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18화 (513/1,794)

템빨 32권 - 16화

“.......”

그리드는 역시나 똥 밟았구나 싶었다.

신속 장갑의 내구력과 방어력이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수준 미달이었고, 귀속된 옵션 또한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명백한 쓰레기 아이템으로 보인 것이다.

‘파그마가 이딴 걸 만들었다고?’

그리드가 여태껏 목도해온 파그마의 작품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크게 대단하지 않다. 도리어 지금의 그리드가 제작하는 아이템들이 더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파그마의 실력에 의문을 품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제까지 그리드가 본 파그마의 작품들은 아직 전성기에 도달하기 전. 그러니까 성장 과정에 놓여 있던 파그마가 제작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의 파그마가 제작한 작품은 필시 대단할 거라는 믿음이 그리드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번헨 열도에 머물 당시 파그마는 말년이었다. 절정의 시기였던 것이다.

한데 알렉스의 신속 장갑을 보라!

절정의 파그마가 제작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바알과 계약한 대가로 대장장이 능력이 약화되기라도 했나?’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의심은 금방 접었다.

“....엥? 3배??”

한 줄로 서술된 신속 장갑의 옵션 내용을 확인한 그리드가 멍청한 얼굴로 두 눈을 껌뻑였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을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헐....”

공격 속도를 2배도 아니고 무려 3배나 높여 준다니?

‘심지어 확률성 아이템도 아니야?’

그렇다.

신속 장갑은 공격 속도를 항시 3배 높여주는 역대급 오버 파워 아이템이었다. 확률적으로 5회 연속 공격이 발동하는 성스러운 빛의 장갑보다 데미지 기댓값이 훨씬 더 높았다.

“아니, 그건 아니구나.”

신속 장갑이 올려주는 공격 속도는 ‘일반 공격’에 적용된다고 확실히 명시되어 있었다.

일반 공격이란 소위 말하는 평타다.

신속 장갑의 공속 3배 상승 옵션은 평타에만 적용된다는 뜻이 된다.

스킬에까지 5회 연속 공격이 적용되는 성스러운 빛의 장갑과는 용도가 완전히 달랐다.

“무아검 만들기 전에 이걸 먹었으면 딱히 좋다고 느끼지 못했겠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평타보다 스킬에 의존한다. 스킬 데미지가 평타 데미지보다 적게는 수 배에서 크게는 수십 배까지 높았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물론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리드는 도리어 더했다.

최상급 공격 계수를 지닌 레전드리 스킬 <파그마의 검무>를 보유한 그리드는 스킬 데미지를 상승시켜주는 <실패작>을 주력 무기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스킬 데미지였다. 평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만든 시점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귀속된 <검은 불꽃>은 일반적인 액티브 스킬 이상의 위력을 과시했고, 심지어 그 불꽃은 평타를 때릴 때도 발동했다.

그리드는 검은 불꽃의 잦은 발동을 바라야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저 한 번이라도 더 많은 공격을 날림으로써 검은 불꽃의 잠재력을 폭발시켜야 했다.

현 시점에서 일반 공격 속도를 3배나 상승시켜주는 신속 장갑을 획득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인 셈이었다.

“크흐흐흐...”

그리드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렸다. 너무 기쁜 나머지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제작함으로써 ‘최강의 평타러’로 등극하자마자 ‘평타 한정’으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장갑을 획득하였으니 기뻐할 만도하다.

그리드는 막말로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어쩜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지...? 헉.”

중얼거리던 그리드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살면서 이런 대사를 뱉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생소했다.

“설마 말세는 아니겠지?”

그리드의 기쁨과 의심은 비례했다. 그는 혹시 꿈이 아닐까 싶어서 뺨을 몇 번이나 꼬집어보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실이었다.

“....로또 사볼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드!

눈에 띄는 ‘오렌지색’ 신속의 장갑을 흡족한 표정으로 쓰다듬는 그의 눈빛이 더없이 인자하다.

