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8화
[브라함의 영혼이 떠났습니다.]
무수히 많은 추억을 함께 쌓아 온 친구가 떠난 것이건만, 짤막한 알림 창은 무미건조할 따름이다.
시스템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을 말이다.
“브라함.....”
혼자가 된 그리드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우울에 잠겼다. 자신의 가슴 한편에 늘 자리 잡고 있던 브라함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자 형용하기 어려운 상실감에 휩싸였다.
“.....”
다리가 떨어지질 않는다.
제자리에 굳어 선 그리드는, 브라함의 영혼이 떠나면서 남긴 하늘의 푸른 궤적을 오래토록 바라보았다. 궤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까지도 계속.
***
오아시스.
무패왕의 후예 후보가 되었으나, 결국 전직의 꿈과 멀어지고 만 인물.
그는 이번 전쟁 내내 넋을 잃고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 그리드.
타고난 재능(?)으로 최초의 왕이 된 이 시대의 주인공.
부와 명성, 여자.
이미 모든 것을 거머쥔 그가 무패왕의 검술까지 사용한 것이다.
오아시스는 감당하기 어려운 박탈감을 느꼈다.
어찌하여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하단 말인가!
이 세상은 정녕 주인공만을 위한 것인가!
지독한 현실이 오아시스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는 그리드가 세상의 모든 행운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상의 불공평함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과연 굉장한 사람이야. 그래, 아레스 님말처럼 노력 없는 행운은 존재하지 않아. 그리드는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오아시스는 더 이상 세상을 원망하지 못했다. 그리드를 시기할 수 없었다.
다섯 시간.
아레스 군단이 제국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전쟁을 수습하는 동안 그리드를 관찰하면서 오아시스는 전율했다.
‘그리드.... 무려 다섯 시간 동안이나 사색에 잠겨 있다니....’
전투가 끝난 후, 그리드가 하늘을 올려 본 채 사색에 잠긴 이유가 뭐겠는가?
‘전투를 복기하는 거겠지.’
오아시스는 확신했다.
그리드는 늘 저래 왔을 거라고.
‘어떤 사건과 사고를 겪고 나면.... 그리드는 언제나 저렇듯 몇 시간씩 투자해 가면서 상황을 복기해 왔던 거야. 그리고 그것을 성장의 양분으로 삼아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거겠지.’
복기한다는 것.
말이야 쉽지만, 그 누가 매번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특히 그리드처럼 몇 시간씩이나 투자해 가면서 말이다.
‘대단해.... 정말 대단하다. 나 따위는 질투할 수조차 없는 상대야. 그리드는 나와 근본부터 달라.’
하긴, 당연하다.
나는 평범한 사람인 반면, 그리드는 무수히 많은 위업을 남긴 최고의 랭커. 아니, 지존이 아닌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꾸욱.
무패왕의 낡은 칼집을 거머쥐는 오아시스의 손에 강한 힘이 실린다.
갈등하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칼집에 집착해도 되는 건가?
무패왕의 후예가 될 자격도 상실한 마당에.
한참의 고민 끝에.
‘역시 난 안 돼.’
무패왕.
오아시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현실을 깨달았고, 주제를 파악했다.
‘이 칼집의 정당한 주인은 그리드다.’
그리드는 이미 무패왕의 검술까지 사용할 수 있는 바, 만약 이 낡은 칼집을 그가 갖게 된다면 즉각 무패왕의 후예로 선택될 수 있을 터다.
‘이미 파그마의 후예라지만.... 세컨드 클래스라는 게 있으니까.’
저벅저벅.
결심한 오아시스가 그리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본래라면 먼발치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
그와의 대면을 앞둔 오아시스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급기야.
“아, 안녕하십니까?”
그리드에게 다가가 인사하면서, 오아시스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혀까지 깨물고 말았다.
그에게 힐끗, 그리드가 시선을 돌렸다.
“...!”
그리드의 검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오아시스는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우수에 찬 그리드의 눈빛이 하염없이 깊었으므로, 도무지 같은 또래라고는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멀리서, 또는 화면을 통해서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드의 실물과 대면한 오아시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고.
“무슨 일이시죠?”
그리드는 정중히 물었다.
만약, 이 자리에 그리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천지개벽하는 수준의 충격을 받았으리라.
왜?
본래 그리드는 예의가 없었으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드는 초면인 상대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사실 그리드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전반적인 한국인 게이머의 특징이었다.
과거, AOS장르 게임 ‘룰’이 성행하던 시절부터 한국인 게이머들은 예의를 상실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게임상에서 반말은 기본 문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드의 의식은 변하였다.
자신보다 족히 수백 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브라함에게 단 한 번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던 자신을 돌이켜 보고, 이를 후회하면서 발생한 변화였다.
그리드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차후 어떤 인연으로 발전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를 다짜고짜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믿게 됐다.
‘존중’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아, 그,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드와 실제로 대면한 그리드의 이미지가 너무 상반되자 오아시스는 당황했고 더욱 긴장했다.
우왕좌왕하는 그에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부터 추스르세요.”
그리드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리숙한 오아시스의 모습을 보아하니,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었고, 그렇기에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으며,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수년 전 자신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그리드는 알고 있다.
그토록 한심한 사람일지라도 당연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과거의 자신 또한 존중받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근데 정작 나는.’
약자를 존중한 적 없다.
적이 아닌 이상에야 굳이 나서서 괴롭힌 적 없고, 아군이라면 최대한 돕고자 노력해 왔다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마음을 헤아린 적은 없어.’
호감을 쌓기 전에는 누구라도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래, 브라함에게도 그랬다.
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욱 더 경계했고 존중조차 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브라함이 파그마에게 배반당했던 일을 이야기했을 때, 따스한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건넸더라면.
