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17화
“대소신료들이 분노하고 있어. 형의 집행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네.”
용암 감옥.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초왕이 침울한 얼굴로 말한다.
한속봉이 고개를 숙였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미련을 버리시고 형을 집행하소서.”
“…..”
한속봉을 바라보는 초왕의 표정이 슬프다.
한속봉이 누군가.
왕자 시절부터 뜻을 같이 하였던 유일한 친구다. 초왕은 신분 관계를 초월해서 한속봉이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시 말하겠네. 환국의 양반들이 주작궁 제작자의 행방을 원하고 있어.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 못한다면 우리 초국은 큰 화를 입고 말 것이네. 그대는 정말… 정말로 그자의 행방을 모르는가?”
“…그렇사옵니다.”
“정말이지 난처하군…”
초왕이야 한속봉을 믿는다. 하지만 대소신료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한속봉이 개인의 의리에 얽매여 조국을 버린 매국노라면서 맹렬히 비난 중이다. 당장에 한속봉을 처형하여 양반들의 분노를 잠재워야한다고 주장했다.
‘평소 속봉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때가 기회다 싶겠지.’
한속봉의 공명정대한 성격은 다른 부패한 귀족들의 위기감을 조성하곤 했다. 그들이 한속봉을 해치울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명분이 있었으므로 초왕도 한속봉을 지킬 수 없었고.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부디 제 딸 수애의 목숨만큼은 지켜주시기 바라옵니다.”
“알고 있네. 수애만큼은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보이겠네.”
신분을 박탈해야 할 테지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다짐해보인 초왕이 한속봉에게 작별을 고했다.
“형장을 찾아가지는 않겠네. 그대의 최후를 내 두 눈에 새기고 싶지 않아.”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초국을 강성하게 만들어주소서.”
“…..”
원망할 법도 하건만, 마지막까지도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속봉이었다.
가슴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초왕이 황급히 용암 감옥을 떠났다.
***
“엄청난 도시군.”
초국 왕도 카라스.
이곳 또한 판게아처럼 온갖 문화가 혼합되어 있었다.
서양식 저택들과 동양식 저택들이 공존하였고 저 멀리 보이는 왕의 궁전은 신라 시대의 궁과 닮아있었다.
‘라인하르트보다 훨씬 큰 것 같은데.’
동대륙의 국가는 총 다섯 개밖에 없다고 한다. 그 탓인지 국가 하나하나의 규모가 서대륙 국가의 규모를 초월하는 것 같았다.
서걱서걱.
가위로 천을 오리면서 주변을 살피는 그리드.
정말이지 잠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는 그에게 뮤토가 말했다.
“저는 초왕을 알현하기에 앞서서 도시부터 둘러볼 계획입니다. 초국의 시장 상황을 파악해 놔야 초왕을 알현했을 때 보다 더 영리한 거래를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 수고해.”
“그리드 님께서는 어쩌실 건가요?”
“나는 따로 찾아야할 사람이 있어.”
“그자의 이름을 알려주시면 저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렇습니까…”
퀘스트 내용을 상세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나보다.
고개를 끄덕인 뮤토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 오는 길에 사냥한 몬스터들에게 얻은 전리품을…”
장장 5일 동안의 여행이었다.
그리드와 뮤토는 이곳 카라스에 도착하기까지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사냥했고 획득한 전리품의 양도 상당했다.
다만 아이템 분배 방식이 파티장 습득이었던 까닭에 그 전리품이 모두 그리드의 인벤토리에 있는 상태다.
그리드가 뮤토에게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8대 2비율이었다. 물론 그리드가 8이었다.
하지만 뮤토는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많다고 여겼다.
“오는 길에 만나 몬스터 대부분을 그리드 님께서 해치우지 않으셨습니까? 9대 1비율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너와 젠투아의 전사들이 보조해주지 않았으면 자칫 위험할만 한 순간들도 있었다. 함께 고생한만큼 공정하게 나눠야지.”
“그렇군요….”
뮤토는 그리드가 얼마나 공명정대한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템빨단에 괜히 많은 인재가 모여 있는 게 아니었구나. 그리드 님과 함께하면 손해 볼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나중에 서대륙으로 돌아가면 기필코 템빨국부터 찾으리라.
다짐한 뮤토가 그리드에게 꾸벅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뮤토의 신뢰를 얻었다는 확신을 품었기에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전리품 조금 더 챙겨준 거로 생색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
후후훗, 스스로의 명석함에 흡족해하면서 연신 웃던 그리드가 문득 광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든 광장의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한 까닭이었다.
‘뭐지?’
의아함을 느낀 그리드가 광장 쪽으로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판게아의 영주 한속봉의 처형일이 정해졌대! 내일 바로 형을 집행한다더군!”
“한속봉 님은 훌륭한 귀족으로 명망이 높잖아? 그분이 어째서 처형을 당하시는 거지?”
“환국의 양반들을 분노하게 만드셨다더라.”
“헉… 양반들을…”
“죽어 마땅하군…”
“….”
구출 대상의 처형 소식을 접하게 된 그리드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뭔 전개가 이렇게 빨라?’