‘심지어 색도 참 예쁘네.’

무려 오렌지색 장갑이다.

그리드가 평범한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면 촌스럽다고 아쉬워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리드는 평범하지 않았고 오렌지색 장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꾸준히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이해도를 100퍼센트까지 올리고 양산에 도전해봐야겠어.’

란스티어의 망토를 양산해서 마안족 왕국에 지원해주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런 식으로 양산해야할 아이템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음에 그리드는 뿌듯했다.

주섬주섬.

인벤토리에 장갑을 챙겨 넣은 그가 다음으로 마법 공학 총을 꺼냈다.

‘과연....’

마법 공학 총 또한 장갑처럼 최상급 아이템일까?

기대해보던 그리드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신속의 장갑이 너무 좋은 게 문제였다.

‘개쩌는 아이템이 2개 연달아 나올 리가 없지.’

일반적으로 그렇다.

대부분의 보스 몬스터들은 코어 아이템을 하나만 드롭할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서 레전드리 아이템을 이미 하나 드롭했다면, 나머지 아이템은 유니크 이하 등급으로 드롭하는 식이었다.

벨리알의 경우를 생각하면 쉽다.

그녀가 드롭한 신화급 아이템은 단 하나였다.

물론 코어 아이템이 무조건 하나만 드롭되는 건 아니다. 99퍼센트의 확률로 그럴 뿐이고, 그리드는 1퍼센트의 확률을 뚫을 자신이 없을 뿐이다.

그는 신속의 장갑이 이미 레전드리 등급이었으므로, 남은 마법 공학 총은 유니크 이하 등급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그리드의 예상은 맞았다.

딱 절반만. 그래, 반만 맞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안목으로 대상 아이템을 관찰합니다.]

[아이템에 숨겨진 기능이 있을 경우 이를 발견합니다.]

띠링~

<(파그마가 제작한)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검>

등급:유니크(성장형)

내구력:599/1,260

*피스톨 모드

공격력:870

-마나 정제 속도:+60%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5회 적중시킬 때마다 20퍼센트 확률로 상태이상 유발.

*라이플 모드

공격력:1,416

-마나 정제 속도:-15%

-연사 속도:-20%

*바요넷 모드

공격력:1,067

-찌르기 공격력:+50%

-콤보 달성 시마다 추가 데미지.

-소드 마스터리 스킬 적용 가능.

★스나이퍼 모드

공격력:확정 즉사

조준에 소요되는 시간:10초~2분(거리에 따라서 다름)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모드 변환은 4초에 한 번씩만 가능합니다.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가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로 제작한 마법 공학 총검입니다.

파그마에게 영감을 주었던 밀뤠프는 물론 그 어떤 드워프 장인도 구현하지 못한 저격총 변환이 가능한 총검으로써, 무수히 많은 드워프들을 매료시킬만한 작품입니다.

사용 조건:데빌 슬레이어

무게:3,050

“거봐 유니크 등급 맞....잖아?”

등급은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근데 성장형이다.

‘....심지어 유라가 사용 중인 마법 공학 총검의 상위호환 버전.’

그것도 몇 배나 더 뛰어나다.

2연속 득템을 달성한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좋아, 이건 유라한테 팔자.’

직접 사용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품지도 않는 그리드였다.

등급 성장형 아이템의 경험치를 올리는 일이 얼마나 귀찮고 험난한지,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오 이런 썩을, 아이템 경험치 더럽게 안 오르네.”

네임드 보스를 레이드하고 획득한 쌍도끼 등급을 이제 막 레어로 성장시킨 반트너가 투덜거렸다.

다른 템빨단원들이 그를 위로했다.

“아이템 경험치가 원래 잘 안 오르더라고. 그렇게 노가다를 했는데도 레어 등급으로 올리는데 보름이 넘게 걸리더라. 유니크 등급까지 성장시키려면 몇 달,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시키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겠어.”

최근, 최상위 랭커들 사이에서 ‘등급 성장형 아이템’ 바람이 불고 있었다.

