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5화
“자네가 바로 그리든가? 사내답게 잘생긴 것이 아주 멋지군. 거의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호남인데? 껄껄!”
군신(軍神) 아레스.
<최초의 왕>에 가장 가까웠던 거물 중의 거물이다.
이제 그리드는 알고 있다.
만약 자신의 곁에 라우엘이 없었다면, 최초의 왕좌는 아레스의 차지가 되었을 것임을.
“내 살다 살다 잘생겼다는 칭찬은 처음 들어보는군요. 가식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아레스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호탕한 성격, 거기에 평범한 아저씨 같은 외모가 맞물려서 상대에게 안락함과 호감을 선사했다.
“잘생겼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거 이상한데... 아하, 이 친구.”
씨익!
말하다 말고 음침한 미소를 피어올린 아레스가 팔꿈치로 그리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애인 앞이라서 겸손하게 행동하는 거지?”
‘애인?’
나한테 애인이 어디 있다고?
어리둥절해진 그리드가 아레스의 시선을 따라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슈카가 있었다.
모델처럼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가 인상적인 구릿빛 피부의 미녀.
수백 명의 인파 속에 있어도 화려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애인 아닌데.”
“지슈카랑 유라를 둘 다 정복했다는 소문을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네.”
“내가 걔들을 무슨 수로 정복...”
“세계 최고를 다투는 남미의 꽃과 동양의 꽃을 양손에 거머쥐다니... 부럽군, 부러워. 나도 10년만 젊었어도 승산이 조금은 있었을 텐데. 쩝.”
“아니, 애인 아니라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슈. 전생에 우주를 구한 어떤 부러운 놈이 아닌 이상... 아니, 쓰레기가 아닌 이상 어떻게 애인을 동시에 두 명이나 사귈 수 있습니까?”
“오호, 그럼 유라 한 명하고만 사귄다는 뜻인가? 지슈카와의 관계는 한때의 불장난이었을 뿐이고?”
“에휴, 말을 말아야지.”
그리드는 아레스로부터 도란의 향기를 맡았다. 일일이 상종해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투덜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돌리는 그리드.
그를 살피는 아레스의 눈빛이 평온하다.
‘순수하고 솔직한 타입이군.’
일국의 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수수하다. 가식이 없고 감정 표현이 솔직하다.
올해 나이 49세인 아레스가 봤을 때, 그리드 같은 유형의 사람은 대개 뒤통수를 맞는 쪽이지 뒤통수를 때리진 않는다.
‘물론 속단할 수는 없다만.’
첫인상이 좋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템빨단이 아레스 군단에게 동맹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더러운 수작을 부렸다지만, 이미 그건 지나간 일이다.
템빨단 덕분에 철갑귀마대를 쉽게 처리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잘 되기도 했다.
그리드, 템빨단과의 관계는 지금 이 순간부터 정립시켜감이 옳다고 아레스는 생각했다.
“장난 좀 쳤다고 삐지기는. 영웅치고는 은근히 속이 좁군. 남자는 마음이 넓어야하는 거 아닌가? 나처럼! 껄껄!”
입을 다물어버린 그리드를 아레스가 놀려먹기 시작했다. 나이 먹은 아저씨... 아니, 그 유명한 아레스 군단의 수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벼운 행동이었다.
‘우리를 방심시키려고.’
‘연기하는 건가?’
지슈카와 유페미나가 아레스를 경계하기 시작하는 그때.
“하아....”
스캇이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 꼴이 마치 그리드와 함께 있을 때 라우엘 같았다.
머쓱해진 지슈카와 유페미나가 뺨을 긁적였다.
아레스가 어떤 인물인지 대강 파악한 것이다.
***
호걸 아레스는 그리드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또한 템빨단, 템빨국의 힘이 장기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동맹, 비록 강제로 맺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기왕지사 오래 유지되길 바랐다.
하여 자신 또한 그리드를 진심으로 대면했다.
“아직은 좀 많이 부족해 보이지?”
아레스 성, 중앙 연병장.
아레스가 이번에 새롭게 육성한 1만의 강병을 공개했다.
“아직 강병 육성 스킬 레벨이 2밖에 안 되서 특성을 총 20종류밖에 귀속시키지 못했어. 병사들의 시작 레벨도 200에 불과하지. 뭐, 철갑귀마대의 시작점과 비교하면 훨씬 낫지만. 하하하!”
“.....”
그리드 일행과 아레스 군단원 모두 넋이 나가버렸다.
타인에게 자신의 스킬과 새로운 군대를 공개하는 아레스의 행태가 그만큼 황당했던 것이다.
