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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75화 (470/1,794)

템빨 30권 - 18화

“특이하게도 생겼군.”

용암 감옥은 인간이 세운 건축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휴화산을 살짝 개조한 것이 전부인, 무려 자연 친화적(!) 감옥이었다.

검고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 그리드 일행에게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

“산이 뾰족뾰족하게 생겨서 무서워요.”

“곳곳에 용암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데 정녕 휴화산 맞나…? 갑자기 폭발해 버리는 거 아니여?”

이단과 얀페이가 주춤거린다.

그들은 용암 감옥에 입장할 용기가 도통 생기지 않았다.

물론, 애초에 그리드부터가 그들과 동행할 생각이 없었다.

“이곳이 용암 감옥인 건 확실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됐어. 둘은 아까 잡아두었던 숙소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놓지요.”

“저는 따뜻한 목욕물과 차를 준비해놓을 게요. 꼭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음.”

혼자 남은 그리드가 시간을 확인했다.

공표된 한속봉 처형 시간까지 2시간이 채 안 남았다.

‘정보 수집에 너무 오래 걸렸어.’

그나마 얀페이가 도와줘서 이 정도다. 만약 얀페이가 없었다면, 그리드는 아직까지도 한속봉 부녀의 행방을 몰랐을 것이다.

‘그럼 결국 초왕을 만나는 선택을 내렸을 테고… 피바람이 불었겠지.’

그리드가 수행 중인 히든 퀘스트는 2가지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선택지는 감옥에서 한속봉 부녀를 직접 구출하는 것.

두 번째 선택지는 초왕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한속봉 부녀를 납치, 감금하고 이제는 처형까지 하려는 초왕과 직접 대면했다가는 사단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무척 꺼려지는 전개였다.

그리드가 동대륙을 재방문한 궁극적인 목표는 아군의 확보였으니까.

‘초국과 수교를 맺을 여지를 남겨놔야 돼. 초왕과 대놓고 적대할 수는 없어.’

최대한 은밀하게 한속봉 부녀를 구출한다!

결정한 그리드가 <도살귀의 안대>와 <기괴한 가면>을 장착해서 얼굴을 절반 이상 가렸다.

그리고 용암 감옥에 입장하는 순간.

[플레이어 최초로 <용암 감옥>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용암 감옥>에서 획득하는 경험치양이 상승합니다!]

[보스 몬스터를 사냥 시, 유니크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획득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엥?”

던전으로 분류된다고?

‘잘못 찾아왔나?’

그리드는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행동했다.

눈앞에 펼쳐진 감옥의 구조를 낱낱이 살피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절그럭. 절그럭.

울퉁불퉁한 지면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선을 돌려 본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머리 위에 <용암 감옥 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녀석들, 강시였다.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두꺼운 쇠사슬에 양손이 구속되어 있는 강시. 파랗게 질린 피부에 핏기라고는 없다.

‘간수가 몬스터야?’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된 일이다.

‘죄 없는 병사들을 해쳐야 했다면 찝찝했을 테지만 몬스터가 상대라면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지. 이곳을 빠르게 돌파하고 한속봉 부녀를 찾자.’

결정한 그리드가 네 개의 황금 손을 소환했다. 갓 핸드다. 녀석들 모두 묠니르를 무장하고 있었다.

“쓸어 버려.”

그리드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였다.

퍼펑!

퍼퍼퍼펑!!

폭음을 터뜨리며 날아간 갓 핸드들이 느릿느릿하게 다가오고 있는 강시들을 묠니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뭐?’

경직된 강시들을 해치우고자 준비동작을 취하던 그리드가 움찔한다.

묠니르에 얻어맞은 강시들이 상태이상 경직에 ‘면역’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물리 데미지도 거의 입지 않았다.

강시들은 높은 저항력과 방어력을 동시에 갖춘 몬스터였던 것이다.

‘국가 시설을 보호하는 용도로 배치한 강시답게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거지?’

혀를 찬 그리드가 상어의 모습을 닮은 푸른 대검을 뽑아 쥐었다. 순간 찬란한 백광이 휘몰아치면서 감옥을 지배하고 있던 어둠을 물리친다.

어둠 속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9실패작>의 위용이었다.

***

용암 감옥이 악명 높은 이유는 뜨거운 열기에 있다.

보통 사람은 용암 감옥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흘렀기 때문에 금방 탈수증상을 겪었고, 심할 경우 화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용암 감옥에 갇히는 것만으로도 죄수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용암 감옥의 간수들이 병사가 아닌 강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인 병사가 용암 감옥에서 근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사들이 생산한 강시들이 간수로 배치되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만 가시죠.”

“음…”

감옥에 갇힌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한속봉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초왕의 배려로 식수를 공급받아 탈수증상은 면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땀을 흘렸으므로 체력 소모가 너무 컸다.

휘청.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한속봉을 간수가 붙잡아주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간수의 손길을 느낀 한속봉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혈강시…’

혈강시는 시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처녀의 피, 그리고 독극초에 배합한 약물에 절여 생산하는 강시다.

이들은 일반적인 강시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육체 능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사람처럼 말도 했다. 물론 자아는 뚜렷하지 않았고 강시를 만든 도사의 뜻만 전달하는 수준이다.

터벅터벅.

혈강시 간수들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한속봉.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 앞에서 그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자신이 겪을 고통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혼자 남게 될 수애가 걱정이었다.

