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3화
복제술사.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바알의 계약자>, <블러드 워리어>와 함께 Satisfy에 최초로 등장한 히든 클래스이다.
복제 대상 스킬이 에픽 등급 이하일 경우 무조건 복제하여 자신의 스킬처럼 사용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 어떤 존재라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복제술사가 대량의 스킬을 복제해놨을 때 발휘하는 전투력과 효용성은 궁극에 이른다.
템빨왕 그리드조차도 ‘완전한 상태의 유페미나와 싸우면 내가 진다.’라고 확신할 정도였고 그건 사실이었다.
“저 소녀는 뭐지?”
철갑귀마대 1대대.
사하란 제국과의 전쟁 당시 <청은도끼대>의 발을 묶어놓았던 벨토 왕국 최강의 부대.
아레스 공작령의 수도까지 거침없이 진격하던 그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자신들의 진군 소식을 접하고 겁먹은 적군이 모조리 퇴각하여 텅텅 비었다던 <박카루 요새> 성벽 위에 여자애 하나가 올라있는 까닭이었다.
금발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민간인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당당하다.
성벽 위에 고스란히 모습을 노출한 것으로 모자라 손에 백기를 들고 있지도 않다.
1대대장 젠이 철갑귀마궁병대에게 눈짓했다.
“쏘아 죽여라.”
아레스 공작은 대단한 인물이다. 그 어떤 나약한 존재라도 그의 훈련을 거치면 강병이 되었고 기사가 되었다.
성벽 위의 저 소녀 또한 겉으로는 연약해 보일지언정 사실은 아레스가 키운 비밀 병기일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수상한 존재를 일일이 신경 썼다간 행군에 차질이 생긴다. 혹시 모를 변수는 처음부터 차단함이 옳다.
끼릭-!
냉정한 젠의 명령을 듣고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철갑귀마궁병대가 활시위를 당겼다.
성벽까지의 거리는 500미터.
풍향도 나쁘다.
하지만 철갑귀마궁병대는 ‘귀마 위에서 화살 명중률 80퍼센트 상승’ 특성과 ‘고급 궁병술’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바.
‘매의 눈’까지 갖춘 그들에게 500미터 거리 바깥에 있는 표적을 맞추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팟!
파파파파팟!!
10발의 야파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10발 모두 성벽 위 소녀에게 적중할 기세였다.
자리의 모두가 소녀의 죽음을 예견했다.
당사자인 소녀만 제외하고 말이다.
“궁병대가 총 200기... 방비해놔야겠군요.”
날아오는 화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린 금발 소녀, 유페미나가 <제랄프 길드>의 마스터이자 기공사 랭킹 1위인 <제프>의 스킬을 전개했다.
“이치 부정.”
대인전에 특화 된 기공사 3차 클래스 <역천>의 궁극기 중 하나.
파앙-!
파파파파파파팡-!!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기의 구체가 수백 개, 유페미나의 곁으로 떠오른다.
이어서.
스르륵-
유페미나의 가녀린 몸을 통째로 꿰뚫을 위력을 간직하고 쇄도해왔던 10발의 화살이 모조리 기의 구체에 집어삼켜져 멈춰버렸다.
모든 투사체를 무력화시키는 이치 부정의 힘이었다.
이를 본 철갑귀마대가 귀마를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기공사다!”
“원거리 공격은 무의미하다! 접근해서 공격하고 기의 구체를 유지할 수 없게끔 정신을 분산시켜라!!”
“방패대가 선두에 서고 궁병대는 공격을 멈춰라! 저 구체에 도리어 반격당할 가능성이 있다!!”
빠르게 판단한 장교들의 명령을 받든 철갑귀마대가 성벽 아래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그들은 유페미나를 위협할 수 없었다.
성벽을 오를 수가 없었으니까.
“어스퀘이크. 블리자드. 썬더스톰. 볼케이노.”
“...?!”
“뭐!!”
기공사가 아니라 마법사였다고?
그것도 4개 속성의 ‘상위 마법’을 영창 없이 전개하는 마법사!
“대마법사...!”
콰르르르르르릉!!
무너지는 대지가 귀마들을 집어삼키고,
쩌적!
쩌저저저적!!
낙마하여 약화 된 철갑귀마대원들의 몸을 눈보라가 얼어붙게 만들었으며,
콰직!
