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8화
‘저게 바로 지금의 왕.’
거실로 올라온 브루노 백작이 멈춰 섰다.
거실 중앙.
계단 난간에 비딱한 자세로 기대어 서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과연,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군.’
브루노 백작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이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무능할지언정 절로 우러러보게끔 만드는 품격을 갖춘 사람.
그게 바로 진정한 왕이라고 믿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한들, 저렇게 시정잡배처럼 짝다리나 짚는 사람을 그 누가 우러러볼 수 있겠는가?’
평민 출신의 그리드는 평생 품격을 갖추지 못하리라고 브루노 백작은 확신했다.
‘무릇 왕이란 혈통적으로 타고나야하는 것…’
“그대가 바로 브루노 백작인가?”
그리드의 질문이 브루노 백작의 상념을 깨뜨렸다.
여전히 계단에 비딱한 자세로 기대어있는 그와 눈을 마주친 브루노 백작은 심장이 멎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 무슨 눈빛…’
내가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인 것을 뻔히 아는 주제에 호감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다니?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다. 무시무시한 인간이다.
브루노 백작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수 년 전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부터 왕위를 찬탈할 명분을 설계해놓은 지력, 10만 대군과 홀로 맞선 무력, 대중을 현혹시키는 연설 능력, 15개국 사절단에게 위축되지 않는 담대함…’
사실, 이렇게 많은 수식어는 필요치 않다.
그리드를 표현하는데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대악마를 멸한 영웅.
그래, 그리드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전설적인 존재다.
브루노 백작은 그리드의 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브루노가 생각하는 왕의 덕목은 능력이 아니라 품격이었다.
왕은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야 신하들이 갖추면 된다.
‘그리드 당신은 왕이 되면 안 됐다. 당신의 역할은 왕이 아니라 왕좌지재야.’
숭고한 귀족인 내가 시정잡배 출신을 왕으로 섬긴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꾸욱, 주먹을 말아 쥐고 정신을 바짝 차린 브루노 백작이 그리드에게 예의를 갖췄다.
예의를 갖추는 이유?
단지 본인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정잡배에게 똑같이 시정잡배처럼 행동해서야 자신의 품격만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누추한 저택에서 국왕전하를 영접해야 하다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누추하기는 무슨. 궁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으리으리한 곳인데.”
‘굳이 궁전과 비교했다…?’
브루노 백작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하는 그리드.
겉으로는 여전히 호감을 표하고 있으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었다.
‘…대단하다. 역시 그리드 저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내 저택이 수천 단위의 병력을 수용하고 있단 정보를 이미 입수한 게야. 일반적인 저택에 수천 병력이 집결해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내 저택을 굳이 궁전으로 비유한 게고.’
애초에 내가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임을 알고 있단 사실부터가 신통방통한 일이다.
‘바로 곁에 있는 스테임 공작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암암리에 활동해온 나의 정체를 당최 무슨 수로 알아낸 게지?’
제국의 황제조차도 넘어서는 정보력을 갖췄다고?
도대체 무슨 수로?
“큭큭…”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실소를 흘린 브루노 백작이 그리드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아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도중에 어떤 실수를 했기에 내 실체를 포착할 수 있었느냐, 이러한 뜻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브루노는 파티마의 행적을 알고 있었군.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워하는 눈치고.’
씨익 웃은 그리드가 설명했다.
“파티마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그대의 저택 근처라는 정보를 입수했거든.”
“…!!”
브루노 백작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조차 막혔다.
‘내가 파티마를 납치한 이유가 반란군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란 사실을 바로 눈치채고, 그 하나의 단서만으로 내가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이란 사실까지 간파했다고?’
아아, 참으로 기가 막히게 영리한 인물이다.
‘당신이… 만약 당신이 타고난 왕족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행적에 매번 감탄하는 열렬한 충신이 되었으리라 자부한다.’
아쉬움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평민 출신 그리드를 섬기지 못하는 자신의 고지식함이 원망스러워질 정도로.
