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16화
[이벤트 맵에서 이탈하셨습니다! 전쟁 패배로 간주됩니다!]
[무패왕 전직 퀘스트 실패!]
[모든 능력치가 정상 수치로 회복됩니다. 스태미나 유지 패시브가 소멸합니다.]
[무패왕의 낡은 칼집과의 호감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패주인가. 목숨을 연명했을 뿐이로군. 그대는 짐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였다. 실망이로다.
“.....”
첫 번째 기사가 전장에 도착하기까지, 총 22일 내로 적기사단을 궤멸시킬 것.
오아시스가 부여 받은 무패왕 전직 퀘스트의 내용이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퀘스트 진행자를 제외한 플레이어 입장 불가’로 설정되었던 전장.
오아시스가 그곳에서 홀로 체험한 것은 절망과 좌절뿐이다.
‘역시 난 안 된다.’
오아시스는 근력, 체력, 민첩성에 스탯을 균등하게 투자한 밸런스형 전사이다.
퀘스트 혜택으로 부여받은 스탯 상승 10배 효과.
이로 인해 근력과 체력, 민첩성이 모두 1만을 돌파하였을 때까지만 해도 오아시스는 승산을 엿봤다.
자신의 일검에 잿빛으로 산화하는 적병들을 보면서, 자신이 드디어 세상의 주인공이 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솔로 넘버 나이트는커녕 15번째 기사부터는 단지 스탯빨만으로 싸워 이길 수 없었고, 오아시스가 적기사단에게 발이 묶인 사이 루반나의 병사들은 궤멸했다.
이때부터 쏟아지는 적군의 총공세에 오아시스는 완전히 무력화됐다.
일검을 뻗을 때마다 수십 회의 역습을 받아 균형을 잃고 공격에 실패하였으며, 수시로 연계되는 상태이상에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던 시간이 태반이다.
‘만약 내가 3차 전직만 했어도.’
스탯이 3차 각성을 맞이해서 스탯 10배 상승효과가 극대화됐을 것이고, 저항력이 대폭 상승하여 상태이상에 저항했을 확률 또한 높아졌을 것이며, 보다 다양한 스킬을 활용해서 능동적인 전투가 가능했으리라.
‘적기사는 전부 3차 전직자였고 솔로 넘버 나이트는 4차 전직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 싸움은 내게 너무 불리했어. 나 혼자만 2차 전직자였으니까. 아니... 다 핑계다!’
여태까지 3차 전직조차 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였고, 설령 3차 전직을 했더라도 부족한 센스와 컨트롤 실력에 발목을 붙잡혀서 솔로 넘버 나이트들에게 압도당했을 터이다.
특히 다섯 번째 기사부터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실력을 회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이봐! 기운 좀 차리라고!!”
철썩!
아레스의 말에 올라탄 채 상념에 잠겨있던 오아시스.
갑자기 날아오는 등짝 스매쉬에 화들짝 놀라며 번뜩 정신 차린다.
깊은 그림자가 드리운 그의 얼굴을 마주본 아레스가 활짝 웃어주었다.
“자네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해봤다. 아직 2차 전직자에 불과하다며? 한데 전설의 힘을 계승해서 저 괴물 같은 제국군을 홀로 상대하다니, 대단해. 정말 대단해. 자네는 우리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낸 거야. 희대의 인재로구만?”
“....제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퀘스트 혜택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퀘스트에 실패한 까닭에 전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됐죠. 희대의 인재? 말도 안 됩니다. 희대의 범인이겠죠.”
힘없는 목소리로 설명하는 오아시스의 얼굴에 조소가 걸린다.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그런 슬픈 미소였다.
“실패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애초에 자격도 없는 제가 어찌 전설의 힘을 계승하겠습니까. 당신 같은 천재라면 또 모를까.... 이번 퀘스트를 계기로 당신을 뵙게 된 것만으로 저는 감지덕지합니다. 아니, 영광입니다. 더 이상 소원이 없군요.”
“예끼!”
퍽!
“컥!”
아레스가 다시 한 번 등짝을 때리자, 오아시스는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아레스의 등짝 스매쉬는, 레벨이 200 중반대를 갓 넘었을 뿐인 오아시스의 목숨을 위협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아레스가 현재 5만 명의 군세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그 앞에 1,000만위대 랭커는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맨 손으로 때려죽이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레스는 오아시스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이는 존중이다.
“정녕 자격도 없는 사람이 전설에 다가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자네, 쓸데없이 겸손하구만? 하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뭐? 운? 푸하하핫!! 돌이켜보게. 자네가 그저 먹고, 놀고 있었을 뿐인데 무패왕과 접점이 생겼던가?”
“.....”
“운이 아니라 실력이야. 자네가 낮잠이나 자고 앉았는데 하늘에서 떡, 하니 무패왕과의 접점이 생긴 거라면 또 몰라도.”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신 같은 분께서 친히 저를 도와주시는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위안까지 주시다니, 뭘 바라는 거죠? 제가 당신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엥?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그야 당연히 자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렇지. 나 말이야, 자네를 스카웃 하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저 따위를....? 큰 착오가 있으신가보군요. 저는 알려진 바와 달리 무패왕의 후예가 아닙니다. 후예 후보일 뿐이죠. 그리고 이번에 전직 퀘스트까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괜히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지 말고....”
“거 참 말 많네. 자, 우선 발할라로 가세. 특산품으로 콜라를 만들어 놨거든. Satisfy에서 콜라를 맛볼 수 있는 지역은 발할라가 유일할걸? 하하! 톡 쏘는 탄산을 음미하면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논의해보자고! 이럇!!”