사실 그리드의 한속봉 구출 계획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한속봉이 갇혀있다는 감옥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한 후, 한속봉의 구출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구출이 가능할 것 같으면 즉각 행동에 나서고 불가능할 것 같으면 초왕을 만날 생각까지 했다.
한데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사형 집행이 결정된 거면 초왕을 만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지. 바로 한속봉을 구출해야겠군.’
수애도 한속봉과 함께 있으리라 생각한 그리드가 정보 수집에 나섰다.
정보 수집에는 얀페이의 <호구 감지>스킬이 무척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드는 막말로 호구들만 물어서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쯧쯧… 나는 절대로 호구가 되지 말아야지.”
호구들을 안쓰럽게 여기면서 다짐하는 그리드.
자신도 한때는 얀페이에게 호구로 낙인찍혔단 사실, 그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
초국의 정1품 귀족 삼다수가 용암 동굴 지하 2층을 찾아왔다.
한속봉의 딸 수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뭐, 뭐라고요? 아버님의 처형일이 정해졌다고요?”
벌써 보름 째 더러운 감옥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옥처럼 빛나는 여인, 수애.
캄캄한 감옥은 밤하늘이요, 수애는 달이다.
음기를 발산하는 수애의 매력은 남성이 거부할 수 있는 개념의 것이 아니었다.
꿀꺽,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수애의 몸을 훑으며 마른침을 삼킨 삼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지어 바로 내일이다.”
“그, 그럴 수가…!”
수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한속봉은 평생토록 초국을 위해서 힘써온 인물이고 그 사실을 만백성이 알고 있다.
한데 단지 환국 양반들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을 당하게 생긴 것이다. 납득할 수 없었다.
“어찌 이럴 수 있죠? 우리는 모두 초국의 백성이고 초왕의 신하가 아닙니까? 한데 왜 우리의 목숨이 환국 양반들의 기분에 달린 거죠? 네?”
“그대가 아직 어려서 현실을 잘 모르는구나. 환국은 하늘이다. 국가의 개념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가 섬겨야할 대상인 게야. 환국 양반들의 분노를 산다는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함이지.”
“…..”
“뭐, 그대는 걱정 마라. 그대의 목숨만큼은 살려 달라고 이 삼다수가 전하께 진언을 올리도록 하마. 아비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그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이므로 귀족의 작위만을 박탈해달라고 내 친히 전하께 부탁드리마.”
“…..”
“아, 작위를 잃는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것 없다. 평생 내 곁에서 내 보호를 받고 살아가면 될 것이니.”
삼다수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수애를 바라보는 눈빛에 얼마나 큰 욕정이 들끓고 있는지 말이다.
수애가 그에게 그윽한 눈빛을 보내었다. 삼다수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요염한 눈빛이었다.
“소녀 삼다수 님만 믿겠어요.”
“아? 아아, 그래, 그래. 흐흐, 나만 믿어라.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럼 믿고 부탁을 드릴게요. 아버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아? 아아, 그래야지… 이봐, 간수. 당장 감옥 문을 열… 아, 아니, 안 된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삼다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수애는 초국 최고의 미녀이기에 앞서서 전사였다.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 주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간수에게 열쇠를 꺼내라고 명령하던 삼다수가 명령을 철회하는 모습을 본 수애가 흥, 콧방귀 뀌었다.
“내가 화장만 했어도.”
“응?”
귀를 의심하는 삼다수.
그를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수애가 다시 연약한 소녀를 연기했다. 거짓말처럼 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아버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요.”
“그, 그건 걱정 말거라. 내일 너희 아버지를 형장으로 데려가기에 앞서서 너와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내어줄 테니까.”
어색하게 웃은 삼다수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 이상 수애와 대면하고 있다가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실수를 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혼자 남게 된 수애가 손톱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님의 처형은 이미 공표되었다고 한다. 물릴 수 없는 것이다. 처형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를 구출하는 방법밖에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 너무 무력하구나.”
무릎을 감싸 안고 쭈그려 앉는 수애의 두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렀다. 혼자 있을 때조차 강한 여성을 연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초왕의 보고다. 주작궁 제작자의 행방을 모른다고 발뺌하는 한속봉을 괘씸하게 여기어 처형한다는군.”
“하? 그러면 우리의 집착을 잠재울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건가?”
“어리석군. 우리에게 우민의 목숨 따위 아무런 가치도 없거늘.”
초국 왕성 귀빈실.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진 그곳에 비단 도포를 입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환국의 양반들이다.
“주작궁의 제작자는 필시 파그마다. 환국을 떠나고서도 어떻게 여태껏 살아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우리는 놈을 반드시 찾아내야해.”
“한속봉이 죽기 전까지 파그마의 행방을 불지 않는다면… 우리가 친히 움직여야겠지.”
“아아, 파그마와 어서 만나고 싶어. 녀석의 재롱 넘치는 검술이 그립다고.”
“한울님께 일수에 제압당했던 검무 말이지? 그 하찮은 잡기를 과연 검술이라고 논할 수 있을까. 큭큭.”
“들뜨지 마라. 이곳은 환국이 아니야. 우민들 앞에서는 양반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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