파지지지지지직!!
전격의 폭풍이 얼어붙은 철갑귀마대의 몸을 강타하여 치명상을 입힌다.
거기에.
쿠르르르르르릉!!
무너진 대지 안쪽으로부터 솟구친 화산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철갑귀마대에게 마그마를 퍼부었으니 재앙에 재앙, 재앙의 연속이다.
“크아아아악!!”
“어떻게 혼자서 이런 마법 연계를...!”
아비규환!
얘기치 못한 연계 마법에 철갑귀마대는 무방비하게 당하고 말았다.
흘러내리는 화산 속에서 벗어나고자 아등바등 노력하는 부하들을 확인한 젠이 치를 떨었다.
‘아레스 공작의 부하 중에 대마법사가 있었다니!’
모든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는 많다.
하지만 그들은 1개 속성에 특화 된 마법사들과 달리 상위 속성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을 안고 있다.
그렇다.
각 속성의 상위 마법을 단신으로 전개할 수 있는-그것도 영창 없이- 존재를 세상은 대마법사라고 불렀다.
성벽 위 저 금발의 소녀, 어리고 여린 겉모습과 달리 대륙에 10명밖에 없다는 지존의 반열에 올라있는 거물인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대마법사는 결국 마법사.
기공사의 기술은 사용할 수 없다.
한데 저 소녀는 기공사의 기술을 우선적으로 전개하여 원거리에 취약한 마법사의 약점을 보완했다.
그야말로.
‘...완전체!’
꿀꺽!
마른침을 삼킨 젠이 다급히 소리쳤다.
“성벽에서 떨어져라! 해머병은 성벽을 부숴라!!”
철갑귀마대는 강인한 육체를 자랑한다.
유페미나의 연계 마법을 맞고 중상자는 생겼을지언정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라지는 화산 속에서 빠르게 고통을 수습하고 벌떡 일어난 그들이 다시금 귀마에 탑승,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스킬들을 전개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성벽을 때렸다.
그러자.
쿠웅!
쿠르르르르르르르!!
유페미나가 올라있는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여기서부터 귀마의 민첩성과 철갑귀마대의 고급 기마술이 진가를 발휘했다.
터억!
타타탓!!
허공에 흩날리는 성벽의 잔해를 밟고 뛰어오른 귀마들이 철갑귀마대와 유페미나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주었고, 하늘 위에서 유페미나는 1천의 철갑귀마대에게 둘러싸인 형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어라, 마녀!”
유페미나의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웠던 젠.
그녀를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괴물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던 그가 마녀라는 고리타분한 표현을 써가며 살기를 내뿜었다.
그의 창끝에 머물러 있는 폭염은 하늘 위에 수놓인 구름 떼를 증발시켜버릴 기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페미나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주지 못했다.
“백광보.”
스파앗-!
“....!!”
백광보.
컨트롤이 어렵다는 제약이 있지만 강렬한 햇빛, 혹은 완연한 달빛 아래서 최고의 효력을 발휘하는 보법.
천외천 크라우젤이 애용하는 그 최상위 보법이 유페미나의 컨트롤 솜씨와 부합되어 완벽하게 재현됐고,
‘사라졌다?!’
젠은 공격 대상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심정이랄까.
“대대장님을 원호하라!!”
궁병이라는 병종의 특성상 지상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철갑귀마궁병대 200기.
자신들의 대장이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자 마구잡이로 활을 쏘기 시작한다.
그들은 벌써 여러 개의 대마법을 사용하고 보법으로 모습까지 감춘 유페미나가 설마 아직까지도 기의 구체를 제어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임드 NPC가 아닌 그들이 천재의 반열에 있는 플레이어의 컨트롤 솜씨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안 돼...!”
시선과 감각으로 유페미나를 탐색하던 도중.
지상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수백 발의 화살을 느낀 젠이 아차하며 경악성을 뱉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허공에 맴돌고 있는 저 기의 구체들, 여전히 금발 소녀의 통제 하에 있음을.
스르륵-
스륵- 스르르륵-
날아온 화살들이 모조리 기의 구체들에게 삼켜짐과 동시에.
“소닉 붐.”
퍼어어어어어어어엉-!!