“이, 이봐요!!”
오아시스가 무척 당황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려웠다.
자신을 무패왕의 후예로 오해하고 섭외하러 온 것이 분명한 아레스.
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격노하며 자신에게 보낼 경멸의 눈초리를, 오아시스는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거칠게 달리는 말 위에서, 아레스의 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그에게 아레스가 속삭였다.
“괜한 기대를 부려서 자네에게 부담을 안기려는 의도가 아니야. 자네에게 무엇을 요구할 생각도 없어. 그저 궁금할 뿐일세.”
아레스의 커다란 입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었다.
“전대 전설과 접점을 만든,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자네와 함께 그저 수다나 한 번 떨어보고 싶은 거라고.”
“.....”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위대한 인물.
이 말이 오아시스의 심금을 울렸다.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이미 특별하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특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들 힘내길...’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각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 희망을 놓지 말기를. 당신이야말로 당신 삶의 주인공임을 잊지 말기를.
아레스 덕분에 용기를 얻은 오아시스가 세상 모두에게 외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
“아레스가 무패왕의 후예를 데려갔다.”
살신 페이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양급 강자 흑요와의 1대1 대결에서 승리했던 ‘노력과 재능’의 결정체.
템빨 그림자단의 주인인 그가 라우엘에게 보고해왔다.
“반란에 실패한 무패왕의 후예의 패주를 아레스 군단이 도왔다.”
아레스가 루반나에 등장한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보고를 접한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패왕의 후예는 우리 템빨국 뿐만 아니라 발할라에도 도움을 요청했던 거군요. 아레스는 이를 수락했고.”
썩 좋은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이 신뢰 관계를 구축할 경우, 발할라의 힘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여지가 컸던 까닭이다.
‘무패왕의 후예가 아레스의 군대를 통솔하기라도 하면....’
상상만으로 소름 돋는다.
부르르, 몸을 떤 라우엘이 이내 피식 웃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이 순간 라우엘은 확신하고 있었다.
“무패왕의 후예는 가짜였네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서 무패의 칭호를 거머쥔 마드라.
그의 후예가 데뷔전부터 패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패주한 시점부터 후예의 자격을 잃었으리라. 아니, 애초에 자격이 없었으리라.
‘전설의 힘이라는 건 아무나 계승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아레스, 당신은 헛다리짚었습니다. 괜한 시간낭비를 하고 말았네요. 크큭.’
무패왕의 후예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 순간, 라우엘은 희열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리드야말로 무패왕의 적통을 잇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렇다.
라우엘은 스틱세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번헨 열도에서, 그리드가 무패왕의 일기장이라는 히든 아이템을 획득한 사실을 말이다.
‘파그마와 브라함에 이어서 이제는 무패왕의 힘까지.’
어쩌면, 그리드는 전설을 넘어서는 신화적인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라우엘은 기대했다.
하지만 과연 쉬운 일일까?
***
“만약, 그리드가 이대로 무패왕의 일기장을 완독하게 되면 무패왕의 후예가 되는 건가요?”
제3차 국가대항전 준비로 바쁜 S.A그룹 본사.
하지만 윤나희의 업무는 평소와 다름 없었다. Satisfy 운영팀장으로써 그녀의 본분은 유저들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윤나희의 질문에 임철호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드가 무패왕의 후예가 되는 건 불가능해. 무패왕의 후예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인물만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니까.”
“.....”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에게 가능한 일일 리가 없다. 비현실적인 전직 난이도이다.
혹시라도 그리드가 전설 클래스를 독점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였던 윤나희 팀장이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단.”
임철호 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힘의 일부를 계승하는 건 막을 수 없겠지. 그는 그럴만한 자격을 가졌으니까. 최근에 아그너스가 제국의 5기둥 중 하나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되네.”
“아그너스는.... 기술을 전수 받았다기보다 사기 쳐서 빼앗은 거 아닌가요.”
“그런가? 하하하!”
“....”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의 예측을 높은 확률로 빗나가는 기적의 5인방.
크라우젤, 그리드, 아그너스 등으로 구성 된 그들에게 임철호 회장은 큰 호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들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즐거워했다.
윤나희도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기적의 5인방은 늘 예상치 못한 행보를 걸었고, 제3자 입장에서 이를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로 재밌고 즐거웠으니까.
***
“스틱세이!!”
번헨 열도가 정화 된 이후, 스틱세이는 곧바로 템빨 아카데미 교장직에 복귀한 상태였다.
학생들에게 보다 효율적인 가르침을 주고, 이들이 템빨국에 보탬이 되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게끔.
궁리하며 바삐 지내는 스틱세이에게 그리드가 찾아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요구했다.
“투기로 검기를 대체하는 방법을 알려줘!”
스틱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꼭 알려드려야만 아시는 겁니까?”
“...?”
어째 반응이 떨떠름하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냈다.
“투기를 얻은 후에 한 번도 안 써보셨습니까?”
“어? 으, 응.... 그런데?”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크리스와 대화하며 짤막하게 사냥하긴 했지만 투기를 딱히 응용하진 않았다.
애초에, 투기를 '사용'한다는 개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투기는 수치가 오를수록 능력치가 강화되는 효과를 지닌 자원이었으므로, 전투 중 상승한 투기로 인해 강해지는 공격력을 체감했을 뿐이다.
“....당장 사냥터로 가보시죠. 투기를 쌓은 후에 검술을 사용해 보세요.”
“.....”
스틱세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또 바보 소리 들을만한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리드였다. 그가 뻘뻘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투기가 일정수치까지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거나 하는, 그런 허무한 결말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일단 사냥터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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