“……”
아무 말 못하고 있는 브루노 백작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그래서, 파티마는 어디에 있지?”
이 질문의 내용, 브루노 백작을 또 한 번 놀라게 만든다.
‘파티마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국왕씩이나 되는 인물이 일개 재단사 따위의 안위를…? 큭큭, 이거 미치겠군. 알면 알수록 이상적인 인물이로구나. 그리드의 백성들은 필시 행복하겠어.’
브루노 백작은 깨달았다.
그리드가 이끌어갈 템빨국의 미래는 과거의 에트날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리라고.
하지만 에트날 전통의 귀족으로서 썩 달가운 미래는 아니었다.
정통의 왕보다 평민 출신 왕이 더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것, 왕족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브루노 백작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었기에.
이를 악 물고 애써 미래를 부정한 브루노 백작이 대답했다.
“파티마 경은 지하에 있습니다.”
“지하라… 거기에 속옷 공방을 만들어놓은 것인가?”
“후훗, 정확히 말하면 예정이었지요.”
“그래? 미안하게 됐군.”
브루노 백작의 의뢰를 받고 속옷을 제작할 예정인 파티마의 시간을 자신이 뺏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리드는 왠지 새치기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 하지 말게. 오랜 시간을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그대가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모든 걸 끝내주지.”
그리드는 전설의 대장장이다.
자신의 높은 손재주 스탯이라면 속옷 제작법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금세 습득하리라 믿었다.
브루노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끝낼 수 있다는 겁니까?”
저택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3천 명의 사병과 20명의 기사, 그리고 스테임 공작의 곁에서 수십 년 싸워온 백전용사인 자신을 단신으로 순식간에 처단하겠다고?
‘자존심이 상하는군. 하지만 결코 오만은 아닐 테지.’
그리드는 10만 대적자이자 대악마를 멸한 존재.
나와 내 사병 따위들로는 그의 발목조차 붙잡지 못할 거다. 이게 상식이다.
하지만.
‘전투에는 늘 변수가 생기는 법.’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면 예상과 달리 그리드를 해치울 수도 있다. 그게 실전이다.
철컥.
브루노 백작이 허리춤의 칼집으로 손을 얹었고,
저벅.
그리드는 한 걸음 계단에서 내려왔다.
순간 방출되는 왕의 위엄이 그리드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브루노 백작을 압도시켰다.
하지만 브루노 백작은 굴복하지 않았다.
“내 피는 수백 년의 역사 동안 이어져온 귀족의 피. 나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정통 된 왕족 뿐…!”
소리친 브루노 백작이 칼을 뽑는 순간!
‘아, 맞다. 파티마의 호감을 빠르게 얻으려면 매력이랑 위엄 스탯을 최대한 높여 놓는 편이 좋겠지?’
문득 떠올린 그리드가 <성스러운 빛의 왕관>과 <대영주의 검>을 무장하였고,
“허억!”
화들짝 놀란 브루노 백작이 손에서 칼을 놓쳤다.
그리드의 위엄 스탯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발생한 사태였다.
‘이, 이 무슨 품격이란 말인가?’
브루노는 특수한 NPC다.
위엄 스탯이 최소 2천에 근접하는 왕족만을 왕족으로 인정하는, 자신만의 기준선이 무척 명확한 귀족 NPC였다.
하여 그리드의 높은 위엄 스탯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던 그가 지금 이 순간, 대영주의 검과 성스러운 빛의 왕관 덕분에 위엄 스탯이 급상승한 그리드에게 감명을 받고 말았다.
‘왕의 품격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었단 말인가…!!’
털썩!
브루노 백작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드의 품격을 인정하게 되니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브루노 백작은 더 이상 그리드를 부정할 수 없었고, 이는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굳이… 굳이 전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갑자기 칼을 뽑아들더니 무릎을 꿇는 브루노 백작을 뒤늦게 발견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리드.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영문 모를 소릴 지껄인 브루노 백작이 절을 올렸다.
