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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26화 (521/1,794)

템빨 33권 - 2화

재차 공격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기스가 채광 중입니다. 채광 중의 기스는 무적입니다. 피해를 입히지 못했습니다.]

“아오, 진심 역겹네.”

64번 섬을 특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드는 번헨 열도 자체에 혐오감을 느꼈다.

번헨 열도를 구성하고 있는 66개의 섬 모두 저마다 특색을 가지고 특별한 공략법을 요구하였으니 무척 피곤하고 짜증이 치밀었다.

“뭐, 몇 군데는 쉬웠지만....”

이 중얼거림, 번헨 열도에 도전한 경험이 있는 다른 플레이어가 들었으면 황당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 번헨 열도를 ‘쉽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그리드와 다른 플레이어의 차이다.

그리드는 실시간으로 아이템을 창조하고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남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번헨 열도를 클리어해 왔다.

투명 후드 집업 덕택에 손쉽게 클리어했던 지옥달 스테이지가 단편적인 예다.

한데 그런 그리드조차도 번헨 열도의 평균적인 난이도를 무척 높다고 체감하고 있었다.

번헨 열도의 난이도가 얼마나 지옥 같은지 여실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걸 어쩌지.”

채광 중에는 무적 상태에 돌입하는 전설의 광부 기스.

느릿느릿한 채광 속도를 보아, 그가 광산의 광물을 모조리 채광하려면 족히 한 달 이상은 걸릴 듯하다.

64번째 섬 도전자는 한 달 이상 이곳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장 그리드에게 남은 식량은 4일치밖에 없었다.

“....XX.”

그리드가 오래간만에 강도 높은 욕설을 지껄였다.

문득 서러워진 까닭이다.

“나 잡캐 아니었어?”

잡캐 맞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 직업 효과와 웨폰 마스터리 패시브를 보유한 덕분에 모든 종류의 무기를 활용할 수 있는 전천후 전투 직업 보유자였으며, 대장장이었고, 재단사였으며, 마법까지 쓸 줄 안다.

근데 요리는 못한다.

그리드는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하고 조리할만한 능력이 전무했다. 그리고 그 까닭에 굶어 죽게 생겼다. 서러울 수밖에 없다.

“난 진정한 잡캐가 아니었구나....”

결여된 단 하나의 능력 때문에 굶어 죽게 생기다니!

털썩!

무릎 꿇고 좌절하던 그리드의 뇌리가 갑자기 번뜩였다.

‘가만, 한 번 실험해 볼까?’

따앙- 따앙-

그리드가 옆에서 칼을 휘두르고, 욕을 지껄이고, 좌절을 하는 등 쌩쇼를 해도 무시한 채 천천히 곡괭이질 중인 기스.

녀석의 우람한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리드의 입가로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론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어.’

무엇이 가능하단 걸까?

꼼지락꼼지락!

힌트는 그리드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10개의 손가락에 있었다.

그렇다.

그리드는 손재주를 활용해 볼 심산이었다.

‘지금 내 손재주는 4천을 넘는다.’

여성은 물론 남성조차도 그리드가 손가락으로 콕- 한 번 찌르면 전류에 휩싸인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쾌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지려 버리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그 엄청난 손재주는 현실에서도 일부 적용될 정도였다.

그리드는 아이린과의 잠자리가 아닌 이상 의도적으로 봉인해 왔던 이 위험한 힘을 해방하겠노라 마음먹었다.

“아주 그냥 지려 버리게 만들어 주마...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무지 채광을 할 수 없게끔 말이야!”

번뜩!

눈을 빛낸 그리드가 기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곡괭이질 중인 녀석의 뼈마디들을 손가락으로 간질간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

따앙! 따앙!

무반응!!

기스는 그리드의 손가락에 유린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태도 변화 없이 곡괭이질에만 열중했다.

무려 4천이 넘는 그리드의 손재주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안 되나.”

상대가 너무 나쁘다.

언데드이기 때문에 쾌감이나 간지러움을 느낄 리 만무했다.

‘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그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난에 익숙한 인물이니만큼 좌절감을 극복한지 오래였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욕과 열정이 넘쳤다.

***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쓰셔야할 땝니다.”

그리드가 정화시킨 63번째 섬.

수정구를 통해서 그리드를 관찰 중인 스틱세이가 애타는 심정을 품었다.

“채광 중에 무적....”

전설의 광부, 기스.

