 페이커를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다.

그녀는 간과하고 있었다.

이곳이 적진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인의 곁으로는 갈 수 없다.”

“침입자에게 죽음을.”

팟!

파파파파팟!!

“뭣!”

테라스 난간 위로 올라서던 흑요가 깜짝 놀라 몸의 균형을 잃었다. 아이쿠 하면서 난간에서 떨어져버렸다.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그녀를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열세 명의 어쌔신이 둘러쌌다.

하나 같이 실버 드래곤의 자수가 놓인 로브를 몸에 두른 어쌔신들이었다.

템빨단에 별도의 어쌔신 집단이 있었다고?

접하지 못했던 정보다.

흑요가 이를 갈았다.

“네놈들은 또 뭐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뭘까?

그건 바로 어쌔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어쌔신이란 은밀하고도 과묵한 존재.

결코 표적과 말을 섞지 않는다.

하지만 실버 드래곤의 자수가 놓인 로브를 몸에 두른 어쌔신들은 과묵함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우리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대답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우리는 레이단의 왕위계승서열 1위셨던 렌 왕자님께서 친히 육성하신 <은룡대> 출신의 어쌔신들이다. 우리가 익힌 <다루카의 술법>은 엄청나게 뛰어나지. 우리는 에트날 최고의 어쌔신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의 우리는 더욱 더 강해졌다. 그리드님을 섬기게 된 후로 그림자의 왕 카심님께 직접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지.”

“지금의 우리는.”

“은룡대 시절의 우리를 가볍게 압도하는.”

“템빨그림자단.”

“템빨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열 번도 더 바칠 수 있는 충신들이다.”

“……”

누구를 위한 설명인가?

마치 오래간만에 등장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독자에게 어필하는 듯한 자기소개다.

슈슉!

슈슈슈슈슈슉!!

황당해하는 흑요에게 은룡대원들의 칼이 날아들었다.

과연 어쌔신답게 지독한 살수였다. 일격, 일격이 오로지 급소만을 노리고 빠르게 파고들었다.

“윽!”

백요와 비교해서 레벨이 한참 낮다고는 하나, 흑요의 레벨은 330에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200중반 레벨대에 불과한 템빨그림자단의 공격을 쉽사리 허용할 정도로 육체 능력이 하찮았다.

망상가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협동 공격이 너무 까다로워.’

템빨그림자단에게 연달아 공격을 허용하고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은 흑요가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렸다.

경험치 손실을 대가로 또 하나의 망상 분신을 현현시켰다.

스르르륵.

음침한 표정을 짓는 흑요로부터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펼쳐지더니 이내 사람의 형태를 갖췄다.

흑요의 새로운 분신이었다.

이번에 그녀가 떠올린 망상은 성기사.

뛰어난 탱킹력과 더불어 힐링과 버프 능력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존재다.

“헤에~ 오빠들, 나랑 재미있게 놀아줄 거지?”

실물과 달리 아름답고 쾌활한 이미지의 분신 흑요.

해맑게 웃으며 커다란 사각방패와 두꺼운 한손 검을 교차시킨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정!!

“……!”

갑자기 한 명 더 생긴 흑요를 보고 당황하고 있던 템빨그림자단원들이 이를 악 물었다.

흑요의 분신이 휘두른 사각방패에 실린 무게가 단도만으로 감당하기엔 힘들었던 것이다.

갸우뚱, 단체로 휘청거리는 그들을 어깨로 밀쳐서 쓰러뜨린 분신 흑요가 시선을 복도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페이커를 상대하고 있는 전사형 분신을 지원할 심산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라운드 힐.”

솨아아아아아!

마치 제비처럼 쏘아지며 칼을 찌르는 페이커에게 농락당하고 있던 전사형 분신이 밟고 있는 지면에 동그란 녹색 원이 생성됐다.

지정한 장소에 있는 대상을 회복시켜주는 라운드 힐의 영역이었다.

“옷…!”

녹색 힐링의 빛이 몸을 따스하게 감싸줌을 느낀 전사형 분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푸우욱-!!

은빛의 태도가 분신의 심장을 꿰뚫고 나왔다.

사냥감의 목을 관통한 범의 송곳니를 연상하게 만드는 광경이다.

그 위력은 놀라웠다.

[망상현현의 효과로 소환되었던 분신이 피해를 입고 소멸하였습니다.]

[20퍼센트의 경험치를 추가로 손실하였습니다.]

[레벨이 하락하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습득한 스탯 포인트 10개가 소멸합니다.]

“뭐라고!!”

여기서 피라미 어쌔신들을 상대하는 그 잠깐 동안 첫 번째 분신이 죽어가고 있었다고?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고작 노말 클래스 하이랭커 따위가 이토록 압도적인 공격력을 선보이다니?

자신이 추정한 것보다 배는 더 강력한 페이커의 힘을 흑요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어떤 치사한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벅.

무심한 표정으로 라운드 힐의 범위 안으로 들어간 페이커가 생명력을 회복하며 답했다.

“템빨이다.”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할까?