“저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단 한 번도 전하를 증오한 적이 없습니다.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하는 그들은 가엽게도 저의 불합리한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뻔뻔한 부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훌륭하신 국왕전하라면 선처해 주시리라 믿고 감히 간청드리옵니다. 제 하찮은 목숨과 반 그리드 연합원들의 명단을 전하께 넘길 테오니 부디 제 기사들과 병사들만큼은 살려주십시오. 그들을 친히 거두어주십시오.”
“???”
갑자기 뭔 헛소리지?
그리드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끊임없이 늘어났고 브루노 백작은 안심했다.
“무언은 긍정일 테지요. 전하!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비옵나이다!!”
“아니, 자꾸 대체 뭔 소릴…”
그리드의 질문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푸욱-!
브루노 백작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자결했다.
동시였다.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 브루노 백작을 수색하고 처단하였습니다!]
[<반 그리드 연합원 목록>을 획득하였습니다.]
[<고지식한 귀족의 반지>를 획득하였습니다.]
[<고지식한 귀족의 채찍>을 획득하였습니다.]
[브루노 백작의 사병 3,017명 중 1,390명이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브루노 백작의 기사 30명 중 28명이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들은 손에 피도 묻히지 않고 브루노 백작을 처단한 당신의 놀라운 솜씨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존경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소식을 접한 스테임 공작이 달려옵니다!]
“전하아아아아!!”
“…..”
“면목이 없사옵니다! 설마 제 부하 중에 역적이 숨어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습니다! 이 모두 제 부덕의 소치이니 벌해주시옵소서!!”
“……”
그리드는 강렬한 피로를 느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인지능력이 따라가질 못했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정신적 피로와 직결된 것이다.
“일단… 일단 다 필요 없고 파티마부터 좀…”
속옷 제작법을 배우면서 머리를 식혀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
“이번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S.A그룹 본사.
그저 속옷 제작법을 배우러 갔을 뿐인데 우연히 반 그리드 연합을 토벌하게 된 그리드.
너털웃음 치면서 그를 모니터링하던 임철호 회장이 질문하자 운영 팀장 윤나희가 해석해 보았다.
“그리드가 대현자 스틱세이와의 호감도를 최대치로 높인 것부터가 변수가 되었습니다. 본래라면 대장장이 기술 레벨을 일정량 달성한 그리드가 프론티어를 방문할 경우 ‘우연히’ 발생했어야 할 파티마 퀘스트가 스틱세이 때문에 강제적으로 진행돼 버렸고, 하필 시기적으로 템빨국 에피소드와 겹친 까닭에 작금의 결과가 발생한 것 같아요.”
“맞네. 만약 그리드가 스틱세이와의 호감도를 최대치로 쌓지 못했더라면 지금 이 시기에 프론티어를 방문하지도 않았을 테고, 만약 그리드가 국왕이 되지 못했더라면 반 그리드 연합이라는 존재조차 생기지 않았을 테지.”
“맞습니다. 파티마 퀘스트와 반 그리드 연합, 그리고 브루노 백작의 캐릭터성이 맞물려서 결과적으로 그리드에게 좋게 작용하는 이런 우연… 그리드의 여태까지 행보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연이 아닌 걸세.”
“…?”
“그리드는 피아로를 부하로 둔 덕분에 크라우젤과 친분을 쌓았고, 크라우젤에게 번헨 열도의 정보를 입수한 덕분에 스틱세이와 친분을 쌓았으며, 이후 왕이 된 까닭에 반 그리드 연합이 탄생하였다네. 그리드의 행적 전부가 필연으로 엮인 게지 결코 우연이 아니야.”
인과율의 정점.
임철호 회장은 그리드라는 인물을 그렇게 규정했다.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가 그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과학자인 내게 운명을 논하게끔 만드는 자네들의 행보를 앞으로도 쭉 지켜보고 싶군.’
그리드, 크라우젤, 아그너스.
기적의 5인방 중에서도 유난히 흥미를 끄는 세 사람.
그들의 모습을 담은 모니터들이 임철호 회장의 주변을 계속, 계속 맴돈다.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는 특히 아그너스를 주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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