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20화
“어째서 기사 소환 스킬을 쓰지 않는 거지?”
세계 각지에서 TV를 시청 중인 템빨단원들이 초조해졌다.
그들은 그리드가 지금에라도 당장 기사들을 소환, 템빨왕의 진정한 위엄을 보여주길 바랐다.
그래, 그리드는 왕이다.
굳이 1대1 승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그의 병사들이, 그의 기사들이 그의 적을 물리쳐줄 것이며 이야말로 왕의 위용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왕의 입지를 이용하지 않고 불리한 싸움을 고수하고 있었다.
“피아로 님만 소환해도 충분할 것을 왜...”
“만약 그리드가 패배하기라도 했다가는 템빨왕의 위명에 금이 갈 텐데...”
의문을 느끼며 초조해하는 템빨단원들.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템빨단 2군 소속이었다.
그렇다.
그리드가 공작위를 얻은 이후에야 템빨단에 합류한 이들은 아직 그리드를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공작 그리드와 국왕 그리드는 자신보다 세력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행동하는 위인이었으나, 그것은 본성을 간신히 억누른 모습이다.
그리드의 실체는 이기적이다. 또한 욕심이 많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트라우마도 강하다.
그는 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1대 1 승부에서 기사들을 소환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
‘제길, 설마 정면으로 맞서올 줄이야.’
아그너스에게 초연(超聯)을 사용하기에 앞서서, 그리드는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삼겹갑 등의 물리 저항 특화 방어구 세트로 스왑했다.
초연(超聯)이 방출하는 검기는 총 20가닥이며 하나하나의 위력이 무척 뛰어난 바.
이미 방송에서 수차례 선보인 초연(超聯)을, 사람들은 그리드의 필살기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건 당연히 아그너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리드는 판단했다.
하여, 그리드는 아그너스가 초연(超聯)을 크게 경계하리라 보았다.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무조건 피하고 리치의 마나 실드로 방어를 시도, 동시에 데스나이트로 역습해올 거라고 계산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아그너스의 리치는 그리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무려 더블 캐스팅으로 그리드의 초연(超聯)을 상쇄시킴과 동시에 역습을 가해온 것이다.
“쿨럭! 쿨럭!!”
초연(超聯)의 폭풍을 해치고 날아온 아이스 블래스트에 적중당한 그리드.
가슴에 달라붙은 얼음이 유발하는 상태이상 빙결에 저항하고 황급히 물약을 꺼내 마신다.
피에 젖은 그의 미늘갑옷을 훑은 아그너스가 콧방귀 뀌었다.
“실력이 없으면 차라리 우직해야지. 어디서 되도 않는 예측을 하고 제 무덤을 파는 거냐?”
아그너스는 또다시 그리드에게 실망했다.
오늘 처음 본 리치의 전투력을 멋대로 측정하고 스스로 손해를 입는 그리드의 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크라우젤처럼 분석력과 센스가 좋은 것도 아닌 주제에... 하! 이제 와서 보니 크라우젤 그것도 어지간한 병신 새끼였군! 너 따위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아그너스가 더블 캐스팅 이후 잠시 멈춰있는 리치 <만부>를 후위로 물렸다.
만부는 아그너스가 소유한 리치 중에서 캐스팅 속도가 가장 빠르지만 마나 총량이 낮아 장시간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끝내라, 카오.”
아그너스가 그리드로부터 등을 아예 돌렸다. 그리고 태산처럼 커다란 몸집을 지닌 데스나이트 <카오>에게 명령하자 카오가 보랏빛 안광을 번뜩였다.
카오는 오크족에서 10손가락에 꼽히는 전사의 시신으로 만든 데스나이트.
다소 둔한 감은 있지만 월등한 체력과 공격력을 자랑한다.
녀석이라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리드를 가볍게 격파하리라고 아그너스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자존심을 짓뭉개기에 충분한 판단이었다.
“아까부터 쫑알쫑알... 말 한 번 더럽게 많네.”
만부의 마법을 허용하는 바람에 생명력이 1만대로 떨어져버린 그리드.
위태로운 생명력 게이지가 무색하게도 그의 얼굴에서는 좌절을 엿볼 수가 없다.
당연하다.
그리드는 아직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았으니까.
좌절은 모든 걸 잃은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비록 불사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리드에게는 아직 남은 패가 많았다.
“흑화.”
키잉-!
레전드리 등급의 액세서리 <다크버스의 귀걸이>에 깃든 변신 스킬, 흑화.
재사용 대기 시간이 12시간이나 되는 반면 지속 시간은 5분에 불과한 스킬이다.
사용에 제약이 크다는 뜻.
그리고 제약이 큰 스킬은 위력이 강하게 마련이다.
쿠와아아아앙!!
폭발하는 마기!
그리드의 구릿빛 피부가 하얗게 질렸고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마기를 몸에 두르고 거친 숨을 내뿜는 그리드의 모습, 악마 그 자체였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적에게 공포와 절망을 안겨 준 흑화 버전 그리드의 등장인 것이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해설진과 시청자들이 흥분하는 반면.
“너 따위가 조금 더 강해진다고 해서, 뭐?”
아그너스는 콧방귀만 뀌었다.
흑화의 사용과 동시에 상승한 민첩성을 기반으로 잽싸게 덤벼오는 그리드를 데스나이트 카오로 요격했다.
쩌어어엉-!!
보랏빛 검광을 흩뿌리는 카오의 대검이 그리드의 가슴을 힘껏 때렸고,
[데스나이트 카오의 공격으로 대상에게 1,94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뭐?”
아그너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아그너스 본인조차 모른다.
Satisfy에서 자신이 이토록 놀란 경험, 생전 처음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는 크라우젤을 처음 만난 날조차 이렇게 놀라진 않았다.
