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1화
에트날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템빨단이 벨리알을 레이드하고 건국의 기틀을 잡기까지.
템빨단원 전원이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고 활약해왔다. 그들이 있었기에 템빨단은 국가를 세울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드의 마음 같아서야 템빨단원 모두를 개국공신이라 칭하고 그들에게 마법 무구를 포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도 자본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라우엘의 반대가 심했다.
“개국공신의 사전적 의미를 모르시는 겁니까? 개국공신이란 나라를 세울 때 공훈을 많이 세운 신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너도나도 열심히 했으니까 너도나도 개국공신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특히 더 희생하고 특히 더 활약한 이들만을 선별하여 포상을 내리지 않는 이상 개국공신의 의미가 퇴색 될 겁니다.”
“까칠하기는.”
하지만 라우엘의 말이 맞았다.
보다 활약한 사람과 덜 활약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은 포상을 준다고? 보다 활약한 사람 입장에선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긴,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평등한 보상이 어디에 있겠어.’
간단한 예로 레이드도 차등 보상이고 그게 당연한 거다.
납득한 그리드가 템빨단원들의 공헌도를 세분화해보았다. 개인적인 친분과 호감도는 완전히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고려했다.
‘개국공신 목록에 우선 포함시켜야할 사람은 카츠겠지.’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 한국인을 조센징으로 비하하는 전형적인 우익성향의 일본인이었던 그를 그리드는 생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카츠는 과거 본인의 발언을 모두 철회하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단순히 사죄로 끝냈을 뿐만 아니고 한국에 갖고 있던 편협한 인식을 모두 버렸다. 속죄하겠답시고 재일한국인을 위한 일자리 창출 활동도 벌이는 중이다.
템빨단에 가입한 이후의 활약 또한 눈부셨다. 이번 전쟁만 놓고 봐도 단 1,000의 병력으로 보르네오를 완벽하게 수성했다. 가우스 왕국군 수만을 카츠 홀로 물리친 셈이다.
‘녀석이 있어준 덕분에 우리는 전쟁과 레이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거야.’
가우스 왕국에게 보르네오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에트날 왕국은 필시 가우스 왕국과 협력했을 테고 템빨단은 고립되어 완전히 박살났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카츠는 당연히 개국공신 목록에 넣어야해.’
두 번째는 지슈카다.
그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파트리안을 수성한 그녀는 주작궁을 받은 후부터 완전히 날아다녔다. 에트날군을 모조리 전멸시켰고 벨리알 레이드에서도 죽어가는 아군에게 광역 힐을 넣어줌으로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피아로도 잊어선 안 되지.’
피아로가 없었다면 벨리알을 레이드할 엄두조차 못 냈으리라.
‘아스모펠의 활약도 눈부셨고.’
10만대 1의 전투에서 아스모펠이 암암리에 활약해주었다는 사실을 이제 그리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TV에서 방영해준 전쟁 영상을 시청하고 아스모펠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아스모펠이 적군의 실력자들을 암살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전쟁 도중에 사망했을 수도 있어.’
내가 죽었다면?
’벨리알 레이드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을 테고, 결국 피아로를 비롯한 템빨단원 모두가 전멸했겠지.’
아스모펠의 활약은 비단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 적진에 잠입하여 온갖 정보를 확보하고 적군을 교란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을 것으로 추측됐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하자.’
아스모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아스모펠이 갖고 있는 패시브 스킬 <2인자의 집념>은 자신을 증명하지 못할 때야 비로소 빛을 발휘하는 스킬이었다.
‘내가 아스모펠을 인정해주는 순간 2인자의 집념이 약해지고 성장 속도가 느려질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국공신 목록에 넣지 않을 수는 없다. 아스모펠은 템빨국을 지탱할 기둥이었고 그에 적합한 입지를 다져야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감투를 씌어줘야 하지만 감투를 주는 순간 가치가 하락하는 인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스모펠의 처분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드가 결정했다.
‘라우엘에게 상담하도록 하자.’
혼자 생각해서 모르는 일은 라우엘과 의논하면 된다. 쭉 그래왔듯이 말이다.
‘늘 고맙다.’
라우엘에게 감사하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다.
빙그레 웃은 그리드가 나머지 개국공신 목록을 완성한 뒤 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질문했다.
“갖고 싶은 아이템이 뭐야?”
당연히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아이템이 달랐다.
누군가는 자신의 직업 특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무기를 원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는 방어구를 원했으며, 또 누군가는 밭일 효율을 높여주는 농기구를 원했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에게 확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드 네게 마법 무구를 받게 된다면 나는 전보다 더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
“좋아.”
