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5화
건국식 현장이 적막에 잠겼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무려 15개 국가가 공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그리드가 이 요구를 거절한다면?
템빨국은 15개국에게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고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요구를 받아들여봤자…
-15개국에 공물을 바치다보면 금방 피폐해져서 결국 자멸하게 될 텐데.
-뭐죠? 그럼 뭘 어떻게 하든지 간에 결국 템빨국은 망한단 건가요?
-15개국이 연합한 시점부터 템빨국의 패망은 결정 된 거지. 플레이어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던 것 같음.
-NPC들이 이런 식으로 견제해올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시스템적으로 설계된 부분일까요?
-아무래도 그런 듯. 나라의 주인이 되면 천문학적인 부를 쌓을 수 있잖아요. 난이도 높기로 유명한 Satisfy가 유저에게 순순히 큰 이득을 안겨줄 리 없죠.
-S.A그룹 인성 보소… 그리드 건국비 6천만 골드만 날리게 생겼네.
-불쌍하긴 한데 솔직히 쌤통이기도 함. 그리드가 너무 잘나가서 질투하던 차였거든ㅎㅎ
-말들을 안 해서 그렇지 님 같은 사람 많을 듯.
플레이어가 최초로 세우는 국가의 처절하고도 초라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누군가는 분노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 그리드를 주목한다.
그리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 사절단 돌려보낸 다음에 해결책을 모색할 듯.
-그리드 성격상 사절단 죄다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스테임 후작 세력이랑 자이언트 길드까지 흡수한 마당에 솔직히 그리드가 꿀릴 게 뭐 있음?
-저도 그리드가 싸우는 길을 선택할 것 같네요. 공물 바치다가 자멸하느니 15개국이랑 화끈하게 전쟁하고 그중 1개국이라도 저승길 동무로 삼을 것 같아요.
-6천만 골드가 너무 거액이다 보니까 다들 현실감이 없나본데요. 6천만 골드면 현금으로 6,500만 달러에 육박하는 가치입니다. 6,500만 달러면 초호화 저택에서 평생 먹고 놀고 살면서 슈퍼 카 몇 대를 끌어도 다 못 쓰고 죽을 거금이고요. 그리드와 템빨단이 나라를 세우려고 투자한 그 천문학적인 돈을 순순히 잃고 싶을까요? 절대 아니죠. 아무리 그리드라도 저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을 걸요.
-하긴… 이미 투자한 돈이 너무 크네.
그리드는 사절단을 해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됐다.
각국의 언론 매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드가 사절단 대표들과 타협할 것이라고 분석한 그들은 예측 기사를 미리 작성해서 언제라도 속보를 내보낼 수 있게끔 준비했다.
“흐음.”
대리석을 쌓아올린 단상 위.
성스러운 왕관을 머리에 얹은 채 비딱하게 서있던 그리드가 드디어 반응을 보이려한다.
꿀꺽!
바짝 긴장한 템빨단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드! 제발 참아라!’
‘6천만 골드를 허공에 날리면 안 되잖아!’
그렇다.
템빨단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사절단을 당장에 베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데 그리드의 반응은 템빨단원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예절을 밥 말아먹은 상태로 개소리를 지껄이는 사절단에게 분노하며 살의를 표출하기는커녕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 한 가지 묻자.”
“…?”
“너희들, 15개국의 사절단 대표임을 자처하면서 왜 15명이 아니라 12명인 거냐?”
“….!”
사절단 대표들이 당황했다.
생각해보니 가우스 왕국과 울티나 왕국, 그리고 머레이 왕국의 사절단들은 별 해괴한 핑계를 갖다 붙이면서 돌아간 상태가 아니던가?
그 세 개 왕국의 의지가 얼마 전 협정을 맺었던 당시와 여전히 같을지는 모를 일이다.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사절단 대표들에게 그리드가 조소를 날렸다.
“고작 12개국의 사절단이 15개국의 뜻을 전달하려 들다니, 오만하고 허황되다. 허풍쟁이들이 모여서 거짓을 떠들어대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
“윽…!”
말의 무게를 잃었다.
그리드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사절단 대표들은 시작부터 꼬였음을 느꼈다.
“같잖은 새끼들.”