브라함이 나를 격려해 주었을 때, 나 또한 그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다면.
‘어째서 나는 브라함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못했던 걸까?’
그의 입장을 알고 있었다.
부활을 열망하는 그를 도우려고 시도해 볼 수라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입맛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그를 대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당신은 나를 좋아했다고...’
꾸욱!
그리드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를 보는 오아시스는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실 뿐더러 이토록 상냥한 눈빛을 보내 주시다니...?’
그리드는 왕이다.
단지 Satisfy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는 현실 세계에서도 왕처럼 군림할 수 있는 명성과 재력을 지녔다.
한데 오만하기는커녕 이처럼 따스한 사람이다. 놀랍다.
‘초심을 잃지 않는 건가.... 그렇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가...!’
온갖 방송을 통해서 노출됐던 오만함은 거짓된 연출이었으리라. 잠재 된 적들에게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한.
‘실로 존경스럽다.... 그래, 이분이야말로 무패왕의 후예로 적격해.’
그리드를 거대한 사람으로 보게 되자, 오아시스는 도리어 긴장이 해소됐다. 마치 불상 앞에 선 신자처럼 온화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오아시스가 그리드에게 무패왕의 낡은 칼집을 건넸다.
물론 이유 없는 호의는 아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니까.
어차피 자신은 될 수 없는 무패왕의 후예를 그리드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써 별도의 보답을 원하고 있었다.
‘레전드리 아이템 몇 개만 받아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
오아시스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야, 씨... 장난하냐?”
“?????”
무패왕의 낡은 칼집을 건네받은 그리드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온화한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오아시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 당장에라도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을 기세였다.
‘뭐, 뭐지? 갑자기 왜 이러지?’
당황하는 오아시스!
삐질, 식은땀을 흘리는 그에게 그리드가 무패왕의 낡은 칼집을 집어 던졌다.
“사람이 기껏 감정 잡고 있는데 와서는 이딴 잡템을 넘겨? 왜 괜히 시비야? 엉? 너 뭔데?”
“잡...템?”
무려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 퀘스트를 안겨 주는 에고 아이템을 잡템 취급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오아시스에게 무패왕의 낡은 칼집이 말해 왔다.
루반나에서 패주하고 퀘스트를 실패한 이후,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음성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짐의 소유권을 넘기려하는 게지? 선택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짐이 하는 것이다.
“....저는 자격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떨리는 음성으로 질문하는 오아시스.
그에게 무패왕의 낡은 칼집이 콧방귀 뀌었다.
-그 또한 짐이 판단할 문제. 너는 생각하지 말라.
“....”
오아시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영 멀어진 줄로만 알았던 꿈이 다시금 눈앞에 아른거리자 감격한 것이다.
그를 보는 그리드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사람 앞에 두고 혼자 떠드는 거 보소... 완전 미친놈이네.’
역시, 아무한테나 친절하게 굴면 안 된다. 만만하게 보여서 별의별 놈이 꼬이게 마련이다.
생각하는 그리드에게 일단의 기마대가 달려왔다.
전쟁을 수습하고 돌아오는 아레스 군단원들이었다.
말에서 내린 아레스가 그리드에게 깊이 고개 숙였다.
“이번에는 정말로 감사했네. 자네의 도움 덕분에 기대 이상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어.”
아레스가 계획한 이번 전쟁에서 리벨론 숲은 ‘첫 번째 요격지’에 불과했다. 제아무리 리벨론 숲의 지형과 기후를 이용하더라도, 아레스는 결국 이곳 방위선이 돌파당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또 다른 함정들을 여러 곳에 준비해 놓았지만, 그 함정들이 제국에 노출되기 전에 제국군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적으로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아레스에게 그리드가 손사래 쳤다.
“아니요, 당신께 감사받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리드가 이번 전쟁에 참가한 이유는 발할라를 위해서라기 보다 템빨국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 사실은 물론 아레스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발할라가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자명한 사실. 보답할 수 있게 해 주게.”
짝짝!
아레스가 크게 손뼉을 치자 500명의 병사가 달려와 도열했다.
한눈에 봐도 훈련이 잘된 강병들이었다.
“상위 특성을 몇 개나 부여한 정예 중의 정예야. 이번 전쟁으로 레벨도 270대까지 올랐네. 이들은 어쩌면 기사까지 성장할 수 있을걸?”
“....?”
“거두어 주시게.”
“네?”
“이 병사들, 자네가 받아 달라고.”
“.....”
발할라는 템빨국에게 강병을 보급하고 템빨국은 발할라에게 아이템을 보급한다.
바로 그것이 아레스가 꿈꾸는 이상적인 동맹 관계였다.
“오늘을 기점으로 양국 간의 교류가 더욱더 활발해지기를 바랄 뿐일세.”
“....뜻은 잘 알겠습니다.”
살짝 목례한 그리드가 병사들과 함께 발할라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오아시스는 무패왕의 낡은 칼집에게 질문했다.
“저분이야말로 당신이 찾는 패자(霸者)에 적합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아깝지 않으신지요?”
이에 들려오는 답변은.
-저자는 이미 패자다. 짐의 의지 일부가 담겨 있을 뿐인 이깟 칼집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닌 게지.
“.....”
이 오만한 에고 아이템에게까지 인정받다니, 과연 굉장한 사람이구나.
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아시스의 눈빛에 담기는 것은 선망이었다.
‘저도 언젠가는 당신과 어깨를 나란히... 아니, 당신이 의식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승하시길.’
영웅 중의 영웅이 남긴 발자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뒤따른다.
이제 그리드는 누군가의 목표가 되는 존재였다.
그리드가 크라우젤을 목표로 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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