‘아니, 걱정할 것 없다. 내 딸 수애는 누구보다 강하다. 혼자 남더라도 늘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게다. 전하께서도 지켜주신다 하였으니 안심해도 된다.’

자식을 믿는 것이 부모의 도리.

한속봉이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곧 다가올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그 앞에 정1품 귀족 삼다수가 나타났다.

“꼴이 참 우습게 되었군?”

“삼다수…”

늘 인자하던 한속봉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타락한 귀족의 대표격 인물인 삼다수는 청렴한 한속봉과 늘 대립해왔다. 한속봉은 삼다수를 귀족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내가 죽으면 전하께서 홀로 그대를 감당해야 하는가… 초국의 앞날이 걱정이로다.”

한탄하는 한속봉에게 삼다수가 실소를 날렸다.

“다 부질 없네. 곧 죽을 사람이 앞날을 걱정해서 뭐하는가?”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온 겐가?”

“큭큭큭, 오랜 악연이 떠난다니 시원섭섭하더군. 악연도 인연인데 내 그대에게 위로의 한마디 건네려고 찾아왔네.”

“그대의 위로 따위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들어보시게. 자네의 딸 수애 말이야.”

“…그대의 더러운 입에 내 딸 아이의 이름을 올리지 말게.”

수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움찔한 한속봉이 살기를 피어올렸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하하하, 큰 소리를 내어 웃은 삼다수가 한속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수애는 내가 평생을 잘 돌봐 주겠네. 질릴 때까지 귀여워해 주고 예뻐해 주도록 하지. 그러니 딸 걱정은 접고 마음 편히 이승 하직하시게나.”

“……!”

한속봉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금수 같은 삼다수가 수애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은 한속봉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고자 노력했다.

“그대의 뜻대로는 안 될 걸세. 전하께서 친히 수애를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조해주셨으니까.”

“큭큭, 하지만 수애가 나를 원한다면?”

“뭐…?”

“나는 오늘 수애의 아침 식사에 환령초를 섞으라고 명령하였다네.”

“화, 환령초라고!”

환령초는 헛것을 보게 만드는 마약이다. 가장 큰 문제는 도사의 환술에 대한 내성을 완전히 상실시킨다는 점에 있었다.

“내가 보낸 도사가 지금쯤 자네를 연기하며 수애에게 속삭이고 있을 게야. 평생 삼다수 님을 믿고 따르라고. 삼다수 님이 너를 지켜줄 거라고. 이 아비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말이야. 큭…! 큭큭큭!!”

“이…! 이 악독한 놈…!!”

한속봉이 절규했다. 눈앞의 악마를 증오하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저주했다.

하지만 부질없다.

한속봉은 잠시 후 처형당할 사형수에 불과하다.

혈강시들에게 구속당한 그는 삼다수에게 그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삼다수는 한속봉의 발악을 희극 보듯이 감상하며 웃어젖힐 뿐이었다.

***

용암 감옥 지하 2층.

“아버님…”

뜨거운 열기 탓일까?

수애는 아침부터 쭉 정신이 몽롱했다. 그토록 그리던 부친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맞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도 안 됐다.

그녀의 뺨을 한속봉이 어루만졌다.

수애는 아버지의 손길이 평소처럼 따뜻하지 않고 왠지 차갑다고 느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문제 삼을 겨를이 없었다.

“정녕 이렇게 떠나시는 건가요.”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 수애.

그녀에게 한속봉이 당부했다.

“수애야, 먼저 떠나는 이 아비를 대신해서 앞으로는 삼다수 님이 너를 지켜줄 게다. 늘 그분께 감사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섬기도록 하여라.”

“네… 네, 알았어요.”

아버지의 유언이다.

떠나는 길 편하시길 바라며, 수애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때였다.

“언제부터 그런 괴물이 당신의 아버지가 된 거지?”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두꺼운 중저음의 음성이 수애의 귓속을 파고든다.

수애는 이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리드 님…?”

역시, 지금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

여기서 왜 그리드 님의 목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수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한속봉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있었다.

“웬 놈이냐!!”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치는 한속봉.

수애의 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액체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더 이상 한속봉이 아니었다. 수애가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생김새의 사내였다.

“다, 당신은 누구죠? 아버님은? 아버님은 어디에?”

환술이 풀리면서 환령초의 약효가 떨어지자 수애의 혼란이 극대화되었다. 끔찍한 두통이 그녀의 뇌리를 연달아 흔들어 놓는다.

이게 대체 무슨 악몽이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공포.

어두운 감옥 속에서 벌벌 떠는 그녀의 귓가로,

“파그마의 검무.”

재차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聯).”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크아아아아악!!”

수애에게 환술을 걸었던 도사가 토해내는 비명에 이어서,

쿠르르르르릉!!

수애를 가두고 있던 감옥의 철창이 모조리 잘려 나가 무너져 내렸다.

“나갑시다.”

“아…”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커다란 손.

수애는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다.

“그리드 님… 정녕 당신인가요?”

“맞습니다.”

수애의 손을 붙잡아 그녀를 일으킨 그리드가 거짓 없이 답한다.

피투성이가 된 가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가 수애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집에 가죠.”

험난할 것 같다만.

이라는 말은 애써 삼킨다.

애초에 <기괴한 가면>을 적실 수 있는 피는 ‘적의 피’가 아니라 ‘착용자의 피’인 바.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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