300레벨 후반대 보스 몬스터들이 등급 성장형 아이템을 심심치 않게 드롭하였는데, 그 성장 잠재력이 가히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곧 상대하게 될 400레벨대 몬스터들에게 대비하라는 메시지 같았다.

하지만 물론 현재 시점에서는 기대치만 높을 뿐이다.

보스 몬스터들이 드롭하는 등급 성장형 아이템은 대부분 노말~레어 등급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당장은 위력이 약했고, 지금 당장 주력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컸다.

“그러고 보니까... 그리드가 엘핀스톤의 반지를 얻은 지 1년이 다 돼갔지?”

“넘었을 걸? 티라멧의 허리띠를 얻은 게 아직 채 1년 안 됐을 거고.”

“미친.... 근데도 아직 레전드리 등급을 못 찍은 거야? 아이템 경험치 올리기가 대체 얼마나 빡센 건지 상상조차 안 되네.”

반트너는 벌써 보름 넘도록 궁극의 노가다를 진행 중이었다.

쌍도끼의 등급을 높이기 위해서, 지난 보름 동안 골렘처럼 튼튼한 몬스터만 찾아 하루 종일 쥐어 패왔다. 300레벨대 몬스터를 노말 아이템으로 후려쳐서 사냥했다는 뜻이다. 정말로 개무식한 노가다였다.

한데, 그토록 개고생을 해도 아이템 경험치가 쉽게 오르질 않았으니 반트너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그리드를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나도 이렇게 초조한데 그리드는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가 있는 거지?”

만약 자신이 그리드였다면, 현재 유니크 등급에 멈춰있는 성장형 아이템을 어떻게든 빨리 성장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유니크 등급이 거슬린다. 빨리 레전드리 등급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오직 이 생각만 품고,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한 채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아이템 경험치 노가다에만 몰두할 것 같았다.

한데 그리드는?

아이템 등급에 대해서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엘핀스톤의 반지, 티라멧의 허리띠, 이야루그트와 갓 핸드에 이르기까지.

그리드는 엄청난 등급 성장형 아이템들을 보유한 것과 비교해서 아이템 경험치 노가다에 집착하질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특히 갓 핸드를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시키는 순간 그리드는 폭발적으로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비단 반트너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리드의 입장이었다면 갓 핸드의 경험치 노가다에 집착했을 것이다.

“근데 그리드는 안 그런단 말이지... 설마 걔 목석인가?”

생각해 보니 여자관계에서도 목석같은 그리드였다.

세계 최고의 미녀들이 그렇게 좋다고 어필을 해도 무덤덤했다.

기이할 지경이다.

의아해하는 반트너에게 이벨린이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리드 형은.... 그냥 별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요?”

“......”

확실히, ‘천재’의 범주에 들어가는 템빨단원들의 관점에서는 그리드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일의 우선순위를 비효율적으로 두는 모습이 허다했고 그때마다 무슨 생각인지 의문이 들곤 했다.

그래서일까?

그리드가 아무 생각 없는 것 같다는 이벨린의 의견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골똘히 생각해보고 있는 그때였다.

“예끼!!”

등급 성장형 한손 검의 경험치를 올린답시고 바위를 때려보고 있던 극검이 버럭 성을 냈다.

“감히 갓리드한테 생각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너희가 갓리드였어봐! 너무 바빠서 아이템 하나하나에 집착할 겨를이 없었을 거라고! 갓리드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과 달라! 왕이라고, 왕! 대한민국이 낳은 왕!!”

“.....”

아니, 정작 왕의 업무는 라우엘이 혼자서 다 도맡아하고 있지 않나?

라고, 태클 걸고 싶은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잠자코 있었다.

애초에, 무엇이 진실이든 템빨단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어떻게 행동하고, 무슨 생각을 하든지 -설사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리드를 존중하고 존경했다. 쉬지 않고 발전하는 그리드를 보고 있노라면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