“저, 정신 나가셨습니까?”
할 말을 잃고 있던 스캇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어째서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에게 자신의 패를 공개하는 것인지,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아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친구들은 이미 내 능력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을 걸? 애초에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능력을 굳이 감추려고 노력해서 뭐해? 미리 까발리고 잘난척하는 편이 낫지. 껄껄!”
“하.... 후우우....”
씩씩.
거칠어지는 숨결을 간신히 억누른 스캇이 깊은 한숨을 토했다.
평소의 냉정한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안색이 초췌해진 그를 보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리드가 질문했다.
“특성은 스킬과 별개죠? 스킬은 몇 개나 습득시켰습니까?”
“어디 보자... 고급 기마술이랑 고급 헤비 아머 마스터리, 그리고 중급 웨폰 마스터리랑 하급 안티 매직 실드를 습득시켰지. 아, 거기에 하급 돌진기도 넣어줬고. 적지? 아무래도 고급 스킬을 2개나 넣다보니까 스킬 슬롯 소모가 컸거든.”
“....농담 아니고 진짜에요?”
Satisfy에서 플레이어가 군대를 육성하는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최소 <영주>직위를 가지고 영토에 <병영>을 건설, 자본과 백성을 투자하여 병사를 생산하는 방법이다.
병영의 레벨에 따라서 생산되는 병사의 레벨과 병종, 스킬 수준이 달라진다.
1세기 전에 흥행했던 스타X래프트처럼 자원만 투자하면 알아서 병사가 생산되었기 때문에 편리하지만, 생산할 수 있는 병종에 한계가 있고 스킬 수준과 레벨이 낮다는 단점을 지녔다.
두 번째로는 플레이어 본인이 직접, 혹은 휘하 NPC에게 지시하여 병사를 징집하고 단련하는 방법이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써야하기 때문에 손이 무척 많이 간다. 돈도 더 들었고 시간 소모도 컸다.
하지만 병사에게 원하는 스킬을 골라서 습득시킬 수 있고 병사들의 레벨이 훈련 과정에서 꾸준히 올랐다.
결론적으로 그리드는 전자와 후자 모든 방법으로 병사들을 생산했다.
전자의 방법으로 생산하는 병사들은 치안대 등의 하급 부대에 배치시켰고 후자의 방법으로 생산하는 병사들은 정예 군단으로 육성했다.
특히 아스모펠과 피아로가 육성하는 병사들은 높은 레벨과 다양한 스킬 습득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별도의 특성은 인위적으로 부여하기 어려웠고 훈련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피아로가 훈련시킨 병사들은 ‘논밭 지형 적응률 120퍼센트 상승’이라는 특성을 부여 받는다.
어쨌든 결론은.
‘아스모펠과 피아로가 직접 육성하는 병사들조차도 수십 가지 종류의 특성을 습득하는 건 불가능하고 고급 스킬은 아예 갖지 못해.’
스킬은 일단 초급부터 습득해서 그걸 꾸준히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게 병사다.
한데 아레스의 병사들은 처음부터 고급 스킬을 갖고 있다.
아레스의 능력은 알면 알수록 위대한 것이었다.
“개사기... 험험, 대단하군요. 하지만 대신에 제약이 큰 스킬이겠죠?”
“나한테 너무 불리한 건 비밀로 하겠네. 하하!”
“...아니, 알려줄 거면 다 알려주지. 대범한 건지 쪼잔한 건지 모르겠네.”
“대범하면서도 철두철미한 거지.”
“.....”
어느새 그리드는 아레스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지슈카, 유페미나, 폰, 레가스 또한 아레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하며 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반면 아레스 군단원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템빨단은 필시 의지해도 좋을 상대다.
하지만 영원히 의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언젠가는 대립하게 될 테니까.
그래, 잠재적인 적이다.
한데 그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너무 서슴없이 내어주는 거 아닌가?
‘심지어 그리드는 크라우젤과 친구라고!’
크라우젤에게까지 아레스의 정보가 노출되었다가는 여러모로 불리해질 가능성이 크다.
염려하는 군단원들의 눈치를 살핀 아레스가 그리드에게 물었다.
“어때? 내 군대에 자네의 아이템이 합쳐지면 엄청날 것 같지 않나?”
“호오...”
아레스가 육성한 최강의 군대가 그리드가 제작한 최강의 무구를 사용한다면?
“제국군? 우리가 잘근잘근 씹어 먹을 걸? 물론 지금 당장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하!”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를 얻고 싶다.
아레스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힘과 그리드의 힘이 융합되는 순간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군단이 탄생할 거라 믿었다.