그것 참 흡족한 반응이다.
의욕을 불태운 그리드가 작업에 돌입했다.
제작해야할 아이템에 필요한 재료들부터 확보한 후, 스틱세이에게 부탁해서 레이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칸을 비롯한 레이단 대장장이들과 함께 레이단 대장간의 모든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백린목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땔감으로 썼다.
“중급 대장장이들을 용광로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신경 쓰고 상급 대장장이들은 철광석을 제련하도록. 칸은 저를 보조해주시고요.”
“알았네. 한데 하급 대장장이들에게는 따로 지시할 일이 없는 겐가?”
“그들은 자기 기술 연마에나 집중하라고 하죠.”
“…..”
레이단의 대장장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하급 대장장이만 되도 충분히 한 사람의 대장장이 몫을 할 수 있었고, 중급 대장장이쯤 되면 개인 대장간을 차려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였다. 더군다나 상급 대장장이라면 왕궁에서도 탐을 낼 인재였다.
한데 하급 대장장이는 작업에 껴주지도 않고 중급 대장장이에게는 잡일을, 상급 대장장이에게는 최하급 광물인 철광석이나 제련하라고 시키다니?
심지어 장인급 대장장이인 칸은 제국에서도 탐을 낼만한 실력자인데 그를 보조로 삼다니?
이제 자신들의 실력에 꽤나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던 대장장이들은 그리드가 지시한 역할 분담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리드의 명령에 토를 달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그리드의 대장일 솜씨를 직접 목격하자, 그 앞에서는 칸 대장님조차도 명함을 내밀 수 없단 사실을 새삼 다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 님께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게끔 정진해서 빨리 중급 대장장이가 되어야겠다.’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주신 걸 영광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자.’
주제 파악을 끝낸 레이단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의 명령에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작업에 매진하는 그때였다.
“아빠마마 빠이팅!!”
로드가 아이린의 손을 잡고 대장간에 찾아왔다.
고모 루비에게 배운 응원 멘트를 외친 녀석이 작은 망치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 아버지 그리드의 움직임을 곁에서 지켜보고 따라했다.
따앙! 따앙!
타앙! 탕!
부자가 나란히 서서 대장일을 하는 광경이 평화롭고 흐뭇하다. 아이린의 아름다운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
“그리드라는 놈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떠는 모습을 어서 보고 싶군.”
콩스 남작은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들떠있었다.
앞으로 템빨국은 가우스 왕국을 비롯한 15개국에 공물을 바쳐야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그리드를 비롯한 놈의 부하들이 얼마나 놀라며 좌절할지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나라라는 게 그저 세우기만 한다고 다가 아니지.”
만약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지금쯤 대륙에는 수백 개의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콩스 남작은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그리드가 그저 귀여워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콩스 남작을 태운 마차가 라인하르트 궁전 앞에서 멈췄다.
“흠…”
마차에서 내린 콩스 남작이 살짝 놀랐다. 예상과 달리 라인하르트 어디에도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전쟁의 피해를 이토록 빨리 복구하다니…? 백성들을 얼마나 노예처럼 부렸기에?’
그리드라는 놈 정녕 어리석다. 놈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템빨국 자멸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쯧쯧, 입지도 완전히 다지지 못한 상태에서 백성을 혹사시키다니 생각이 짧은 자로군. 역시 왕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실례합니다.”
그리드의 한심함에 혀를 차고 있는 콩스 남작에게 기사들이 다가왔다.
일견하기에도 튼튼해 보이는 칠흑의 갑주를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가우스 왕국의 사신 콩스 남작님이 맞으십니까?”
“그렇소.”
과연, 최근 전쟁을 겪은 나라의 기사들답게 풍기는 예기가 만만찮다.
긴장하여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콩스 남작이 대답하자 기사들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같은 말단 병사들에게까지 예의를 갖추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 편히 하시죠.”
“…???”
콩스 남작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토록 뛰어난 갑주를 무장하고 단련 된 육체를 지닌 이들이 스스로를 말단 병사라고 자처하자 황당했던 것이다.
‘누굴 바보로 아나?’
이 기사 놈들이 굳이 왜 병사임을 자처하며 나를 속이려드는 거지?
불쾌해하던 콩스 남작이 이내 콧방귀 뀌었다.
‘그렇군. 우리 템빨국은 말단 병사조차도 기사처럼 잘 단련되어 있으니 우습게 보지 말라는 뜻인가.’