그들을 작은 음성으로 욕한 그리드가 단상 위에 마련 된 크고 화려한 옥좌에 눕듯이 기대어 앉았다. 마치 제국의 황제라도 되는 양 오만방자한 자세였다. 그가 단상 아래 서있는 후로이를 호명했다.
“후로이.”
“예, 전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읊어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후로이가 보유한 연설 스킬의 위력은 대단하다. 남과 같은 말을 하더라도 보다 논리적으로 들리게끔 만들었고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 떠들어도 뜻을 확실히 전달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경청하게 만드는 강제성을 탑재한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후로이는 그리드의 거친 언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개인능력까지 갖췄다.
“야, 이 염병할 새끼들아.”
“허황되고 거짓 된 사절단 대표단은 들으라.”
“천륜인지 개뿔인지 나는 어긴 적 없어.”
“짐은 천륜을 어긴 바 없다. 반역자가 아니다. 도리어 나는 비스바덴 국왕전하께 바쳤던 충성의 서약을 그대로 이행한 충신이다. 만백성이 나를 본받을만하다.”
웅변가 랭킹 1위의 위엄.
라인하르트 전역에 후로이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그리드의 의지를 다소(?) 포장하여 전달하는 또렷한 음성이 불안에 떨고 있는 백성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다.
“짐이 왕좌에 오르고자 결심하였던 이유는 타락한 에트날 왕실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고, 이는 대륙 역사에 길이 남아 마땅한 숭고한 대의다. 물욕에 눈이 멀어 거짓을 일삼고 진실을 왜곡하는 그대들 따위가 함부로 짐을 부정할 수 없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에트날 왕실.
정확히 말하면 아스란 국왕이 저지른 대죄 탓에 고통 받았던 라인하르트의 백성들이다. 그리드를 구원자로 인식하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드의 연설은 진실 되게 받아들여졌다. 사절단에게 겁을 먹고 있던 그들이 다시금 용기를 내어서 그리드의 이름을 연호했다.
사태를 잠자코 지켜보던 라우엘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잘 대처하셨습니다.’
만약, 그리드가 사절단에게 내키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였다면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15개국과 완전히 적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 불신과 불안을 안겨줬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분노를 다스렸다. 후로이의 교묘한 언변을 이용해서 사절단을 부정한 존재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덕분에 사절단 대표들은 무척 불리한 입장이 되어버렸다.
‘제길,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가는군.’
‘그리드를 겁박함으로써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백성들을 선동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도리어 백성들의 그리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버리고 말았으니 이게 뭐요. 스프 쒀서 개 준 꼴이잖소?’
‘이게 다 콩스와 큐단 놈들 때문이외다! 그 정신 나간 놈들이 갑자기 귀신에 홀린 것처럼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거요!’
‘다들 진정하시오. 비록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은 실패하였다지만 바뀐 건 없소. 결국 템빨국은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게 될 것이고 오늘 날의 무례에 대해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으음…’
예상치 못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당황하던 사절단 대표들이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올렛 왕국의 비즈 남작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네 이놈 그리드!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해봤자 네놈의 악행은 포장할 수 없는 것이다! 왕이란 지고한 존재! 어떤 이유에서든 왕을 시해하였다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할 대죄… 헉!!”
멋대로 떠들어대던 비즈 남작이 사색이 되었다.
한 눈에 봐도 실력이 비범해 보이는 그리드의 부하 수십 명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노려봐온 까닭이었다. 살기가 어찌나 흉한지 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 감히 사절단을 위협하다니…! 네놈들은 기본 상식조차 없는 것이냐! 사절단을 해치는 것은 그 나라에 전쟁 선포를 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닥쳐.”
연신 떠들어대는 비즈 남작의 목젖에 폰이 창날을 겨누었다.
“우리의 왕에게 함부로 막말을 지껄여놓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왕이란 지고한 존재라고. 안 그래?”
“으, 으윽…!”
네놈들의 왕 따위는 왕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비즈 남작이었으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
잔뜩 겁에 질린 그가 입에 지퍼를 채워버렸다. 뒤늦게 잘못을 자각한 것이다.
‘내가 너무 흥분했다!’
떠들다 보니 기세가 올라서 도를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드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는 하나 그것은 우리의 입장일 뿐이지 않은가. 그리드의 부하들이 당장 내 목을 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다른 사절단 대표들도 나를 비호해주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직감하고 덜덜 몸을 떠는 비즈 남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리드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어이, 너.”