“친하게 지내보자고.”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악수를 건네 오는 아레스.
순간 그가 발산하는 위엄은 그리드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동네 흔한 아저씨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곰처럼 큰 체구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병사들을 육성하고 통솔하는데 특화된 사람이니만큼 위엄 스탯이 높은 건 당연하겠지.’
정확한 클래스명이 도대체 뭘까?
의문은 잠시 접어둔 그리드가 아레스의 악수를 건네받았다.
“좋아요, 잘 지내봅시다.”
***
벨토 왕성.
“굼벵이 새끼들, 어지간히도 늦는군.”
왕좌에 앉은 자는 국왕이 아니었다.
녹색의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창백한 피부의 마른 사내 아그너스였다.
빙글빙글.
보석이 박힌 화려한 관이 아그너스의 손가락 끝에 걸린 채 회전한다.
벨토 왕국의 지존을 상징하는 왕관이 한낱 노리개로 전락한 모습이었다.
분노할 새도 없이 눈치만 살피고 있던 벨토 국왕이 아그너스에게 조심히 물었다.
“각 요새에 배치해놨던 모든 병력을 왕성으로 소집했습니다. 이로써 적은 이곳 왕성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진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자칫 위험한 것이 아닐까요?”
요새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에 건설한 방어 시설을 뜻한다.
일반적인 전쟁에서 요새의 가치는 무척 컸다. 적군의 발을 묶고 격퇴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설이었다.
한데 아그너스는 요새를 폐쇄시켰다. 적군이 왕성에 거침없이 진군할 수 없게끔 환경을 마련했다.
벨토 국왕과 대소신료들은 아그너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눈치를 살피고 있는 그들에게 아그너스가 흰 이를 드러내보였다.
“왕국의 모든 군대를 왜 이곳으로 집결시켰는지 궁금해?”
“그, 그러하옵니다.”
아그너스의 가슴에 달려있는 분홍장미 휘장이 대소신료들의 눈길을 자꾸만 사로잡고 있었다.
제국 제2의 권력자라는 황비 마리의 직할 기사단, 로즈 나이트를 상징하는 휘장.
벨토 국왕과 대소신료들이 봤을 때 아그너스는 황비 마리의 최측근이었다. 이런 거물이 직접 자신들을 도와주러 왔으니, 솔직히 의지는 되었다.
반역자의 손에 허무히 살해당하는 것보다야 권력자에게 멸시당할지라도 살아남는 것이 맞다 보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그너스는 그들이 의지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 새끼들이 여기까지 빨리 오면 좋겠어서.”
“...?”
“기다리기 지루하잖아? 그러니까 길을 열어준 거야. 빨리 오라고. 큭큭~ 시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편하기도 하고 말이지.”
“아, 아아.....”
신성한 왕도를 전쟁터로 전락시키는 이유가 고작 그거였다고?
벨토 왕국과 대소신료들이 치를 떨었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그들에게 아그너스가 당부했다.
“적군이 도착하는 즉시 저항하지 말고 성문을 열어라. 적에게 병사들과 백성들을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거야. 알았지? 킥! 킥킥! 푸하하하하핫!!”
“마, 말도 안 되는...!”
결국 참지 못한 일부 귀족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오! 당신이 마리 황비의 뜻을 대행하고 있다는 것도 못 믿겠소!”
“맞소이다! 적군에게 저항하지 말고 성문을 열어주라니? 병사들과 백성들을 먹잇감으로 던져주라니!! 그게 무슨 미친 헛소리란 말이...! 허억!”
떠들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자코 듣고 있는가 싶던 아그너스가 리치를 소환한 까닭이었다.
딱. 따닥. 딱딱딱딱!
망토를 두르고 무시무시한 마력을 내뿜으며 등장한 리치가 연신 턱을 움직인다. 왠지 모르게 다급해 보인다.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듯한 느낌.
“죽여.”
아그너스가 명령했고,
콰아아아아아앙-!!
리치는 자신의 의지와 달리 마법을 쏘아 귀족들을 공격했다.
[벨토 왕국의 귀족을 살해하였습니다.]
[바알의 계약자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이끌어내는 존재입니다.]
[벨토 왕실과 귀족들이 당신에게 적개심을 품지 못하고 당신을 더욱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일부 인물들은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당신에게 항거하겠노라 뜻을 품습니다.]
“킥? 더 죽여.”
콰르르르르릉!!
주인의 뜻에 반하지 못하고 살생을 계속하는 리치의 이름, 무무드였다.
해골에 표정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는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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