페이커가 노말 클래스의 한계를 극복하고 강해지기 위해서 선택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템빨이며 그것은 템빨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페이커는 그리드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템빨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게끔 늘 연구해왔고 실제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크루제의 바지>와 어쌔신 직업의 상성이 좋았기 때문에 크루제의 바지를 얻은 뒤부터는 족히 몇 배나 강해진 기분이었다.

비록 대악마 벨리알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지만, 그건 페이커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극복할 수 없는 레벨 차이가 첫째 문제였고, 둘째 문제는 당시의 페이커가 동료들을 지키는데 집중하느라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반면 지금은?

페이커는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입장이었고 심지어 흑요보다 레벨도 높았다.

파앗-!

민첩성과 도약능력을 대폭 상승시켜주는 크루제의 바지.

전대 전설이 제작했고 당대 전설이 인정한 아이템이 페이커의 능력치를 보조한다.

민첩성과 도약능력을 대폭 상승시켜서 이동한 페이커가 순식간에 흑요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흑요는 죽음을 직감했다.

***

[파티원 흑요가 사망하였습니다.]

“뭐, 뭐라고?”

백요가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을 의심했다.

템빨단의 주력이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 레이단에서 그 누가 내 동생 흑요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대체 뭐지?”

논밭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모든 일이 틀어졌다. 과정과 결과 모든 것이 예상과 다르게 꼬였다.

이는 실로 논밭의 저주.

세이렌에서 자신을 호미로 찍어 죽였던 미친 농부를 떠올린 백요가 파르르, 경기를 일으켰다.

기분 탓인지 욱신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은 그녀가 이내 도끼눈을 떴다.

“이대로는 못 돌아가.”

그리드와 템빨단에게는 반드시 갚아 줘야할 빚이 있다.

이곳 레이단까지 기껏 먼 길을 달려 와놓고, 심지어 동생 흑요까지 희생시켜놓고 빈손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너라도…!”

백요가 저 멀리 있는 로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리드의 아들이자 템빨단의 비밀병기.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것으로 추정되는 저 꼬맹이를 자신이 죽여 버린다면?

이 또한 진정한 복수가 될 것이다.

“킥…! 킥킥! 키햐하하하하핫!!”

레벨링에 대해서 늘 극심한 스트레스를 앓고 있는 동생 흑요를 또 한 번 희생시켰단 사실이 백요의 죄의식을 자극하고 있었다.

실성한 사람마냥 웃은 그녀가 기이한 기합을 외치며 몸을 날렸다.

뒤룩뒤룩했던 살집을 빠르게 연소시키고 근육으로 만들며 로드에게 접근했다.

순간 상승하는 가속력이 발생시키는 파공성이 마치 폭음 같다.

“로, 로드 공자님!!”

“피하세요!!”

200명의 미소녀들이 로드를 지키고자 다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체지방률을 최대한 낮춘 백요의 속도가 워낙 빨랐다. 소녀들보다 훨씬 앞서서 로드에게 접근하더니 씨익,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원망할 거라면 네 애비를 원망해라. 네가 죽는 건 모두 다 네 애비 때문이니까!”

번뜩!

로드를 쏘아보는 백요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든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살기였다.

만약 로드가 일반적인 또래 아이였다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게거품을 물고 실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드는 전설이 될 자.

쉽게 상태이상에 걸리지 않았다.

꾸욱, 이를 악 물고 공포를 견뎌낸 로드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백요의 두 눈을 똑바로 올려봤다.

“아니요! 로드는 아빠마마를 원망하지 않아여! 아빠마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욧!!”

내가 태어난 이후, 아버지께서 내 곁에 있어준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그래, 가끔은 외롭고 서운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놀고 싶었다. 정원사 아부라의 아들처럼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걸 보고 배우고 싶었다. 나의 아버지도 내 곁에 늘 함께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외로운 마음을 아버지께 밝힌 적은 없다.

왜?

아버지께서 늘 자리를 비우시는 이유, 가족과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께 부담을 주기 싫었다.

아버지는 위대하다.

나를 늘 곁에서 보살펴주시는 어머니가 위대하듯이, 가족과 떨어진 채 밖에서 홀로 고생하시는 아버지 또한 위대한 것이다.

설령 지금 이 순간 아버지께서 내 곁을 지켜주지 않을지언정 원망할 리가 없다.

아들 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할 것이다.

“이, 이 꼬맹이 새끼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눈동자에 신념을 담다니?

소름끼치도록 기이한 놈이다.

불쾌함마저 느낀 백요가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단 일격으로 로드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는 위력이 깃든 주먹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녀는 로드를 해칠 수 없었다.

“탐(貪).”

백요는 그림자의 왕 카심이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크나큰 착각.

단지 상성이 나빠서 찝찝함을 느낀 것일 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백요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카심의 입장이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허, 허억…!”

그림자를 한 점으로 끌어모아 이를 토대로 주변의 모든 사물을 집어삼켜버리는 기술, 탐(貪).

카심이 그림자 술법과 다루카의 술법, 거기에 란스티어의 술법까지 착안해서 창조한 궁극기가 백요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잠시 후.

잘그락.

백요가 서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반짝이는 목걸이 하나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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