바람술사 랭킹 1위 <제드노스>의 궁극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젠의 바로 머리 위에서 전개된 마법이었다.
“...!!!”
인간의 청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폭음.
젠을 비롯한 철갑귀마대원들이 일제히 균형을 잃었고, 귀에서 피를 쏟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들을 뒤따르는 것은 살과 뼈를 짓누르는 강력한 풍압과 기의 구체에 갇혀있던 화살 비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
...
..
[철갑귀마대 1대대장 젠을 해치웠습니다!]
[철갑귀마대가 당신에게 복수심을 불태웁니다! 앞으로 철갑귀마대는 당신에게 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
@유페미나는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당시에 활약했던 템빨단의 마법사다.
@아... 골렘 조무래기들을 학살했던 그 양 갈래 머리 미소녀?
아레스 군단은 템빨단을 꽤 오래 전부터 주목해왔다. 그리드와 템빨단의 잠재력을 진즉부터 엿보고 대비한 것이다. 골렘 침공전 전투 영상도 몇 번이나 복기하면서 봤을 정도다. 당시 전황에 큰 영향을 주었던 미소녀 마법사를 잊을 리 없다.
@뛰어난 편이기는 했지만 잡골렘들이나 쉽게 처치하는 수준이었지, 정작 고대의 병기한테는 흠집 하나 내지 못했었잖아?
@심지어 에트날 왕국과의 전쟁에서는 별다른 활약도 못했고 벨리알 레이드 때는 존재감 자체가 없었지.
@그러니까 한때 반짝했던 퇴물이라는 건데... 그리드는 왜 고작 그만한 인물에게 1대대를 전담시킨 거지?
@시간 벌이용 패겠지. 그리드와 지슈카, 그리고 폰과 레가스가 다른 대대를 격퇴하는 동안 1대대가 우리 성까지 침입해올 수 없게끔 발을 묶으려는 의도일 거다.
@하긴.... 마법사의 광역 마법처럼 시간 끌기에 용이한 기술도 드물지.
@그리드는 알면 알수록 의리가 있는 인물이군. 동맹 관계인 우리가 피해를 입지 않게끔 동료를 희생시키다니, 보통 결단력을 지닌 게 아니야.
@인망의 그리드라는 말도 있잖아. 최소한 동맹을 유지하는 동안만큼은 믿고 의지해도 좋은 인물 같다.
@과연 정점에 오른 인물답게 존경할만하군.
아레스 군단원들은 그리드의 매력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동맹을 위해서 동료를 희생시키는 그리드의 과감한 결단력과 숭고한 정신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런 그리드를 믿고 따르며 기꺼이 희생역을 맡은 유페미나도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템빨단... 역시 만만치 않아.
@1대대 궤멸...!
@크라우젤, 아그너스보다 강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1대대 궤멸!!
@아그너스는 같은 선상에 두지 말자. 그 미친놈의 힘은 아예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
@심지어 대부분의 네크로맨서가 아그너스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라 더욱 더 절망적이지. 나중에 아그너스 혼자서 이끄는 언데드 군단의 숫자가 수십만 단위에 육박할 가능성도 있어.
@1대대가 전멸했다고!!
“......”
열띤 토론을 벌이던 아레스 군단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길드 채팅창에 자꾸만 헛소리가 보였던 까닭이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던 누군가 콧방귀 뀌었다.
@1대대가 전멸했다고? 분위기 타서 농담하지 마라.
우리가 한참 템빨단을 고평가 하고 있으니까 여세를 몰아 우스개 하는 모양이다.
생각하는 아레스 군단원들에게, 1대대 전투 현장을 염탐 중인 동료가 다시금 길드 채팅을 날렸다.
@사실이야...! 유페미나가 혼자서 1대대를 몰살시켰다고!!
“.....”
미친 헛소리다.
철갑귀마대 1대대는 지슈카 혼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최강의 부대다.
숫자가 무려 2천이었고 총 5개의 병종으로 구성되어 밸런스가 무척 뛰어났다.
사하란 제국의 청은도끼병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1대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한데 유페미나가 혼자서 그들을 궤멸시켰다고?
심지어.
@단 12분 만에?
유페미나가 1대대와 조우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건 정확히 12분 전이다.
시간을 확인한 아레스 군단원들의 등골이 오싹해졌고 정수리가 쭈뼛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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