‘데미지가 2천도 안 박혔다고?’
카오의 공격을 맞아주면서 그대로 전진, 거리를 코앞까지 좁혀오는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는 아그너스의 동공이 떨린다.
삼겹갑, 란스티어의 망토 등을 무장하여 물리 저항력을 극단적으로 높인 그리드의 방어력은 그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놈...!”
아그너스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순수하리만큼 도발적이고 난폭한 그리드의 눈빛을 응시한 채 손끝으로 폭발의 기운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는 그 기운을 방출할 수 없었다.
손을 휘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制).”
“...!!”
강력한 억제력.
아그너스는 움직일 수 없었고 저도 모르게 그리드로부터 뒷걸음치게 되었다.
황급히 그리드의 뒤를 쫓아온 데스나이트 카오가 연신 검을 휘둘러보지만.
[데스나이트 카오의 공격으로 대상에게 1,67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데스나이트 카오의 공격으로 대상에게 1,91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데스나이트 카오의 공격으로...]
....
..
인간족보다 기본 능력치가 뛰어난 대신 스킬 보유량은 적은 오크족 카오.
뚜렷한 공격 스킬 없이 평타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녀석으로서는 그리드를 막을 수 없었다.
“큭....!”
신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는 아그너스.
퍽! 퍽! 퍽!
카오에게 연신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무시하고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눈빛에 실린 살기를 적나라하게 느끼고 이를 악 문다.
“짜릿...해!!”
서걱-!!!
마기가 깃든 +9실패작이 아그너스의 몸을 사선으로 베어버렸다.
극(極)이었다.
[35,4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나 실드가 작동 중입니다. 생명력 손실을 마나 손실로 대처합니다.]
[극상의 마나 물약을 복용합니다.]
“커윽...! 허억...!!”
크게 베이고 휘청, 쓰러질 듯하다가 간신히 똑바로 서는 아그너스의 입으로부터 가쁜 숨이 토해진다.
쉴 틈 없이 다음 공격을 이어오는 그리드를 확인한 그가 결국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큭....! 크하하하하하핫!! 기대에 못 미친다고는 하지만 과연 크라우젤을 쓰러뜨린 놈이라 이건가!!”
그래, 싸움은 이래야 재밌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순간 죽게 된다는 위기감!
지독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쾌감이 솟구친다!
“베라딘! 아레스는 네놈에게 맡기마!!”
소리친 아그너스가 아레스의 견제를 맡겨두었던 데스나이트 <둠>과 리치 <에이미>를 소멸시켰다.
<지배력>스탯의 여유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유?
지배력을 대량 점유하는 초월급 사역마를 소환하기 위해서다.
“리치 소환, 무무드!!”
쩌적.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틈새에 존재하던 공간이 거짓말처럼 갈라졌고,
키에에에에에에에-!!
괴물의 포효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갈라진 공간으로부터 무지갯빛 마력이 솟구쳐 나왔다.
-피해라!
아그너스에게 결정타를 먹이고자 극살(極殺)을 전개 중이던 그리드의 귓가로 브라함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양반 가람이 등장하기 직전의 반응과 같았기에, 그리드의 경계심은 극한까지 끌어올려졌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피해!’
검무의 전개 도중이었다.
바로 코앞에 생성된 블랙홀 같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마법을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드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을 그냥 맞아주고, 극살(極殺)의 전개를 끝내 아그너스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
동귀어진을 노린단 말이다.
과연 둘이 같이 죽을지, 아니면 둘 중 한 명만 죽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극살...!”
무지갯빛 마력이 그리드의 턱에 닿기 직전.
그러니까 검무의 전개를 끝낸 그리드가 실패작으로 아그너스를 베어버리기 직전.
[★히든 퀘스트★ <브라함&무무드>가 생성됩니다!]
“...?!”
“...!!”
허공에 얽혀있던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두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같은 퀘스트를 획득한 둘은 각자 다른 알림 창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무드의 영혼을 감지한 브라함이 불타는 열망을 품습니다. 자신의 영혼 파편을 소모하여 <동화>를 강제 발동시킵니다.]
[브라함의 영혼과 하나가 됩니다. 육체의 주도권을 브라함에게 양도... 실패합니다.]
[영혼 파편을 소모한 브라함의 정신적 타격이 무척 큽니다. 브라함의 영혼이 잠들어버렸습니다. 동화 상태의 육체를 당신이 직접 제어해야합니다.]
[브라함의 근본적인 능력이 약화됩니다.]
[당신의 클래스가 <대마법사>로 변경되고 능력치가 재조정됩니다.]
[브라함은 무무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무드의 리치의 HP를 30퍼센트까지 깎고 무력화시키십시오.]
몸에서 마기가 빠져나간다.
흑단 같던 머리카락이 눈처럼 하얗게 새었고, 밤하늘을 머금은 호수 같았던 눈동자는 홍옥처럼 붉게 물들어간다.
“윽...! 브, 브라함....!”
끓어오르던 육체의 힘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마력이 충만해지자 잠시 적응하지 못한 그리드가 휘청거렸고.
[브라함의 영혼을 감지한 무무드가 사무치는 증오를 느낍니다. 당신에게 저항하는 마음으로 억제해놓았던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해방합니다.]
[리치 무무드의 레벨이 400으로 상향 조정됩니다.]
[무무드를 제어하여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과 맞서 싸우십시오. 무무드에게 새로운 전설의 칭호를 안겨주십시오.]
[브라함을 쓰러뜨리고 무무드의 원한을 해소시켜준다면, 앞으로 무무드는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될 것입니다.]
“핫...! 키하하하하하하핫!!”
아그너스는 그저 너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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