그에게 발이 묶여 인계 강림에 실패한 대악마의 숫자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기스의 능력은 필시 대단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 정도로 좌절해선 안 됐다. 그리드는 번헨 열도 전부를 정화시켜야 한다는 사명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그리드 님, 무적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디 냉정하게 생각하고 기스의 약점을 찾아보십시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파그마가 어디 보통 영리한 인물이던가?

데스나이트 기스의 약점을 철저히 감추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당장 스틱세이만 해도 기스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채광을 멈추게끔 만드는 것이 관건일 듯한데.’

그리드가 뭔 짓을 해도 오로지 광물 캐기에만 열중하는 기스였다. 그가 채광을 멈추게 만든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어렵나....’

64번째 공략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다.

판단한 스틱세이가 선홍빛 입술을 질끈 깨무는 순간이었다.

따앙! 따앙! 따앙!!

수정구 속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를 꺼내더니 또 무엇인가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뭘 만드시는 거지?”

스틱세이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그 어떤 무구를 제작해도 기스의 채광을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잉?”

대현자 스틱세이가 체통을 잃었다.

체면도 잊고 황당하다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드가 제작한 새로운 아이템, 다름 아닌 곡괭이였기 때문이다.

“설마....”

과연 대현자.

스틱세이는 그리드의 의도를 즉시 파악했다.

“그, 그런 무식한 방법을....”

그리드가 곡괭이를 만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전설의 재단사 크루제에게 아이템 제작으로 응수했듯이, 전설의 광부 기스에게는 채광으로 응수하려는 의도인 게 분명했다.

‘기스가 무적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끔, 차라리 동굴의 광물을 모조리 캐버리시겠다 이건가...?’

아아, 어리석다.

정녕 무식한 발상이다!

“채광이야 누구나 가능한 행위라지만....”

전문 채광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채광 속도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법이다.

그리드가 제아무리 전력으로 채광을 하더라도, 지금 의도적으로 느리게 채광 중인 기스처럼 거북이 같은 속도를 발휘할 것이 뻔했다.

“아니?”

황당해하던 스틱세이가 멈칫했다.

그리드가 곡괭이를 여러 개 더 제작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잠시 후.

그리드는 지옥 제일의 마수 멤피스와 도플갱어를 소환하더니 그들에게 곡괭이를 던져주었다. 4개의 갓 핸드도 이미 하나 같이 곡괭이를 무장하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민망한 표정으로 소리친 그리드는 2마리의 해골까지 추가로 소환했다.

보통 스켈레톤보다 머리가 배는 크고 눈매가 사나운 것이 무척 귀여운 느낌의 해골이었다.

딱!

딱딱!

마치 그리드에게 애교를 부리듯이 턱을 맞부딪치는 2마리의 해골.

녀석들 또한 그 앙상한 손에 곡괭이를 쥐고 있었다.

“...물량빨....”

그리드는 템빨로도 부족해서 이제 또 새로운 빨의 전설을 세우려는 건가?

템빨국에 소속되어있다 보니 빨의 사전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스틱세이였다.

***

채광 동안 무적인 기스.

놈을 굶어죽기 전 4일 내에 공략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손재주까지 먹히지 않자 당황하며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드가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그래, 차라리 내가 동굴의 광물을 모조리 캐 버리자... 기스 저 자식이 더 이상 채광할 광물이 없어지게끔 말이야.”

실로 무식한 발상!

그리드는 <중급 채광 기술>을 보유한 극검조차도 족히 보름 이상 쉬지 않고 작업해야 할 정도로 거대한 동굴의 광물을 자신이 모조리 캐버리리라 결정했다.

그것도 4일 내에!

가능한 일인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리드가 예부터 가끔씩 채광을 해왔다고는 하나 공교롭게도 여전히 채광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신의 직업군과 거리가 먼 스킬을 강제적으로 습득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검사인 극검이 채광 기술을 습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노가다를 했을지 우리는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각설하고.

“할 수 있어.”

그리드는 현실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계획을 세워 놓고도 자신만만했다.

자신감에는 당연히 근거가 있었다.

“내게는 환상적인 곡괭이의 제작법이 있다!”

환상적인 곡괭이.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그리드가 극검을 위해서(?) 제작한 레전드리 등급의 곡괭이이다.

고급 광물과 최고급 광물 획득 확률을 높여주고 <중급 채광 기술> Lv.3을 생성시켜 주는, 이름 그대로 환상적인 곡괭이였다.