“……!”
호명당한 비즈 남작이 화들짝 놀랐다. 사형선고를 눈앞에 둔 죄수의 꼴이다.
지진을 일으키는 그의 동공을 빤히 응시하던 그리드가 씨익, 불길할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그렸다.
“네게 기회를 주마.”
“기, 기회 말이냐… 옵니까?”
“그래, 본래라면 죽어 마땅한 네놈이라고 하지만 나는 자애로운 사람이니까.”
“…?”
뭘 하려는 거지?
사람들은 그리드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집중 된 수천, 수만 개의 시선을 느낀 그리드가 옥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는 너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이되 우리 템빨국의 위대한 무력을 천하에 알릴 기회이기도 하지. 서로 상부상조하자 이거다.”
“그, 그 기회라는 게 무엇이기에…?”
경청하는 비즈 남작.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질문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반문했다.
“허리춤에 찬 검과 단련 된 몸을 보아 검술을 익힌 것 같은데, 맞나?”
“그, 그렇소…입니다.”
“좋아. 명색이 전사라면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지. 자, 골라라.”
“뭘 고르란 말…씀이냐… 옵니까?”
“너와 싸울 상대. 아무나 골라잡아. 만약 네가 싸워서 이기면 죄를 사하고 살려주마. 단, 전투 중에 네가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너의 잘못일 뿐 우리 템빨국의 책임이 아니다.”
“…!!”
비즈 남작이 혹했다. 목숨을 건질 기회를 얻었으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화색이 되는 반면 다른 사절단 대표들은 치를 떨었다.
‘그리드 저놈이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설령 비즈 남작이 죽더라도 바이올렛 왕국에서 책임을 물 수 없게끔 이런 수작을…!’
보다 못한 아크 왕국의 브리튼 남작이 나섰다.
“기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불리한 처사요! 귀하는 비즈 남작이 감당할 수 없는 강자를 상대로 붙여놓고 비즈 남작을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외까!”
“또 뭔 개소리야? 머릿속에 소설가 들어있냐?”
쯧, 혀를 찬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했잖아. 싸울 상대는 스스로 고르라고.”
“그, 그 말이 정녕 사실이오?”
“당연하지. 나는 너희들과 달라서 거짓말 안 하거든.”
‘살 수 있다!’
비즈 남작이 환희에 찼다. 나름 검술에 조예가 있는 그는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골라서 싸울 수만 있다면 100퍼센트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씨익!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던 비즈 남작이 짙은 미소를 피어 올렸다. 자신의 상대를 정한 것이다.
칠흑의 갑주를 무장하고 있는 1천의 정예 기사들과 달리 낡아빠진 가죽 갑옷을 무장하고 있는 금발의 병사.
‘딱 봐도 하찮은 말단 병사! 내 상대는 바로 너다!’
결정한 비즈 남작이 금발의 병사를 지목했다.
“나, 나는 저자와 싸우겠소이다!”
일개 병사 따위를 지목한 이 나를 비겁하다 비웃을 게 뻔하다만, 자존심보다야 목숨이 백배 천배 더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비즈 남작은 그리드가 자신을 조롱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말단 병사와 싸우기를 원했고 그리드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일개 병사와 싸우겠다고. 그거 딱 좋군.”
힐끗.
그리드가 병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병사가 비즈 남작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누가 봐도 비즈 남작이 훨씬 더 강해보였다. 비즈 남작이 병사보다 머리 하나는 키가 더 컸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무장 상태도 훨씬 더 뛰어났으니까.
아니, 애초에 일개 병사 따위가 검술을 습득한 귀족의 상대가 되겠는가?
방송을 시청 중인 전 세계 시청자들이 답답해서 가슴을 때렸다.
-어휴, 그리드 뭐하는 거냐. 왜 저딴 개자식한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지?
-저건 착한 게 아니라 호구지.
-그 와중에 죄 없는 병사만 불쌍… 주인 잘못 만나서 개죽음 당하게 생겼네.
세상 사람 모두가 말단 병사를 동정했다. 불합리한 상사에게 핍박당하는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동질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정작 병사 본인은 담담했다. 비즈 남작을 마주하고 선 그가 투구 뒤로 흘러내리는 금발을 끈으로 묶었다.
투구에 가려져있는 병사의 이름, 아스모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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