참으로 같잖은 연기다.
‘병신이 아닌 이상 누가 속을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콩스 남작이 궁전 정원으로 입장하며 생각했다.
‘명사라고는 쥐뿔도 없을 테지.’
반역자가 세운 나라의 건국식에 참석할 명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콩스 남작은 행사 현장이 텅텅 비어있거나 듣도 보도 못한 잡놈들이나 모여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한데…
“오오, 교황성하. 저 멋진 동상을 보십시오. 그리드 형제의 모습을 참으로 잘 재현해놓은 것 같습니다.”
“저 옆에 레베카 여신님의 동상까지 나란히 세워놓는다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드님은 그런 거 돈 든다고 싫어하실 걸요.”
“허허, 교황성하의 농이 지나치십니다. 여태껏 레베카 교단에 숱하게 공헌해 오신 그리드 형제께서 레베카 여신님의 동상을 세우는 일을 반대하실 리가 있습니까? 사비를 털어서라도 동상을 세우시겠지요.”
“허억.”
기세등등한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던 콩스 남작이 질색하며 숨을 들이켰다.
레베카교의 장로임을 상징하는 백색 의복 차림의 중년인 15명이 한 청년을 ‘교황’이라 지칭하며 정원을 노니는 거 아닌가?
‘말도 안 돼!!’
레베카교의 교황과 장로들.
제국의 황제조차도 함부로 오가라 하지 못하는 그 거물들이 템빨단 건국식에 참석했다고?
콩스 남작은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리드 그 미친놈이 자신의 부하들을 레베카교 교황과 장로로 분장시켜서 연극을 펼치는 게 분명해!!’
교황은 워낙 지고한 존재인지라 감히 함부로 가늠할 수 없지만, 레베카교의 장로들은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위대하신 칵투스 국왕전하께서도 친히 교황청으로 찾아가야할 정도였다.
한데 그들이 고작 템빨국 건국식에 참석할 리가 있겠는가?
“실례.”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있는 콩스 남작의 곁으로 일단의 무리가 스쳐지나갔다.
‘웬 생선 비린내가…?’
킁킁, 코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린 콩스 남작이 자신을 지나쳐간 무리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러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수, 수인족이라고!’
수인족.
깊은 바닷속 왕국 세이렌에 서식하는 종족.
탁월한 마력을 지닌 그들의 유능함은 유명하다. 가우스 왕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그들과의 동맹을 원했다.
하지만 수인족은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기껏 어렵게 사신을 보내도 문전 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그 고고한 종족이 템빨단 건국식에 참석한 것이다!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수인족이 이곳을 찾은 이유가 정녕 템빨단 건국식 때문일까? 섣불리 확신해선 안 된다. 다른 이유로 찾아온 걸 수도 있다.
‘그리드가 수인족에게 갚아야할 돈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현실을 부정하고자 노력하는 콩스 남작이었지만, 더 이상 부정하기가 힘들어졌다.
“수인족 왕 맥스옹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
수인족 왕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진 콩스 남작이 정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앞서 봤던 수인족보다 족히 배는 더 큰 장대한 풍채의 수인족을 보고 압도당하여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지, 진짜다. 저건 진짜로 수인족 왕이야!’
콩스 남작이 경기를 일으키는 사이, 레베카교 교황과 장로인척 연기(?)를 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가 수인족 왕 맥스옹에게 다가갔다.
“맥스옹 전하 하이요.”
“오오, 교황이신가. 오래간만이군. 그리드 전하는 만나셨는가?”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
아무래도 분위기상 교황과 장로들 또한 진짜인 것 같다.
콩스 남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라인하르트에 대악마가 강림했었고 그것을 그리드와 교황이 힘을 합쳐 해치웠다는 헛소문이 설마 사실이었던 건가?’
대악마를 그리드가 해치웠다는 소문이 대륙 곳곳에 퍼지는 중이다.
하지만 이 소문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악마는 인류를 멸절시킬 수 있는 존재.
그리드가 제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이를 해치웠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드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거짓 선전활동을 펼치는 것이라 여겼다.
한데 지금 보니 그 소문이 영 허황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콩스 남작은 생각했다.
‘칵투스 전하… 저는… 저는 못하겠습니다…’
교황과 수인족 왕 같은 거물들이 참석한 행사에서 앞으로 템빨국은 공물을 바쳐야할 것이라고 으름장 놓으라고?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기에는 콩스 남작의 간이 너무 콩알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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