그 곡괭이만 있으면 다섯 살짜리 코흘리개조차도 채광의 달인이 될 정도!

“그걸 양산한다.”

시간이 촉박하다.

결정한 이상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즉시 휴대용 용광로를 꺼내고 백린목에 불을 붙이더니 철광석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대장장이가 처음으로 다루는 광물이 바로 철광석인 바, 그리드는 기본 중의 기본 광물이라고 할 수 있는 철광석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제련해 버렸다.

그리고.

따앙! 따앙!

모루를 펼친 그리드가 곧바로 곡괭이 제작에 돌입했다.

그가 제작할 곡괭이의 숫자는 총 8개.

이에 소요하는 시간은?

불과 2시간이 채 안 됐다.

크루제와의 전투에서 아이템 제작 속도를 높이는 수련을 쌓은 그리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곡괭이는 하급 대장장이들도 쉽게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제작 난이도가 낮기도 하고 말이다.

결과.

<양산형 환상적인 곡괭이>

등급:에픽

내구력:125/125 공격력:37

*고급 광물 획득 확률 3% 상승

*스킬 <초급 채광 기술> Lv.마스터 생성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대장장이 그리드가 환상적인 곡괭이의 제작법을 토대로 제작한 곡괭이입니다.

환상적인 곡괭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무척 우수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사용 조건:레벨 100 이상

무게:75

<양산형 환상적인 곡괭이>

등급:유니크

내구력:150/150 공격력:77

*고급 광물 획득 확률 3% 상승

*최고급 광물 획득 확률 1% 상승

*스킬 <중급 채광 기술> Lv1. 생성

....

...

“나쁘지 않아.”

그리드는 총 8개의 곡괭이 중 2자루를 레어 등급으로, 4자루는 에픽 등급으로, 2자루는 유니크 등급으로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성능은 뛰어났다.

물론 레전드리 등급의 환상적인 곡괭이와 비교하면 볼품없었으나 일반적인 곡괭이와 비교하면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노에! 랜디! 갓 핸드!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팟!

파파파파팟!!

소환사 계열의 클래스를 보유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숫자의 사역마를 거느린 그리드이다.

홀로 덩그러니 서있던 그의 주변으로 검은 고양이와 작은 소녀, 4개의 황금 손, 그리고 2마리 해골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갓 핸드야 거의 늘 항상 그리드와 함께해왔다지만 노에, 랜디, 템빨골들은 그리드를 오래간만에 만나는 것이다.

무척 반가워하는 녀석들에게 그리드가 곡괭이를 던져 주었다.

“자, 채광을 시작하자.”

“.....”

노에는 데자뷰를 느꼈다.

마안족들이 머물던 광산에서 채광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을 자꾸 이딴 곳에 써먹다니?

노에는 무척 서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서운해도 그리드가 좋았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냥!”

따앙! 따앙!!

눈물을 감춘 노에를 필두로 소환수들이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특히 그리드의 모습으로 변신한 랜디의 곡괭이질 솜씨가 눈부셨다.

녀석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확인한 그리드가 자신 또한 곡괭이질에 합류하며 기스에게 소리쳤다.

“네가 언제까지 무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4일 내로 모든 광물을 캐버리겠다!

의욕을 불태운 그리드가 열정적인 자세로 채광에 임했다.

퍼억! 퍼억!

따앙! 따앙!

곡괭이가 벽면을 후벼 파고 광물을 뽑아낼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그리드와 노에, 랜디는 얼굴이 금세 깜댕이가 되어버렸다.

전설의 대장장이이며 마법사이자, 검사이고, 일국의 왕인 그리드.

대악마들조차도 탐내는 지옥 제일의 마수 노에.

신비 숲을 지배하였던 최강의 도플갱어 랜디.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들이 숯 검둥이가 된 채 채광에 열중하는 모습, 사람들은 직접 봐도 믿지 못할 정도로 해괴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화려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상상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켈록켈록! 윽, 으으윽...! 야! 노예야! 먼지 안 날리게 조심해라.”

“냐앙... 알았다옹.... 근데 방금 노예라고 들린 건 착각인 것이냐옹?”

“다, 당연히 착각이지. 내가 너를 노예 취급할 리가 없잖아? 하하하.”

“.....”

그리드의 평상시 삶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 구질구질하고 처량했다.

주인 잘못 만난 노에와 랜디도 마찬가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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